2015년 11월 30일 월요일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의 의미 by Gary Wilkerson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구원할 뿐 아니라 양육시켜줍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디2:11).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바울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했습니다. 더 얘기할 것이 있을까요?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바울은 재빨리 이와 같은 은혜가 “경건하지 않는 것을 버리도록 양육하신다”(디 2:12)고 덧붙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묘사하는 것은 주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건하지 않거나, 세상적인 욕심, 이기적인 마음, 현재 우상 숭배하는 것을 버리는 것을 요구합니다(디 2:12).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한 삶뿐 아니라 현재의 풍성한 삶도 공급해줍니다. 주님 안에 거함으로서 복되고 신성하며 평안한 삶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디도에게 과감히 말합니다.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디 2:15). 이 구절에서 바울의 주제는 은혜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요점을 말하면, “은혜가 설교 되지만 불경건한 것을 버리도록 훈련시켜주지 않는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려면, 말씀에서든 친구에서든 오는 책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연단 징계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12:11).

하나님의 연단은 아픔과 영광스러운 열매 맺음에서 놀랍습니다. 평안이 없습니까? 삶의 근원인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곳에서 영양분을 얻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마음에 연단의 칼을 들어달라고 부탁하십시오. 아마도 속하지 않는 것들을 자르고 없애 버리실지 모르겠지만, 연단이 끝났을 때에는 그루터기가 아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무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왜 연단의 칼이 필요할까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11). “충만”은 완전하고 큰 능력을 의미합니다. 선하고 진실하며 아름다운 말씀을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준 것같이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양식이 됩니다. 하나님의 연단은 우리를 사랑하는 정원사의 손에서 기쁨을 생산합니다.

2015년 11월 27일 금요일

자욱한 혼돈

지금 이 메시지를 읽는 크리스천들 중에 혼돈과 혼란에 빠져있는 분들은 몇 명이나 될까요? 혹시 당신이 지금 혼돈과 혼란에 빠져 있습니까? 응답 받지 못한 기도가 있으십니까? 멈추지 않는 우울감에 빠져있습니까? 말로는 표현 안될 일들을 겪고 계신가요? 당신의 삶과, 상황 그리고 사람들에 의하여 실망하였습니까?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며,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하였는지 찾아보고 있습니까? 우울하고, 절망에 빠져있으며, 분별을 할 수가 없으며, 여기서 어떻게 헤어나와야 할지도 모르시겠습니까?

당신은 성숙된 크리스천이며, 수년동안 진리의 말씀을 들으며 성장하여 왔지만, 지금 자신을 의심하며 자신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때 경험해봤던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혹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화나 계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제가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믿습니까? 설교자를 통하여 들은 말씀과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사탄과 싸우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그저 무시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당신과 동행하시며, 당신의 삶의 모든 것의 주관자이심을 인정하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어두움에 자신을 노출시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두움에 사는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요한복음 12:35). 다른 말로는, “그런 사람은 길을 잃은 것이다. 가는 길을 헤매고 있으며, 분별력이 없으며, 그저 시야가 가리워진 상태에서 계속 걷고 있는 것이다.”

저는 그런 자욱한 어두움 속으로 걸어가는 느낌이 무엇인지 이해합니다. 모든 것이 헷갈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명료하게 들리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 답을 빨리 얻고 싶어서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예전처럼 하나님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결국에 당신은 하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명백한 불신에 대하여서는 연민도 동정심도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불신에 대하여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았던 빛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언약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들리기 시작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때에 우리는 어두움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믿음으로 돌아올 때에 어두움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2015년 11월 26일 목요일

빛으로 걸어가는 삶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요한복음 12:35). 여기서 어두움이 의미하는 것은 “영적 시야가 가리워지는 것, 혼돈, 불명료함, 우울”입니다. 처음에 저는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어두움이라니?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그러한 어두움에 붙잡힐 수 있을까?”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빛의 물결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50년 이상 사역하는 동안 저는 하나님의 능력이 영적인 사망에 놓인 사람을 일으키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였습니다. 마약 중독과 술 중독이라는 무덤에서 생명으로 걸어가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십자가와 칼이라는 책에 기록한 모든 것은 오직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내용입니다. 평생 사역을 하면서 저는 죽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통하여 생명을 얻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새 언약, 예언의 성취,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등의 다른 광선형태를 가진 빛도 보았습니다. 사실 저는 요한복음 12장에서 언급된 모든 것, 그 이상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그의 백성들에게 유대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는 시각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말씀에서뿐만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가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위한 놀랍고 위대한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에게 신약성서를 통하여 지시해주셨으며, 성령님을 통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듯, 우리에게는 우리를 신성하고 거룩한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게 하는 “더 나은 언약”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빛으로 넘치게 채워줄 수 있는 성령충만한 선생, 목회자, 설교자, 그리고 선지자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진리로 채워주며, 영광스러운 약속들을 전해주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매번 상기시켜줍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축복을 가지고 어떻게 우리가 어두움에 붙잡힐 수 있을까요?

