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30일 화요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부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될 때, 그분은 자신의 모든 능력과 공급원을 가지고 오십니다. 갑자기 우리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힘, 지혜, 진리, 평강, 그리고 승리의 삶을 살기에 필요한 모든 것에 접속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와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아도 됩니다. 그분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십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능력 있는지 말해 줍니다.

“이러므로 내가......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이에게”(엡3:14-20).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바울은 주님이 우리에게 쓸 수 있도록 해주신 보물들 중에 단지 몇 개만 나열한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모든 부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경배 받는 것만을 기뻐하는 자기중심적인 하나님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었습니다. 우리 주님에 대해서는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이유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은 그분이 캄캄하고 광대한 우주 어느 곳에 계신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원하셨습니다. 그분은 확실히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 삶을 마음 내키는 대로 드나드시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 안에 있는 자신의 처소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바울이 이렇게 썼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2:13). 절대적으로 명백히 밝혔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다. 아버지께서 우리의 전 안에 처소를 마련하시면 그분은 우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고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게 하시며 또한 그분께 모든 것을 구할 수 있도록 창구를 열어주십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그분의 신성한 능력을 통하여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셨습니다. (엡3:16-21참조).

2008년 9월 29일 월요일

새로운 피조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갈2:20).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내안에 계신 것을 안다. 나는 새로운 피조물인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직도 옛 습관과 고투를 벌이고 있다. 그 때문에 매우 낙심된다.” 사탄은 당신을 설득해서 하나님이 당신을 포기해 버렸다고 확신시키기를 좋아합니다. 그는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당신을 죄로 인해 더럽고 추악한 존재라고 여긴다고 생각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당신이 겪고 있는 것은 육과 당신 안에 있는 영이 싸우는 것입니다. 이 전투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당신이 이렇게 싸우고 있을 때 사탄은 아직도 “옛사람”이 통제하고 있다고 당신을 확신시키고자 합니다.

당신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분은 아담의 후손들의 사악함과, 우상숭배와 정욕을 따라 행한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사랑을 멈추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역사를 통틀어 말세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보존하셨고 그 때가 이르매 구출계획을 가지고 개입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아담의 모든 후예가 화목하게 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하나님과 당신이 함께 서있는 것이 단 하나에 근거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십자가로 인해서 당신은 승리를 얻은 것입니다. 이 승리는 당신의 어떤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8). 우리의 승리는 오로지 회개, 믿음, 신조 그리고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통해서 옵니다. 우리의 할 일은 그분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자리에 확고히 서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에게 확신을 주십니다. “너는 때로 실패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너를 볼 때 나는 다만 나의 아들 예수만을 본다. 너는 아무 죄의식이나 정죄받을 염려 없이 이 싸움의 결국에 승리자로 나올 것이다.”

2008년 9월 26일 금요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안식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히4:9-10).

당신은 궁금해 할지 모릅니다. “이 약속의 안식이 무슨 의미일까? 내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눈의 비늘을 치워주시고 이것을 깨닫도록 허락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의 약속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당신의 구원을 위해 모든 일을 해놓으셨다는 것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은 단지 믿음으로 그분의 구원의 은혜 안에 안식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우리를 촉구하실 때 뜻하시는 것입니다. 평강을 얻기 위해 당신이 기울이는 모든 육적인 애씀과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그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위해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일에 온전히 의지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전투는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구약은 이것을 분명이 밝힙니다. 이스라엘은 되풀이해서 하나님께 공허하고 헛된 약속을 합니다. “주님, 우리는 당신을 섬기기 원합니다. 당신이 명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들이 자신들의 말을 행할 능력도 마음도 없었음을 증명해 줍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믿는 믿음을 그들에게서 제거해야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우리의 존귀하신 주님의 존전으로부터 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17:28). 이 말은 중단되지 않는 친교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승리를 통하여 우리는 밤낮 상관없이 어느 때나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내 삶에 그리스도를 원한다. 나의 육 전체로부터 해방되기 원한다. 나는 그분의 임재 속으로 나아가 나의 기업을 청구할 것이다. 나는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 나의 만족의 유일한 원천이 되기를 원한다.”

