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15일 월요일

새사람으로 행하라

여러분이 잘 알고있는 이야기입니다. 한 젊은이가 자기 몫의 아버지 유산을 챙겨서 방탕한 생활로 탕진 해버렸습니다. 그는 빈털터리가 되고 건강도 정신도 쇠약해졌습니다. 가장 비참했던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이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하는데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 아들이 해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의 죄를 고백하는 일 조차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화해하기 위해 이미 모든 것을 예비해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정으로 모든 것이 아버지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아들이 길을 걸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달려가 안았습니다. 사실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용서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가 회개하는 자녀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용서는 이슈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탕자가 단순히 용서받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고 명백하게 밝히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단지 용서하고 그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려고 품에 안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회복 그이상의 것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자녀와 함께 있고, 그의 존재, 교제를 원하였습니다.

탕자는 용서를 받고 다시 한 번 은혜를 입었으나 아직 자신의 아버지 집에 정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그 집에 정착을 해야 아버지가 만족할 것이요 또 그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게 될 때에만 아버지의 기쁨이 충만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비유의 이슈입니다.

이쯤에서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어집니다. 아들은 명백히 자기 아버지의 용서에 대해 편치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요점은, “제가 했던 그 모든 더럽고 불경한 일들을 모르고 계십니다. 저는 하나님과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에 거스르는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쫓겨나야 마땅합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에게서 책망하는 말은 한 마디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탕자가 행했던 일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고, 반항한 일이나, 그의 어리석음, 방탕한 생활, 영적으로 파산 지경에 이른 일 등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자격이 없으므로 집밖에 머무르고자 했던 시도들을 인정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도들을 무시해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버지의 관점에서 옛 아들은 죽었습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의 생각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지금, 아버지의 눈에 집으로 돌아온 이 아들은 새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과거는 결코 다시 화제에 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내게 관한 한, 옛날의 너는 죽었다. 자, 새로운 사람으로 나와 함께 행하라. 더 이상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 필요가 없다. 죄의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다. 이제 내 앞에 담대하게 나와서 나의 자비와 은총에 참여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