보통 우리가 영적인 어두움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무신론자들을 생각합니다. 아니면 근심과 공허함에 지칠 대로 지친 죄악에 빠진 죄인들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2장에서 언급하신 어두움은 그러한 형태의 어두움이 아닙니다. 이 어두움은 혼돈과, 영적시야의 가리워짐, 분별력의 상실, 영적 그리고 정신적 우울감을 의미합니다.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올 수 있는 어두움입니다.

그런 어두움이 다가올 때, 유혹과 절망에 포위될 때 우리는 확신을 갖고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역사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초자연적으로 구원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나를 구하여 주옵소서. 나의 연약함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완전하여지기를 원합니다.”

2015년 11월 25일 수요일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마태복음 18:32-33).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나는 나의 형제들의 용서하는가?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가?” 내가 용서받은 것과 같이 나의 형제들을 사랑하며 용서하기를 거부한다면 예수님께서 나를 “악한 종”이라고 부르실 것입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을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 말씀의 요지는 우리가 죄를 허용하며 타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은혜에 대하여 담대하게 전하였지만 디모데에게 이렇게 지시하였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디모데후서 4:2). 우리는 순전하고 진실된 말씀의 담대한 수호자(guardian)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과 교리로 서로 간에 벽을 쌓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지은 죄목이었습니다. 율법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라고 명시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그 율법 만으로는 물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규율과 조건들을 만들어 안식일에는 육체적인 움직임을 최소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라고 지시합니다. 그리하여 바리새인들은 더욱 더 큰 벽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라고 하였으니 아예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면 망령되이 일컫게 될 일도 없지 않겠는가?”

예수님께서 나누셨던 감사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서 주인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마태복음 18:34). 그리스어로는 이 말씀이 이런 의미를 갖습니다. “밑바닥으로 끌고가 고통을 안겨주다.” 저는 이 말씀을 볼 때에 예수님께서 지옥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만 같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18:35).

저는 이 비유를 읽을 때 몸이 떨립니다. 이 말씀을 읽고 나서는 저는 무릎 꿇고 얼굴을 땅에 묻어 예수님께 나의 형제들을 중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사랑으로 세례를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다음의 기도는 제 기도이지만 여러분도 함께 하여 당신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쉽게 화를 내며 분노로 반응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내하심 없이는 내 삶은 그 어떤 의미도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사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깊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때에 제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영으로 나의 형제들에게 자비함과 인내를 보일 수 있을 것 이라고 믿습니다.”

2015년 11월 24일 화요일

하나님의 선하심과 놀라운 사랑

심판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종들, 그리고 하나님께 많이 용서받은 사람들이 왜 그들의 형제들과 교제하기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자, 이 문제는 가장 근심스러운 죄에 근본이 있습니다. 그 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이렇게 결론을 지었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인정하는 데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던 시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율법주의 적인 믿음으로 살았고 그런 설교를 전하였습니다. 저는 거룩함을 추구하며, 그것을 율법주의적인 기준에 맞추어서 살아가기를 노력함으로써 얻을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내가 삶에서 해도 되는 일 또는 하면 안 되는 일의 목록만 가져다 주었습니다.

실제로는, 그저 나의 모든 것이 밑천까지 드러나는 십자가 앞에 있는 것보다 나는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선지자들의 곁에 있는 것을 더 편하게 느꼈던 것입니다. 나는 평화에 대하여 설교했지만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하나님의 사랑과 주께서 나의 허물을 덮으신다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너무 연약하고 악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기에는 너무 값어치가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저는 하나님의 은혜보다 나의 죄를 더욱 확대시켜 보았던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저는 다른 사람 모두를 판단하였습니다. 저는 세상과 타협하는 나 자신을 보듯이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판단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은 나의 설교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내 마음 안에 일어나는 악 때문에 다른 사람의 악에 대하여 판단하며 부정적인 말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8장 32-33절에 나오는 감사할 줄 모르는 어떤 종과 같이 저는 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나를 사랑으로 인내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자비로울 수 없었습니다.

결국에는 진짜 들어야 했던 질문이 내게 명료하게 들려왔습니다. 그 질문은 “왜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렇게 용서를 할 줄 모를까?”가 아닌 “내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데, 그가 명하신 대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한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 4:31-32).

2015년 11월 23일 월요일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by Gary Wilkerson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요한복음 15:2).

과실을 맺는 크리스천들의 가지가 가지치기를 당했습니까? 사실 열매가 달린 나의 가지가 제거되는 것은 평생을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하는 보상은 아닙니다. 우리들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하나님께 어떤 보상을 받고자 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게 공평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위의 구절에서 언급하신 내용은 사실 반문화적이고 일반적인 직관에 반하는 사항이었습니다. 저는 자라면서, 어떠한 성취를 하였을 때 칭찬을 한번 받기가 굉장히 어려웠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아이들이 그저 팀 스포츠에 참여하기만 해도 온갖 트로피를 상으로 받습니다. 제가 어릴 적 받지 못한 보상 때문에 그저 씁쓸해하는 중년남자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오늘날의 아이들이 부모들로부터 받는 긍정적인 칭찬과 지원에 대 찬성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최근에 아이들을 너무 애지중지하게 키워 발생하는 이차적인 문제들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지적 받기를 싫어하며, 하는 모든 일마다 축하해주기만 하니깐 아이들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옳다고 여깁니다.