2008년 9월 25일 목요일

약속의 땅의 참의미

하나님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영원한 기업”(창17:8)으로 주셨습니다. 히브리어로 영원한 이란 말은 끝이 없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아마 “아브라함이 이 일로 기뻐하였겠다. 하나님은 그의 후손에게 그들의 눈이 최대한 멀리 바라볼 수 있는 만큼 넓은 영원한 고향을 약속하셨고 이 약속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다,”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신약은 우리에게 이 세상이 불로 파괴당하고 완전히 불에 타 없어지고 그 후에 주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지고 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아마도 의아해 할 것입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이 단지 하나의 땅덩어리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그것이 어떻게 영원할 수 있을까?” 사실은 이 약속의 땅은 이 지구를 초월한 장소에 대한 상징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그의 영으로 이것을 알고 있었다고 믿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거류할 때에 항상 이방인처럼 느꼈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히11:9). 왜 그랬을까요? 아브라함의 마음은 땅 자체를 초월한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111:10). 아브라함은 땅의 축복에 대한 참의미를 알 수 있었고 “이 장소는 진정한 기업이 아니다. 다가올 위대한 축복에 대해 그려 보여 주시는 설교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깨달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의 참의미를 파악했던 것입니다. 그는 가나안이 오실 메시야를 상징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몸소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성령께서 이 족장으로 하여금 다가올 세월을 꿰뚫어 그리스도의 날까지 볼 수 있도록 가능케 해주셨습니다. 그는 약속의 땅이 온전한 평강과 안식의 장소를 의미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아는 한 이 안식의 장소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옳습니다, 주 예수님이 우리의 약속의 기업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것일 뿐 아니라 그분도 우리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한 믿음으로 우리의 영원한 기업을 얻으라고 우리를 초대 하십니다.

2008년 9월 24일 수요일

디모데들은 어디에?

바울이 맨처음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진리를 소개한 것은 빌립보의 교인들이었습니다. 그가 로마에서 투옥되어 있을 때 그들에게 이 서신을 썼습니다.

바울이 예수님과 그분의 교회의 종이 되기 위해 자신의 명성을 내던지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있다고 선언한 곳은 감방 안 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빌2:19).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부터 나온 생각이고 외부로 드러나는 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감옥에 앉아 있는 목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안위나 어려운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자신의 사람들의 영적, 육적 상황에 대해서만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양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영적으로 육신으로 모두 평안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내가 안위를 받는다. 그래서 나를 대신해서 너희 안부를 알기 위해 디모데를 보낸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이렇게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2:20) 얼마나 슬픈 말입니까! 바울이 이것을 쓸 당시 로마에서 그의 주변 교회들은 성장하고 복을 받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로마 교회에는 경건한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와 같이 나눌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2:21). 명백하게도 로마에는 종의 마음을 가진, 자신의 명성을 내던지고 산제물이 된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그 대신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데 마음을 쏟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빌립보로 가서 그 믿음 공동체의 진정한 종이 될 만하다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말은 완곡하게 표현 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만을 위해 일한다. 이 사역자들은 그들의 유익만을 구한다. 그래서 디모데 외에는 너희의 필요와 상처를 진심으로 돌보아줄 것이라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우리의 기도는 이래야만 할 것입니다. “주님, 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염려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내 길은 당신의 손이 붙들고 계심을 압니다. 주님 저에게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생각, 당신의 염려를 주십시오. 당신과 같은 종의 마음을 갖기 원합니다.” 아멘.

2008년 9월 23일 화요일

은혜의 법 아래

탕자에게는 사도 바울이 “마음이 새롭게 됨”이라고 불렀던 것이 필요했습니다. 나는 탕자의 비유에서 이 구절을 읽기 좋아합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15:22-23).

탕자는 비난을 받아야한다는 마음이 있었고 이것은 사탄이 넣어준 마음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같은 일들이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일어납니다. 우리 아버지는 사랑하는 팔로 우리를 껴안으시며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한데 우리는 그분의 사랑의 표현을 신뢰하기 보다는 우리의 과거 죄를 파헤치며 하나님께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는 자들이었는지 고하는 것이 겸손인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늘 죄의식으로 팽배하여 “하나님은 나에게 진노하실 수 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 보다 내가 더 악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종들이 가장 좋은 옷을 내어다가 아들에게 입힌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의로 입힌것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의 손가락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는 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에 발에 신발을 신겨주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평안의 복음으로 신기운 것을 상징합니다. 이 사랑하는 아버지는 그의 자녀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를 기쁘게 하려는 자기노력과 같은 조각 조각난 육의 누더기들을 버려라. 내가 너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보여주마. 너는 나의 집과 나의 존전에 새로운, 왕과 같은, 왕족 자녀로 들어오고 있다. 거지나 노예로서가 아니라 나를 기쁘게 하는 나의 아들로 들어오는 것이다! 자, 담대하게 확신을 가지고 들어오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자신의 임재 가운데로 받아들이시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19-20, 22 저자 임의 강조).

여기서 “담력”이란 말은 “해방된 노예”를 의미하는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의 법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아버지의 사랑에 의해, 오직 그분의 은혜로, 우리가 그분의 존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그 자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자격을 주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1:12-13 이탤릭체 부분 저자 임의 삽입).

2008년 9월 22일 월요일

새 사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그분의 말씀대로 믿고 그분이 우리가 어떤 존재라고 하시는 말씀을 진리로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옛사람”은 아직도 육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지칭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거스르기를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양심이 늘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 문제를 극복하려고 다짐합니다. “나는 변화될 것이다! 오늘부터 얼마만한 대가를 치르든지 나를 괴롭히는 죄와 싸울 것이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 하나님이 봐주시면 좋겠다.”