자 이런 현상은 오늘날의 교회들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누리면서 교정을 받고 지적을 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누어주신 과실을 맺는 가지에 대한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저 애지중지하게 아이들 돌보는 부모가 주는 사랑보다 더 깊고 넓은 사랑을 주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 네가 나를 기쁘게 하는 좋은 과실을 맺고 있기는 하나 나는 너에게 더 크고 풍성한 생명의 기쁨을 주고 싶단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가지치기를 하면서 너에게 주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가지치기를 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와 제 아내는 지난해에 가지치기를 하는 정원사를 보면서 어렵게 깨달았습니다. 여행을 다녀왔을 때 저희의 정원에는 단 하나의 초록빛을 띠는 식물은 없었고 모두 가지치기를 해서 열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정원은 버려지고 외로이 떨어진 어떤 행성의 오래된 정원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정원사를 바꿔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봄이 되고 나니까 모든 식물들이 지난해보다 두 배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식물 하나하나가 모두 더 빠르고 풍성하게 자랐습니다. 한때는 황폐한 것 같았던 정원이 이제는 아름답고 깔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하시는 가지치기도 그렇습니다. 겪을 때는 아프고 힘듭니다. 그리고 가지치기를 받는 모습이 아름답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지치기를 통해야만이 더욱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2015년 11월 20일 금요일

하나님의 인자하심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 하느냐.?” (롬2:4)

여기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멸시 하느냐” 는 무슨뜻 일까요? 여기서 멸시란 “그가 생각하기에 불가능하다” 란 뜻입니다. 바꿔 말하면, 이 믿는 자는 이렇게 말한 것 입니다. “이런 은혜와 자비는 불가능하다. 난 도저히 이런 은혜와 자비를 헤아릴 수 없다.” 그의 신학과는 맞지않는 부분 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받아들이는 대신 거부했습니다.


마태 복음 18장 23-35절에 등장하는 배은망덕한 종은, 왜 왕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했을 까요.? 이유는 단 하나- 그는 그의 죄에 대한 심각성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왕은 그 종에게 이미 말해주었습니다. “너에게 자유를 주노라. 더이상 죄책감도 갖지 말라. 너에게 필요한 일이나, 그 어떤 체벌과 책임도 없다. 네가 해야할 일은, 내가 너에게 보여준 선함과 관대함에 집중하는 것 뿐이다.”

비극적이게도,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대신, 그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종에게 일어난 일이 이것입니다. 그 종은 왕이 그에게 베푼 자비의 핵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관대하심과 과분한 용서의 목적은 단 하나 - 우리를 회개의 자리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사도바울이 묻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의 자리로 이끌기 위해서 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까?”

이 말씀에서, 왕이 종을 용서한 이유가, 바로 회개 시키기 위해서란 것이 분명합니다. 왕은 자기를 믿는 종이,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을 하기보단, 왕의 인자함 안에서 안식을 누리기 원했던 것 입니다. 이런 안식은 종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여유를 줄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종은 회개하는 대신, 왕의 인자하심을 의심하며 떠났습니다. 그리고 종은 대비책을 세웠습니다. 그는 왕의 자비를 멸시하며 다른 이들을 비판하고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큰 고통속에 살고 있을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사람은 용서가 허락되는, 거룩한 곳을 떠났습니다. 그곳은, 그가 주님의 인자하심과 은혜를 경험한 곳 이었습니다. 그는 기쁨대신, 완전한 자유를 멸시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불가능하다 여기는, 믿는자들은, 사단의 거짓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는 영혼의 안식이 없습니다. 그의 생각은 늘 혼란속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는 늘 심판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런 고문같은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싸움과 갈라짐이 이렇게 많은 건가요? 그래서 많은 목사들이 서로 싸우며, 더 많은 교단들이 서로간의 친목을 거부하는 걸까요?

2015년 11월 19일 목요일

은혜와 책임

마태복음 18장23-35 절 비유에서, 왕은 종의 죄를 눈감아 준 것인가요? 그 종의 부채를 눈감아 주고 대충 없었던 일로 한 것인가요? 아닙니다. 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왕이 종의 죄를 용서해주며, 그 종의 어깨에 무거운 책임을 지워 주었습니다. 부채보다 더 무거운 책임을 말입니다. 이제 종은 왕에게, 전보다 더 많은 것을 빚지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단순히 왕에게만 빚을 지었지만, 이제는 왕이 그에게 한 것처럼, 그 종도 다른 이들을 똑같이 용서해주고 사랑해주어야 할 책임이 생겼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책임입니까. 이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왕국에 대한 것들과 함께, 따로 다룰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6:15) 예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만약 너희가 다른 이들을 용서하지 아니한다면, 나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 이 말씀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명령 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결국은 이것 입니다. “난 너에게 관대하였다. 나는 사랑과 자비로 너희를 다루었다. 오직 나의 선함과 자비로 너희를 용서했다. 그러므로 너희도 똑같이, 너희 형제와 자매를 사랑과 자비로 대하여라. 내가 한 것같이 댓가 없이 용서하거라. 내가 너희에게 보여준 사랑과 은혜를 너의 가정, 직장, 교회 그리고 어느곳 에서든지 , 모든이에게 행하여라.”