이러한 사람은 많은 땀과 허다한 눈물을 들고 주님께 나옵니다. 하나님께 자신이 선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기도하고 금식합니다. 그는 한 번에 며칠 씩 죄를 이겨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틀을 성공했으니 나흘도 가능할거야. 일주일은 왜 안되겠어?” 한 달이 끝날 무렵이 되면 스스로 노력하여 자유하게 되었다고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자 그의 옛 죄가 떠오르고 그는 낙심하고 절망에 깊이 빠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이클이 또 다시 시작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내려 오지도 못하고 끝없이 뛰어야하는 러닝머신에 올라서 있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게 되지 않기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육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진실로 바울은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사망선고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옛사람을 자신과 함께 무덤으로 데려가시고 그곳에서 그는 죽은 채로 잊혀졌습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그의 아들안의 “옛사람”을 무시해 버렸듯이 주님도 우리의 옛사람에 대해 “나는 그러한 자를 알지도 못하고 상대하지도 않는다. 내가 현재 인정하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고 그 사람과 상대할 것이다. 그는 바로 내 아들 예수이고 믿음으로 그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다.”

새 사람은 육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소망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육의 예습관에 죽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길이 오직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인정하시는 이가 오직 한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 그리스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이 새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믿기에 다른 어느 것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충족하신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것에 대한 자신의 원천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 대해 하신 말씀을 믿습니다. “네 옛사람은 죽었고 네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춰져있다.” 아마 그는 이것을 완전히 느끼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사랑하는 아버지의 말씀에 대해 논쟁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분의 말씀에 신실하시다는 것을 믿으며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2008년 9월 19일 금요일

하나님을 시험함?

예수님의 성전 꼭대기에 섰을 때 사탄이 그분께 속삭였습니다. “자, 뛰어내려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분이 너를 구해줄 것이다.”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4:6).

여기서 사탄의 교활함이 보이십니까? 그는 성경의 약속 중에서 하나를 떼어내어 예수님께 그분의 전 생애를 그 약속에 던지라고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제안 하는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내게 증명해 보여라. 너의 아버지는 이미 나에게 너를 성가시게 하도록 허락하셨다. 거기에 그분의 임재가 어디 있느냐? 너는 지금 당장 뛰어내려서 그분이 너와 함께 하시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면 그분이 네가 사뿐히 내려앉게 하실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네 자신감의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네가 홀로 있는지 의아해하며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아버지가 너와 같이 계신 것을 증명하려면 너는 기적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어떻게 응답 하셨습니까?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4:7).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다”라는 말을 정확히 무슨 의미로 쓰셨을까요?

고대 이스라엘은 하나의 표본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신실하시다는 것을 열 번이나 중명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주님이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 증거를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매번 이 백성은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안계신가?” 하나님은 이것을 가리켜 “그분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사탄에게 대답하면서 바로 같은 구절 “하나님을 시험하다”를 인용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의심하는 것은 심각한 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지 의문을 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였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이미 모든 증거를 주셨습니다. 첫째, 그분의 말씀에 우리와 가까이 계시겠다는 수많은 약속이 있습니다. 둘째, 우리에게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역사가 있습니다. 지나온 우리의 삶 동안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신 간증들이 많이 있습니다. 셋째, 과거 수세기동안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증인들로 가득한 성경이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불신에 빠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2008년 9월 18일 목요일

우리를 이끌어 들이기 위해 이끌어 내셨다

십자가 사건이 이전에는 일반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없었고 다만 대제사장만이 지성소에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아버지의 존전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오직 그분의 은혜로 하나님은 우리와 자신의 임재를 가로 막고 있던 벽을 허물어버렸습니다. 이제 그분은 인간에게 오셔서 자신의 탕자들과 온갖 죄인들을 품으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기적적인 구원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른 땅을 밟으며 홍해를 건널 때 그들의 뒤에서 파도가 대적위에 부서져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순간이었고 그들은 힘찬 찬양제를 열고 춤추고 노래하며 감사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얻었다! 하나님이 압제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해 내셨다.”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속박과 죄의식으로부터의 구원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사탄이 십자가에서 패배한 것을 알고 있으며 그 즉시 우리는 그의 강철 같은 손아귀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시고 구원하신 것에는 그 이상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이 홍해 건너편 승리한 그 지점에 장막을 치고 머물러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그분의 더 큰 목적은 가나안, 즉 그분의 충만한 땅으로 이끌어 들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분의 마음 안으로, 그분의 사랑 안으로 영접해 들이기 위해서 그들을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자비, 은혜, 사랑에 온전히 의지하는 백성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자신의 백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며칠이 안되어 이스라엘에 첫 번째 시험이 닥쳤습니다. 그들은 불평하고 원망하며 완전히 불만에 싸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 교훈의 열쇠는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구원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알기 전 까지는... 당신과 교제하며 느끼는 그분의 마음의 기쁨을 깨닫기 전 까지는... 십자가에서 모든 장벽이 제거된 것을 보기 전 까지는... 당신 과거의 모든 것이 판단 받고 지워져 버린 것을 알게 되기 전 까지는... 당신은 기쁨과 평강안으로 들어올 수 없을 뿐 아니라 진실로 주님을 어떻게 섬기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계속 전진하기를 원한다. 나의 존전 안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는 충만함 속으로!”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십자가의 유익을 누리며 기뻐합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와 홍해의 시련을 넘어 “승리한 쪽”에 서 있습니다. 자유를 누리며 그들의 압제자를 바다에 던져버린 하나님께 계속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바로 이 믿는 자들 중에서 다수가 하나님의 더욱 위대한 목적과 그들을 위한 유익을 놓치고 있습니다. 주님이 왜 그들을 불러내었는지에 대해 놓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 자신에게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서입니다.