사도바울도 예수님의 명령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골3:13)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신 이 명령에 어떻게 순종하는지 설명해줍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3:12-14)

관대하다란 무슨뜻 입니까? 그리스어로는 “참고 견디다” 란 뜻 입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것 일지라도 참고 견디라는 것 입니다. 다른이들의 실패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도 참고 견디라는 뜻 입니다.

2015년 11월 18일 수요일

주님의 자비를 받다

마태복음 18장 23-35절을 통해, 우리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 대해 듣게 됩니다. 여기서 나오는 종은 능력있고 믿음직한 종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곧 채무자 중 채무자로 밝혀집니다. 이 종은 잘못된 동기를 가졌으며, 그 어느 누구의 자비를 받을 만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인은 그를 댓가없이 용서해 줍니다 . 마치 예수님이 저와 당신을 용서해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회개에 관한 짧은 말을 하겠습니다. 회개란 주로 방향을 바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에 가지고 있던 태도나 방식으로부터, 180도 전향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회개란 경건한 슬픔이 따릅니다.

하지만, 새언약은 또다시 구언약의 개념을 새롭게 합니다. 회개란 단순히 육신의 죄를 멀리하며, 지난 과거를 후회하거나, 하나님을 슬프게 해 속상한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비유를 보면, 회개란 우리가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되돌아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믿는자들이 이런 잘못된 생각에 빠져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지을 때, 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거야. 주님께 진실된 눈물, 진심어린 기도, 그리고 성경을 더 많이 읽으면, 다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거야.” 안타갑게도 그건 불가능한 일 입니다. 이런 생각의 결말은 오직 하나 ¬- 가망 없는 절망 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힘들어 하고 늘 실패하다, 결국엔 진짜가 아닌 가짜 평화로 만족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속이며, 거짓된 거룩함을 추구합니다.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을 구원에 이르게 했습니까? 여러분의 눈물과 진실된 간청 이었습니까? 슬퍼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괴로워하는 모습 이었습니까? 혹은 죄짓는 삶에서 멀리하겠다는 다짐 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이것들 중 그 어느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을 구원해 준 것은 오직 은혜 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종처럼, 여러분 역시 주님의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아무리 거룩해도 자격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진정한 회개에 이르기 위해 아주 단순한 공식이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은혜를 갚을수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없애야 합니다. 내가 어떤 일이나 행위로 주님의 은총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일이나 노력으로 내 죄를 지울 수 없습니다. 난 그저 주님의 자비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구원과 자유의 길 입니다.

2015년 11월 17일 화요일

하나님을 갈망하는

예루살렘에 부흥이 있었을 때에, 천사가 사도빌립에게, 가사 사막으로 가면 수레를 타고 가는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도빌립이 내시를 만났을 때 그는 이사야서를 낭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시에게 “읽는 것을 깨닫느냐? ” 물었습니다. (행8:30)

듣고 있으니, 그 내시가 이해하지 못하는 한 부분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사53:9-11)

이렇게 훌륭한 글을 읽으며 흥분하는 에디오피아 내시를 상상해보세요.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왜 성경을 읽고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곧 오실 영원한 왕을 드러냈습니다. 새로운 계시를 들을 때마다 아마도 내시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과연 이 훌륭한 사람은 누구인가?”

첫째로,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행8:35) 빌립이 내시에게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에 등장하는 사람은 벌써 오셨고, 그의 이름은 나사렛 예수라. 그가 메시아 이다.” 라고 설명했습니다.

다음은, 빌립이 이사야서 53장 11절을 설명하였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빌립이 내시에게 말하기를,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고역은 십자가에 못 박힘 이었다. 그때 그는 십자가에서 버림받고 묻히셨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셨고 이제 그는 영광 속에 살아계신다. 그 어느 누구든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고 그를 믿으면 그의 자녀가 되리라. 맞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씨앗은 만국에 있습니다. 이렇게 그의 삶이 – 그의 자녀들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 연장됩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도 그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에디오피아 내시에게는 이 얼마나 놀라운 뉴스입니까. 어떻게 보면 수레에서 내려와 침례받기를 원했던 것은 당연한 일 이었습니다.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행8:38)

2015년 11월 16일 월요일

포도나무 안에 거하라 by Gary Wilkerson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요15:1)

예수님께서 본인을 “참” 포도나무 라고 언급하실때, 예수님 말씀의 관점은 정확한 정보 전달에 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참” 이란 – 실제, 진짜, 그리고 지원이 필요할 때 물질적으로 도와줄수 있는 “참 친구” 란 뜻도 있습니다.

그러면 농부이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는 그의 정원을 사랑으로 완벽하게 돌보시는 분입니다. 우리 안의 생명의 흐름을 책임지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잘 자랄수 있도록, 적절한 방법과 정원의 알맞은 자리로 우리를 기르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 포도나무” 에 붙어서,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우리 삶에 대한 걱정과 근심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참 생명의 흐름을 주셨고,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만약 우리가 포도나무에 접목 되었다면,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지 않을까요? 구원의 확신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다면, 또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 가운데 있다면, 어떻게 그런 자가 열매를 맺지 못할까요?