2008년 9월 17일 수요일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갈 담대함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참마음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19-10, 22).

갈보리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한 면은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한 면은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는 죄인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 측면에서 본 유익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진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속박을 이기는 능력과 죄를 지배하는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자비와 은혜를 공급받았습니다. 그리고 물론 영생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죄와 지옥의 공포로부터 탈출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나는 인간에게 이러한 십자가의 유익과 그에 따른 안도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 사실이 전 세계에 걸쳐 교회에서 매 주 마다 선포되기에 나는 기뻐합니다.

헌데 십자가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유익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인하여 가능해진 아버지의 기쁨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분이 돌아온 탕자를 집으로 맞아들일 때 마다 느끼는 기쁨 말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초점이 모두 용서에 맞추어진다면, 우리가 선포하는 것의 대단원이라면, 십자가에 대해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중요한 진리를 놓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좀더 온전한 이해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바로 그분의 기쁨에 대한 것입니다. 이 진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단순한 안도감을 훨씬 초월하는 것을 공급할 것입니다. 자유, 안식, 평강과 기쁨을 줄 것입니다.

나의 견해로는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용서를 구하며, 필요를 채우기 위해, 기도의 응답을 받기위해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믿음의 측면에서 볼 때 담력이 부족합니다. 이것은 주님과의 동행에서 똑같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면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인해 우리가 그분께로 나아갈 길이 열렸기에 대단히 기뻐하십니다. 진실로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웠던 순간은 바로 그리스도가 돌아가시던 날에 성전 휘장이 둘로 갈라졌던 때입니다. 바로 이 순간 하나님에 대한 유익이 터져 나왔습니다. 인간과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갈라놓았던 성전의 휘장이 찢겨진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시점 이후 인간이 주님의 존전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인간에게 오실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2008년 9월 16일 화요일

창세전에 부르셨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그리스도 안에”있는 사람은 모두 주님에 의해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같은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시련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불렀을 때 그에게 이 약속을 하셨습니다. (렘1:1-10 참조) 예레미야처럼 우리는 세상에 대고 전해야 할 메시지를 미리 준비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필요한 그 시점에 우리의 입을 그분의 말씀으로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을 신뢰할 때에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설교자로, 교사로, 사도로 부름 받았고 그로 인해 그들이 모두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도 그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딤후1:11-12).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거룩한 일을 맡기셨다. 그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고난을 당할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바울은 다른 어느 사역자보다 더 시험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시시때때로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소위 종교적인 무리들이 그를 거부했고 조롱했습니다. 때로는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조차 욕설을 퍼붓고 내버리고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결코 사람들 앞에서 당혹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코 낙담하지 않았고 세상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코 지치지 않았습니다. 매번 꼭 필요한 그 때에 말해야 할 기름 부음을 받은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사실 바울은 어떤 일에도 결단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주님에 대한 신뢰를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 그의 말은 “나는 내 삶을 온전히 주님의 신실함에 맡겼다. 살든지 죽든 나는 그분의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 후임 디모데에게 그도 그렇게 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딤후1:13).

2008년 9월 15일 월요일

새사람으로 행하라

여러분이 잘 알고있는 이야기입니다. 한 젊은이가 자기 몫의 아버지 유산을 챙겨서 방탕한 생활로 탕진 해버렸습니다. 그는 빈털터리가 되고 건강도 정신도 쇠약해졌습니다. 가장 비참했던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이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하는데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 아들이 해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의 죄를 고백하는 일 조차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화해하기 위해 이미 모든 것을 예비해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정으로 모든 것이 아버지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아들이 길을 걸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달려가 안았습니다. 사실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용서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가 회개하는 자녀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용서는 이슈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탕자가 단순히 용서받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고 명백하게 밝히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단지 용서하고 그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려고 품에 안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회복 그이상의 것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자녀와 함께 있고, 그의 존재, 교제를 원하였습니다.

탕자는 용서를 받고 다시 한 번 은혜를 입었으나 아직 자신의 아버지 집에 정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그 집에 정착을 해야 아버지가 만족할 것이요 또 그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게 될 때에만 아버지의 기쁨이 충만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비유의 이슈입니다.

이쯤에서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어집니다. 아들은 명백히 자기 아버지의 용서에 대해 편치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요점은, “제가 했던 그 모든 더럽고 불경한 일들을 모르고 계십니다. 저는 하나님과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에 거스르는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쫓겨나야 마땅합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에게서 책망하는 말은 한 마디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탕자가 행했던 일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고, 반항한 일이나, 그의 어리석음, 방탕한 생활, 영적으로 파산 지경에 이른 일 등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자격이 없으므로 집밖에 머무르고자 했던 시도들을 인정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도들을 무시해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버지의 관점에서 옛 아들은 죽었습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의 생각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지금, 아버지의 눈에 집으로 돌아온 이 아들은 새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과거는 결코 다시 화제에 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내게 관한 한, 옛날의 너는 죽었다. 자, 새로운 사람으로 나와 함께 행하라. 더 이상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 필요가 없다. 죄의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다. 이제 내 앞에 담대하게 나와서 나의 자비와 은총에 참여하여라.”

2008년 9월 12일 금요일

아라비아로

만약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애쓴다면 나는 명백하게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의 마음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동기 유발 된다면, 그것이 나의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마음가짐이라면 내 충성심은 나누어 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닌 어떤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항상 애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개종하고 몇 년 지나, 예루살렘 교회로 가서 그곳의 제자들과 만나 합류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행9:26).

사도들은 핍박자였던 바울의 명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갈1:22-23).

바나바의 도움으로 사도들은 바울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교제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가기로 행로를 정했습니다. 진실로 바울은 자신의 부르심을 명확하게 묘사하기위해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이것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갈 1:1)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덧붙여 강조하여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갈1:11-12, 16).

바울이 여기서 하는 말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기를 소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적용됩니다.
“내가 가진 것을 얻기 위해서 책을 읽거나 사람의 방법을 빌릴 필요가 없다. 나의 메시지, 나의 사역, 나의 기름 부음은 무릎을 꿇고 받은 것이다.” 갈라디아서 1장 17절에서 바울은 아라비아로 갔다고 명시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서 얻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아라비아로 갔다. 사막으로. 그리스도가 내게 계시하시도록 하기위해. 그곳에서 나를 비우고 성령의 말씀을 듣고 성령에게서 배우며 귀중한 시간을 보냈다.”

바울은 자만하거나 거만한 독불 장군 전도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가 종의 마음을 가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야망을 비우고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만족을 발견하였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것에 고정되어 있다면 당신은 사람의 갈채나 인정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2008년 9월 11일 목요일

은밀한 장소에서

성령이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라는 경건한 사람에게 임하셨습니다. 이 영은 아나니아에게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가서 사울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물론 사울의 명성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이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성령이 아나니아에게 어떻게 사울을 천거하는지 보십시오.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행9:11).

요점을 말하면, 주님은 “아나니아야, 너는 이 사람이 무릎 꿇고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는 네가 오는 것을 알고 있다. 네 이름도 알고 네가 왜 자기에게 보냄을 받았는지도 알고 있다. 그는 눈을 뜨기 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언제 이 깊은 지식을 받았을까요? 그는 어떻게 이 비전, 하나님으로부터 온 순수한 말씀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간절한 기도와 간구를 통해서 왔습니다. 사실, 나는 성령이 아나니아에게 하신 말씀,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를 통해 무엇이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를 밝혀준다고 믿습니다.

사울은 모든 음식과 물을 거부한 채 사흘 동안 하나님과 함께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주님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계속 무릎 꿇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구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목사이신 나의 아버지가 가르쳐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길을 열어 주신다.” 내 삶에서 이에 대해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주님이 보여주신 경우들이 있습니다. 나는 여덟 살 때 성령이 임하셔서 말씀을 전파하라고 부르셨습니다. 나는 울며 기도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주 예수님, 나를 채워주십시오.” 그 후 틴에이저가 되었을 때 성령이 하늘로부터 강하게 임할 때 까지 나는 기도했습니다.

젊은 목사였을 때 내 안에서 깊은 목마름이 일어나 나를 부지런히 기도하게 만들었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초월한 무엇인가가 있을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무릎을 꿇고 한 번에 몇 시간씩 울며 기도하며 수개월을 지냈습니다. 드디어 주님은 나에게 뉴욕 시로 가서 갱들과 마약 중독자들에게 사역하라고 부르셨습니다.

또한 이십년 전 나는 무릎을 꿇고 눈물로 크게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구했습니다. 그 때 그분은 타임 스퀘어에서 교회를 개척하라고 나를 다시 뉴욕으로 부르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의 어떤 계시, 그리스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받았다면, 그것은 단지 성경 공부만을 통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 왔습니다. 그것은 은밀한 장소에서 하나님을 구함으로써 온 것입니다.