다시 예수님께서 키워드를 주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15:4) 여기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경보를 울릴만한 말이 또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한다면 ” 이 말씀을 읽을때, 일부 믿는자들은 겁을 냅니다. 그들은 스스로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될 것들에 대한 규칙을 만듭니다. 이런 규칙들이 그들을 참 생명으로부터 잘라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방정식처럼,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이 있는것 처럼 예수님께서도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 그분의 임재는 변함없고, 충실하며, 요동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13:5) 예수님께서 “만약 너희가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이라고 하셨을 때, 이것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확보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 – 우리의 증인, 올바른 삶, 우리의 기쁨과 평화 에 대한 것 이었습니다.

2015년 11월 14일 토요일

속임수, 말장난은 없습니다 by Jim Cymbala

하나님께서 한 지역의 도시에 일하시는 모습을 기록한 예로 사도행전 11장의 이야기보다 더 좋은 예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사도행전 11:20-21).

이런 믿음의 수확은 바나바가 예루살렘에서 그 도시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보내졌을 때 일어났습니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23-24절)

자, 예루살렘에 위치한 모교회보다 결국에 크게 성장하게 된 이렇게 큰 교회를 일으킨 이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우리는 그들의 이름도 그들의 신학도 방법론도 모르지만 몇가지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전파하니 …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20-21절).

이 교회는 다문화를 수용한 최초의 교회로서 사도행전 13장 1절에 보면 흑인인 시몬, 그리스인, 유대인 그리고 마나엔, 헤롯의 어릴적 동생 등의 다양한 인종/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동역하며 더욱 더 강력한 다문화적인 통합을 이루어 냈습니다.
1세기 때에는 오늘날의 인종차별과는 차원이 다른 유대인-이방인 증오가 존재하던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종 갈등을 미리 예측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를 세우셨던 것입니다.

현시대에, 뉴욕시의 인종갈등도 10년 전보다는 훨씬 악화된 상황입니다. 수많은 교회에 그로 인한 불편한 감정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래 전 안디옥 교회에서처럼 이러한 긴장을 완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 어떤 가르침도 해결 할 수 없는 사안입니다. 기발한 지름길도, 속임수도, 말장난도 사탄을 이길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브룩클린의 지형학적인 지도를 가지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지역의 가장 높은 고도의 위치를 파악하여 그 곳에 가서 우리 지역을 앗아가려는 귀신들을 내쫓기 위하여 기도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내리게 하는 열쇠는 도시의 곳곳의 거리에서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행진을 하고, 현수막을 만들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는 큰 퍼레이드를 해야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북쪽을 향하여 발로 땅을 내리치며 귀신을 내쫓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자 우리의 생각으로 만드는 모든 새롭고 신기한 아이디어들은 모두 잊어버립시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언제 어떻게 하실 지는 모두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그의 피의 능력, 그리고 믿음의 기도는 단 한번도 힘을 잃은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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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짐 심발라(Jim Cymbala) 목사님은 뉴욕의 한 소외된 지역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건물에서 이십명도 채 안 되는 성도들과 함께 브루클린 테버네클(Brooklyn Tabernacle)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브루클린 태생이며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 그리고 게리 윌커슨 목사님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월드챌린지(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5년 11월 13일 금요일

주여, 다시 한번 일으키소서!

마가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군중을 먹이셨습니다. 이번에는 사천여명을 7개의 빵과 몇 개의 물고기로 먹이셨습니다. 다시 한번, 제자들은 먹고 남은 조각을 여러 개의 바구니에 거두었습니다(마가복음 8:5-8 참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제자들의 불신을 보고는 물으셨습니다.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마가복음 8:17).

저는 이 두 번째 기적을 본 제자들이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지?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이라면, 왜 우리를 통하여 저 놀라운 능력을 보이시고 기적을 행하신 것이지? 우리는 그저 못 배운 어부일 뿐인데.. 예수님께서는 왜 물위를 걷는 놀라운 일을 더 크고 영향력 있는 군중 앞에서 보이시지 않으시고 하찮은 우리 앞에서 보이신 것이지?”

여러분도 아마도 자신에 대하여 비슷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왜 내게 말씀을 하시고 나를 선택하신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여러분의 구원과 변화는 절대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구원받으신 사건은 이유 없이 일어난 자연현상이 아닌,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크리스천의 삶에는 그저 자연적인 일은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초자연적입니다. 태초부터 시작하여 당신이 구원받은 사건 또한 모두 온전히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능력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는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는 그 능력은 온전히 초자연적입니다. 이 세상은 어두움에 있지만 당신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기 때문에 빛 안에 있습니다. 당신의 육체가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도 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초자연적이신 하나님의 거하시는 곳이 나의 몸이라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간혹 우리의 마음이 단단해지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일을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자연적인 일로 여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기사와 이적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난 기적을 보고 “그냥 우연히 일어났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일에서 ‘초’를 빼고 자연적인 일로 여기기 시작한 순간, 당신의 마음은 더욱 더 단단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저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몇 개의 빵으로 수천 명을 먹이신 초자연적인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기 중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능력은 당신을 구원할 것입니다. 또한 당신을 자유 안에서 살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당신의 연약함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어려움이 닥쳐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런 환난이 닥쳐올 때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여, 다시 한번 일으키소서. 내 삶에서 이미 기적을 일으키셨었습니다. 또한 과거에도 이미 하나님의 종을 초자연적으로 구원하셨습니다. 나의 연약함 중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여 지기를 소망합니다.”