2008년 9월 10일 수요일

그리스도를 시인함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10:32-33).

이 구절에서 시인하다의 희랍어 단어는 언약, 동의 또는 합의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과 합의한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할 일은 매일의 삶에서 그분을 시인하고 또는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개인적으로 돌보실 것이라는 그분의 약속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를 통해서 그분의 놀라운 축복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은 그분의 신성을 믿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땅에 묻히시고 부활하셔서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 이상의 것입니다. 성경은 귀신들도 이것을 믿고 알기에 떤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시인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Whosoever therefore shall confess me... KJV)”
(마10:32). therefore(그러므로)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말한 것에 비추어 볼 때...” 또는 “내가 방금 너희에게 말한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가 경청하는 자들에게 방금 말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0:2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온 지구상에 있는 수백만 마리의 새들을 생각해 보아라. 그리고 창세후로부터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새들을 생각해 보아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중 한 마리도 너희 하늘 아버지가 모르신 채 죽거나 덫에 걸린 것이 없다.”

그리고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10:30)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은 매우 위대하시다. 너희의 이해 능력을 초월하시는 분이다. 그분이 너희를 얼마나 세밀하게 돌보시는지 너희는 결코 알 길이 없다,”라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10:31)고 결론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요약해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10:32)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내가 방금 너희에게 계시한,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아버지의 돌보심에 대해 생각해 보아라. 너희는 이 진리를 온 세상을 향해 시인해야 할 것이다. 너희는 살아 숨쉬며 ‘하나님이 나를 돌보신다,’고 증언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고 그분의 친밀한 보살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모든 두려움과 의심을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간과하지 않으셨다는 믿음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살아가십시오. 모든 사람들에게 시인하십시오. “그분의 눈은 참새를 주시하고 계신다네. 나는 그분이 나를 돌보시는 것을 안다네.”

2008년 9월 9일 화요일

완전한 통제권

주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삶을 살기위한 특정 공식은 없습니다. 내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하나님이 이 영역에 대해 이제까지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께 완전히 통제권을 내어드릴 수 있는지에 대해 두 가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내 삶의 사소한 일에 까지도 그분의 뜻을 나에게 알려주시려고 애쓰고 또 기꺼이 알려주신다는 것을 확신해야만 합니다. 내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아시고, 인도하시고 이끄시며 나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16:34-14).

지금 당신은 어떤 시련을 겪고 있는 중인지 모릅니다. 아마 너무 성급히 내린 결정의 결과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주님은 당신에게 약속하십니다. “네 마음의 귀는 나의 영이 네게 ‘저 길로 가라. 이것을 해라. 저런 일을 하지마라’고 하는 것을 들을 것이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해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기도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1:6-7). 하나님이 무엇을 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는 끝까지 견디고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 능력이 필요합니다. 50여년 사역하면서 나는 사탄과 육이 항상 내 마음 속에 의심과 의문을 심어놓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예수님이 “No,”라고 말씀하실 때 “Yes,”라고 말하지 않으려면 하늘로부터 오는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주님, 제게 말씀하신 것을 압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것이 정말 당신의 음성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의 음성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영적인지 자신이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문을 열든지 닫든지 그렇게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에게 기대하는 믿음의 반응이 아닙니다. 당신은 몇 시간이든지, 또는 한 번에 며칠이든지 원하는 만큼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처럼 성령이 당신을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 없이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당신에게 결코 전달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받아들이고 의문 없이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것을 볼 때 까지 기다리십니다.

2008년 9월 8일 월요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마음, 곧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바가 또한 너희의 생각이 되도록 하라. 그분의 마음가짐이 바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이 하셨듯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것인가를 정해 줄 그리스도같은 결정을 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마음의 모든 기능을 총동원하여 어떻게 하면 실제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에 연관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보는 내 자신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성품과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이 내 삶에서 주시는 모든 경험에 의해 예수님을 닮은 바로 그 모습대로 점차 변화되고 있는가?”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마음가짐은 이런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7).

예수님은 아직 하늘에 계셨을 때 결심하셨습니다. 자신의 하늘의 영광을 내려놓고 인간으로서 세상에 오시기로 하나님과 합의하셨습니다. 겸손한 종으로 세상에 내려오시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시지 않고 오히려 섬기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아버지여, 당신의 뜻을 이루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미리 마음을 정하셨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 뜻을 내려놓습니다. 당신의 뜻을 품도록 내 뜻을 복종시키겠습니다. 내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당신으로부터 기인해야합니다. 당신께 전적으로 의존하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반면에 아버지가 아들과 합의하신 것은 그분의 뜻을 아들에게 계시해주시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이 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뜻은 너에게 감추어진 것이 없을 것이다. 내가 하는 것을 너는 항상 알게 될 것이다. 너는 내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바울이 담대하게 “내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말할 때 그는 “나도 자신을 비웠다. 예수님처럼 나도 종의 형체를 가졌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믿는 자에게 이것이 진실일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6).

2008년 9월 5일 금요일

그리스도를 시험함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고전10:9).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주를 시험하다”는 무슨 뜻일까요? 간단히 말해서 주를 시험하는 것은 그분을 테스트해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과 같이 물을 때 마다 주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죄에 더욱 더 빠져 들어간다 해도 하나님은 나에게 자비를 베푸실까?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죄에 탐닉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킬까? 하나님이 자비하신 분인줄 알고 있으며 또 지금은 죄인을 정죄하지 않는 은혜의 시대이다. 내가 그분의 자녀인데 어떻게 나를 심판하실 수 있을까?”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악한 시험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면서 무심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은 죄의 결과를 직면하지 않으면서 얼마나 지옥 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요약하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서 이러한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죄에 대한 평결을 벗어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분명히 밝혀주신 진리를 거스를 때 마다 우리는 바울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고전10:12, 8).

당신이 하나님의 귀중한 은혜의 선물의 한도를 시험하고 있지 않은지 자문해 보십시오. 당신은 자신의 명백한 반역 앞에서 죄에 탐닉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시험하고 있는 중입니까? “나는 신약시대의 신자이다. 예수님의 피가 나를 덮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스스로 확신하고 있습니까?

계속해서 죄에 빠져 있다면 당신을 위한 예수님의 위대한 희생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현재 자의적으로 저지르는 죄는 세상의 눈앞 뿐 만 아니라 모든 하늘과 지옥 앞에서 그분을 공개적인 수치로 몰아넣습니다. (히 6:6 참조).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바울은 이모든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 벗어나는 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대한 지식과 경험이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2008년 9월 4일 목요일

십계명

대부분 미국인들은 미국의 대법원이 정부 법원 건물에 십계명을 전시할 수 없다고 판결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언론은 이 지표적인 결정을 속속들이 보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판결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법원은 법을 집행하는 곳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도덕법으로서 결코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습니다. 중력의 법칙처럼 고정된 것입니다. 당신이 그 법에 도전한다면 그것은 마치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그 법에 영향을 받는 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있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값을 치러야만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십계명은 사회가 자멸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고안해 놓으신 영원한 법입니다. 헌데, 놀랍게도 이 시간 모래 분사회사들이 이 십계명들을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법원 대리석이나 콘크리트에나 새겨진 곳 어디에서든지 갈아내 버리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변할 수 없는 법은 본래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돌에 새겨졌습니다. 이제 인간의 법에 의해 돌에서 지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이 뭐 중요합니까? 우리는 더 이상 율법아래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왜 문제가 돼야 합니까?” 우리는 유대 랍비들이 정해놓은 613개의 추가 계명을 의미하는 유대 율법아래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크리스천은 십계명으로 집약되는 하나님의 도덕법의 권위 아래 있습니다.

나는 우리 목전에서 모래 분사기가 그분의 율법을 지워버리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실지 생각해봅니다. 어떤 믿는 자들은 “십계명을 전시해 놓을 필요는 없어요. 정말 필요한 것은 우리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지요,”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실 때 하나님의 의도는 그 계명을 눈에 잘 뜨이는 곳에 두는 것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잇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6:6-9).

2008년 9월 3일 수요일

블링크 세대

많은 크리스천들이 성경을 자신들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살아계시고 계시된 말씀이라고 믿으며 정규적으로 읽습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세대들에 대해 읽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구절이 수시로 반복되어 나오는 것을 읽습니다. 그럼에도 바로 이 많은 크리스천들은 마치 하나님이 오늘날에는 그분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믿는 자들의 한 세대가 모두 기도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지도 않고 온전히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중 다수는 그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결정해버리고 그 후에 하나님께 승인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들은 힘차게 몰아붙이고 나서 단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의 뜻이 아니면, 저를 멈춰주십시오.”

우리는 지금 “블링크 세대”라 불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개념에 대해 쓴 베스트셀러 책 제목이 ‘블링크:생각하지않고 생각하는 힘’입니다. 이론인즉슨, “당신의 본능을 믿어라. 눈 깜짝할 사이에 내린 결정이 최상이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듣는 서두름을 부추기는 “블링크 언어”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100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입니다. 하루밤새 부자가 될 수 있어요. 이 기회는 잠시 뿐입니다. 당장이 기회를 잡으세요.” 이 모든 것 배후의 원동력은 “블링크, 블링크, 블링크!”입니다.

이 같은 사고방식이 교회를 오염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단지 “블링크 크리스천들”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블링크 목사님들”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는 당황한 소교구 사람들로부터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수십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우리 목사님이 교회성장 집회에 다녀오시고 나서 즉시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자로 모든 것이 변합니다.’ 하루 밤 사이에 우리가 인기있는 유행을 창조하는 교회가 되기로 결정해 버렸습니다. 이일에 대해서 기도해 보자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척 혼란스럽습니다.”