2015년 11월 12일 목요일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 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 맹세하여 가라사대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신명기 1:27-35 참고)

당신은 구원받고, 성령충만하며, 거룩한 삶을 살고 있지만, 불신의 죄를 짓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나는 하나님을 불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삶에서 일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될 때 화가 나십니까?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릴까 두렵습니까? 미래에 대하여 불안하고 두려우십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있는 신자는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평안을 누립니다. 이 평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완전하고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온전한 의지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평안이 바로 믿음의 증거입니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크리스천의 마음이 불신으로 완고해질 수가 있을까? 마가복음 6장에서는 놀라운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제자들은 베데스다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습니다. 갑자기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시며 나타나셨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유령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마가복음 6:50). 그리고 예수님께서 배에 올라타셨을 때 바람은 멈추었습니다.

그 다음 구절에서는 제자들이 그 순간 느꼈던 생각을 모두 말해줍니다.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6:51-62). 여기서 둔하여졌다는 그리스어의 의미는 돌처럼 단단하여진, 눈이 먼, 고집스러운 불신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열두 제자는 이전에 엄청난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열두 제자를 통하여 일하셨으며, 마가가 말한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라고 말한 의미는 제자들이 기적과 예수님의 능력을 연결시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둔하여지는 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에서 ‘초’를 제거하였을 때 나타납니다. 열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불과 24시간 전에 목격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그저 자연적인 현상으로 인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아직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2015년 11월 11일 수요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

약속의 땅을 염탐하러 갔던 스파이들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높은 성벽과 거인들이 가득 찬 곳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들과 비교했을 때는 우리는 메뚜기 같아 보입니다.”(민수기 13장 참고).

자, 이 염탐꾼들은 하나님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은 그러한 불신을 말로 차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적의 눈에는 작은 벌레만하다니까요.”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순진하고 안전한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빛이시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한 모욕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무능력과 연약함에 대하여 불평불만 할 때는 자신을 낮추는 행동과 생각이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낮추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지 않음으로써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빛으로 오신 주님에 대한 불신과 죄이며 어두움을 가져오는 생각의 씨앗입니다.

이스라엘 염탐꾼들은 그들의 연약함과 무능력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말까지 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두려움과 불신에 어떻게 응답을 하셨습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수기 14:11).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죄를 물으셨습니다. 그 죄는 바로 불신 이었습니다.

오늘날 믿는 우리에게도 이스라엘에게 물으셨던 똑 같은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약속한 모든 것을 언제쯤 믿겠니? 내가 너의 연약함 중에 힘이 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너희는 육체의 능력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이 땅 위에서 연약하고, 가난하고, 멸시 받는 자를 들어 사용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여호와이며 변치 않는 능력의 하나님이니라. 나의 능력, 나의 영으로 너를 힘있게 할 것이니라. 그러니 너는 이 약속을 믿고 따르겠니? 언제쯤 나를, 나의 약속을 믿겠니?”

2015년 11월 10일 화요일

유월절의 증인

유월절에 관한 대부분의 설교는 그때 사도들이 행한 기사와 이적에 초점을 맞춥니다. 아니면 그들은 삼천여 명의 구원받고, 방언을 말하며, 일어난 불길 등의 사실에 강조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월절의 가장 놀라운 사실을 쉽게 간과합니다.

기사와 이적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사도행전 2:44-45; 4:34-35).

이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수많은 가정들과 농장들을 모두 팔고, 뿐만 아니라 집안 살림, 가구, 옷, 주방도구, 예술품 등의 모든 물건을 팔았습니다. 길거리에서, 시장에서 도시의 출입구에서 물건들을 팔았습니다. 아마도 예루살렘 역사상 가장 큰 벼룩시장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말씀에서는 집을 팔았던 사람들이 원래 거주하는 집을 매매한 것인지에 대한 사실여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평소에 사는 자기 집을 판 것이 사실이라면 교회가 집이 없어진 사람들에 대한 부담을 감당해내야 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가족과 자녀들을 위해 공급하라는 명령이 이록되어 있었고, 신자들은 자신의 집을 팔았을 경우에 그 명령을 지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서로의 집에서 모여 교제를 하였다는 기록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사도행전 2:46). 분명한 것은, 그들은 아직도 거주하는 집은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팔았던 물건들은 필요 이상의 물건들이었습니다. 생필품이 아닌 것들을 팔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런 물건들이 아마도 주인의 마음을 옭죄고 방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건들을 팔아 현금화한 다음에 교회의 과부들, 고아 그리고 노숙자들을 위해 기부하였습니다.

이들이 바로 유월절의 증인들이었습니다. 세상은 성령으로 힘입은 신자들이 서로를 사랑하며, 자신의 소유를 팔아 서로를 돕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유월절의 증인들로부터 기대하는 행동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삶으로 행동으로 아버지의 사랑의 증거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2015년 11월 9일 월요일

참된 포도나무 by Gary Wilkerson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한 마지막 밤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땅 위에서 마지막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셨습니다.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요한복음 14:31). 제자들과 함께 떠나셔서 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1-5).