불과 수년전만해도 크리스천들의 경구는 이러했습니다. “그 일에 대해 기도했습니까? 그와 관련해서 주님의 뜻을 구해보셨나요? 당신 주위의 형제자매들이 기도하고 있습니까? 경건한 조언을 받으셨나요?” 당신이 이렇게 하는지 물어보고자 합니다. 지난 세월동안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당신이 진정으로 그 문제를 하나님께 들고 나가 성심껏 기도한 것이 몇 건이나 됩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내린 결정은 몇 건이나 됩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온전히 통제하기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재난으로부터 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내리는 “블링크 결정”의 종착역이 거의 대부분 바로 재난인 것입니다.

2008년 9월 2일 화요일

거룩함을 따르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명확하게 말합니다.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여기 간단명료한 진리가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부여하신 거룩함이 없이는 -이는 그분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헌신된 삶을 영위함으로써 우리가 경의를 표하는 귀한 선물입니다-우리 중 어느 누구도 주님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천국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현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우리의 매일의 삶, 우리 가족, 우리의 관계들, 우리의 간증과 사역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크리스천 집회에 참석했든지, 설교 테이프를 들었든지, 성경공부에 참석했든지 간에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암적인 죄를 품고 있다면, 만일 주님이 우리 죄에 대해 우리와 쟁론하실 것이 있다면, 우리의 어떤 노력도 경건한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와 정반대로 우리 죄는 더욱 전염성이 강해져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을 오염시킬 것입니다.

물론 이 문제는 모든 육체의 정욕을 넘어 영적 타락에 까지 이릅니다. 바울은 다음 구절에서 그와 같은 파괴적인 죄에 대해 묘사합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고전10:10).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당신이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 정욕을 성령께서 다루시도록 내어드리지 않겠습니까? 그 대신 하나님이 당신에게 마련해주신 탈출구를 구하고 신뢰하지 않겠습니까? 이 마지막 때에, 나는 당신에게 거룩한 두려움과 신뢰를 기르라고 촉구합니다. 이것은 당신의 주위에서 아무리 사악함이 소란스럽게 밀려들지라도 당신을 성결하게 지켜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함 가운데서 행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이 거룩함 속에 그분의 지속적인 임재의 약속이 있습니다.

이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넘어지지 않도록 보호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단지 그분의 말씀을 믿는다면 죄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 경건한 두려움에 대해 그분을 믿으십시오.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지키실 것입니다. 당신은 의지나, 약속이나, 다른 어떠한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죽음으로 몰고 가는 죄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라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

2008년 9월 1일 월요일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은 작고 보잘것없는 한 민족을 택하셔서 열방들을 교육하는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그분은 한 민족을 일으켜 자신의 선함을 이방에 드러내는 살아있는 본보기로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그러한 증거를 삼기위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그들 스스로는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는 장소들로 이끌어가셨습니다. 그분 자신만이 유일한 생명의 원천이요 그들의 모든 필요를 돌보아 주실 수 있는 광야에 이스라엘을 고립시키셨습니다.

그 황폐한 곳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생존에 대해 전혀 통제 할 수 없었습니다. 식량이나 물을 조달하는 것도 통제 불능이었습니다. 나침반도 없고 지도도 없었으므로 그들의 목적지를 설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먹고 마실 것입니까? 어느 방향으로 행진할 것입니까? 어느 곳에 도착할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그 모든 것을 하실 것입니다. 밤에는 빛을 발하며 어둠을 그들 앞에서 흩어버리는 기적의 구름으로 매일 그들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린 천사의 음식으로 그들을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개개의 모든 필요를 주님이 공급하시고 어느 대적도 그들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의 음성을 네게 듣게 하시며”(신4:36).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분이 인도하시는 그 말씀을 듣고 이렇게 증언할 것입니다. “모든 인류들 중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자가 누구인가?”(4:32-34참조)

고대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던 나라들은 나무나 은, 금으로 만든 우상들, 즉 다른 신들로 꽉 차있었습니다. 이 신들은 벙어리이고 듣지도 못하고 자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사랑하거나 인도하거나 보호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 나라들은 이스라엘에 눈을 돌리고 하나님이 보호하여 무서운 광야를 통과케 하신 이 특별한 민족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사랑하시고, 감정을 느끼시고, 기도에 응답하시고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여기 자기 백성의 모든 삶의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인도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훈련하실 백성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분의 권위에 복종하여 살고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삶의 모든 분야에서 전적으로 그분에게 통치권을 내어드리는 그러한 백성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백성이 세상에 대해 그분을 증거하게 될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한 백성에 대해 완전한 통치권을 원하시고 모든 경우에 그들의 완벽한 신뢰를 요구하실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의 갈 길을 아시고,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기적들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