우리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요약해주는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그로부터 나오는 가지 –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의 근원은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생명을 유지시키고 성장하게 하는 정원사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스도안에 사는 우리의 생명을 보다 선명하고 아름답게 표현된 구절입니다.

이 말씀에서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정원사가 사용하는 날카로운 칼날과 같은 도구도 생각나게 합니다. 또한 자비롭고, 자애로우시며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도 생각이 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저 단순히 생명의 자원뿐 만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바로 생명의 단 하나뿐인 근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포도나무들도 성공적이고 윤택한 삶을 기대하게 할 수도 있으나, 진리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다른 포도나무들에서 생명을 구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야망, 성공 그리고 편안함 등의 예수님이 아닌 다른 포도나무들이 아무리 합법적으로 보이고 좋아 보일지라도 그것에는 참된 진리와 생명이 없습니다. 그들은 참된 생명을 생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포도나무에 단단하게 접목되어 풍성한 생명을 매일 공급받기를 원하십니다.

2015년 11월 7일 토요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공급자가 되십니다 by Carter Conlon

제가 본격적인 목회를 하기 위하여 다니던 직장을 사임할 시기를 기억합니다. 그때 저는 은퇴계획으로 은행에 적정한 금액의 돈을 저축하였습니다. 저는 사실, 이 목회와 사역이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저축한 금액으로 다시 재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역을 하는 어떤 친구 한 명이 제 사무실에 찾아와서는 말하였습니다. “목사님, 저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제 차의 엔진이 갑자기 망가졌고 저는 지금 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저는 지금 교회에 갈 방법도 없는 상태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어려움에 닥쳐 있구나 라는 것을 인지하였고, 그리고 제 통장에 그가 차를 살 수 있을 만한 금액의 돈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갑자기 너무 너무 거룩해져서는 이렇게 말해버렸습니다. “아 그렇다면, 우리 기도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수천 개의 목초지뿐 아니라 그 위의 소떼들도 모두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다윗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편 37:25).”

그가 제 책상 건너편에 앉았을 때, 우리는 함께 기도했습니다. 저는 그때에 제 입에 땅콩버터가 한 가득 들어있는 것처럼, 기도를 하는데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기도하는 동안 제 안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위선자!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요한일서 3:17).” 저는 이러한 목소리를 기도하면서 좇아 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돈이 필요하면, 내 통장에 돈이 있습니다.”

결국에 저는 그에게 새 차를 사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차의 엔진이 고장이 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께 순종하였습니다. 그 더 이상은 할 말이 없습니다.”

얼마 후, 시골에 있는 교회를 구입하여 리모델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천장 페인팅을 돕고 있었을 때에 어떤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 제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긴급한 전화가 와있습니다!” 제가 전화를 받았을 때에, 전화건 사람은 제게 지역의 자동차 세일즈맨이라며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떤 신사분께서 오늘 아침에 찾아와 당신을 위해 새 차를 구입하였습니다. 그냥 오셔서 서명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그 신사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지만, 세일즈맨은 그가 익명으로 남기를 원하였다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이 이야기를 나눈 이유는 여러분께서 어떤 친구를 위하여 차를 사준다면, 되로 새 차를 선물로 받을 것이라는 의미로 나눈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면서, 내 눈앞에 놓여진 도움이 필요한 사람 또는 상황을 보았을 때 물러서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공급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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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카터 칸론(Carter Conlon) 목사님은 타임스퀘어교회(Times Square Church)의 창립 목사이신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의 초청으로 1994년에 타임스퀘어교회의 부목사로 부임했으며, 그 후 2001년에는 담임목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강인하며 열정적인 지도자로서,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월드챌린지(World Challenge) 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5년 11월 5일 목요일

나의 입, 귀, 그리고 눈을 깨끗이 하소서

최근, 몇년간 알고 지낸 어느 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 목사님을 마주칠때마다 저는 제 와이프에게 늘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저 목사님은 너무 세상적이야. 얼마나 자랑을 하는지…어떻게 하나님이 저런 사람에게 축복을 내리시겠어.” 그러나 얼마 후 성령님께서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저를 다루시고 난 후, 그 목사님을 또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번엔 성령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그를 사랑하라,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그리고 같이 기도하라.”

저는 성령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을 사랑했고, 그의 말을 들어 주었고,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런 다음, 서로 뒤돌아서자마자 저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깊은 슬픔에 시달렸습니다. 너무나도 큰 공포심이 저를 압도했습니다. 제가 지난 몇년간 그 목사님에게 한 행동들이 생각나면서 저에게 테러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지은 그 더러운 죄의 엄청난 사악함을 저는 보게되었습니다.

다윗이 권하기를,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19:14) 사도바울은 또다시 이런 시각에서 말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4:31-32)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4:29-30).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메시지를 읽고 있는 사람 중, 그 어느누구도 귀를 기울리지 않고, 변화되지 않아도 될 만큼 거룩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지난 몇해 동안, 알게모르게 여러모로 사람들을 잘못 생각한 저를 보며 슬퍼하시는 하나님이 느껴집니다.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제 마음이 외치는 것 처럼 여러분도 외치시기를:

“오 주님, 왜 저는 이제서야 이런 말을 듣을 준비가 되었나요? 왜 전에는 이런 문제를 다루지 못했나요? 저는 주님의 복음을, 주님의 세대를 선포하고 싶습니다. 예수님 저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저의 더러운 입, 귀와 눈을 깨끗이 씻어주시옵소서. 그리고 새로운 마음을 주시옵소서. 주님을 온전히 나타내기 위한 저의 삶을, 그 무엇도 가로막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신속히 응답하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는 우리에게서 모든 악한말과 속삭임 그리고 악한 판단을 없앨 힘을 주실 것 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날들을 연장시킬 수 있을 겁니다.

2015년 11월 4일 수요일

어떻게 예수님께선 교회를 개척 하실까요?

만약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도시나 동네에서 교회를 개척하신다면, 어떻게 하실까요?

아마도 제일 처음으로 하실 일은 지역을 돌며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있기를,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눅19:41-42).

무엇이 예수님을 눈물짓게 만들었을까요? 그 눈물의 시작은 예수님께서 성을 보시며 걸었던, 그 애달픈 걷기가 아니였나 합니다. 신앙심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비통해 하셨습니다. 그곳의 사람들은 진실을 버렸고, 죽은,형식적인 종교행위만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목자가 없는 양들일 뿐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그 어느 목사도 판단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목사님이 여러분의 동네를 돌며 슬피 우시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개척을 위해 일하는 오늘날의 사람들과는 다른 이미지의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오늘날의 개척자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어떤 교회를 원하는지 설문조사를 하고 다닙니다. “설교는 얼마나 하길 원합니까? 15분? 10분?”

예수님의 시대에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걸으실때, 돈거래하는 자들의 탁자와 하나님의 것들을 파는 목사들을 보셨습니다. 그곳엔 진정한 기도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들은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눅19:46).

제가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오늘날 여러분의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신다면 슬퍼하실까요?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하여 비통하는 목사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요? 기도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실까요, 아니면 사리사욕에 힘쓰는 모습을 찾게 되실까요?

여러분의 도시를 우시며 살펴보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칭찬을 하실까요, 아니면 이렇게 경고 하실까요: “ 이 시대에 눈먼자들아. 심판이 곧 문앞에 이르렀는데, 너희들은 더욱 세상을 닮아가는구나. 왜 기도하지 않느냐, 왜 이 시대를 구하는 지혜와 능력을 달라고 나를 찾지 아니하느냐?”

2015년 11월 3일 화요일

성령으로 부터의 강력한 말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교회에 속해 있다면, 성령님께서 강력한 메시지들을 주실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며 육에 속한 것들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 육의 생각이나, 말, 행동들을 한다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아우성을 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마15:19).

하지만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제자의 증거는 주님의 모든 말씀에 순복 하는 것입니다. 참된 종이 책망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이유는, 책망에는 결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변화가 오는지 보고, 또 그 변화가 곧 생명이란 것을 압니다.

심령의 깊은곳에선, 죄인 또한 책망의 참된 변화를 알기에 스스로 하나님의 집을 찾아 옵니다. 수많은 성도들 중 한명이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길을 잃은 자신을 하나님께서 찾아주시길 원해서 입니다. 그의 영혼은 안식을 얻지 못하고, 수많은 밤을 잠을 잃은채 보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에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답을 , 진실을, 진정한 변화를 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춧돌이란 것은 누구나 다 배운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이 바위는 거치는 바위니: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9:33). 또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예수님은 부딪치는 돌이시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벧전2:7-8) 베드로는 복음에서 십자가를 없애려 한다면 어떻게 되는지 경험으로 고백할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셨을때, 그는 불쾌해 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16:22)

2015년 11월 2일 월요일

하나님을 안다는것 by Gary Wilkerson

모든 세대의 크리스천들은 그들의 임무나 행동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임무와 행동들인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린 끊임없이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과 이웃을 충실하게, 희생적으로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서서히 ‘나만의 축복’을 바라는 사고 방식으로 변하게 되었는가? ”

예수님께서는 본인을 따르는 민중들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계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6:26) 왜 여기에 예수님께서 표적을 언급하고 계신걸까요? 표적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표적이란 어떤 것을 가르킵니다. 표적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덴버 60 마일” 이라고 써있는 도로 표지판을 볼때, 우린 아직 목적지인 덴버에 도착하지 않았지만,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께선 제자들에게 떡과 물고기가 요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계셨습니다. 오병이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스러운 돌보심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돌보심의 표적일 뿐 입니다. 


무리들의 반응이 그들의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6:31). 무리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조상들을 언급하며 예수님께 먹을 것을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보채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삶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까, 아니면 단지 그분의 공급만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솔직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흔히 기도할때 오늘,지금,이 시각에 당장 응답받길 원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세상은 “모든것을 지금 원하는” 문화 특성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가장 위대한 세대’가 소중히 여겼던 그 영적 비결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 세대는 믿음으로 큰 축복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