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29일 금요일

일어나 예비하라

“여호와께서...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삼상18:12).


기도로 하나님과 함께하고 믿음으로 일어나 싸우기로 결단한 사람들을 사탄이 가장 질투하고 두려워합니다. 적은 숫자일지라도 믿음으로 허리를 동이고 싸움에 임하는 군대를 두려워합니다. 두발로 서서 대적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 앞에서 움츠러듭니다. 그리고 당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당신의 사기를 중화시켜 떨어뜨리려고 책략을 꾸밉니다.


마귀가 쓰는 방법은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불신과 의문을 불러일으키도록, 패배의식이 들고, 좌절하게 만들고 마음을 분산시키는 지옥의 생각들을 당신 마음속에 밀려들도록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과 영에 대고 그는 소리칩니다. “더 이상 싸워봤자 아무 소용없다. 네 개인의 문제로 투쟁하느라 너는 너무 지쳐있다. 너는 결코 승리자가 되지 못한다. 지옥의 권세는 너무 커서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쉬는 게 좋을 것이다. 더 이상 전쟁에 열심 낼 필요가 없다.


이 모든 것이 정신을 분산시키려는 것입니다. 사탄의 전략은 당신이 십자가의 승리로부터 눈을 떼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는 당신이 자신의 약점, , 부족한 점에 시선을 집중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당신이 현재 겪고 있는 문제와 고통에 더욱 불을 지릅니다. 당신이 계속 지탱해나갈 만큼 강하지 않다고 믿도록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힘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힘이 중요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죽거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까지 우리 모두는 전투 중에 있는 것입니다. 때로 고요하고 일시적으로 유예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영적 전투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는 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예수님이 견고한 진을 무너뜨릴 만큼 강한 무기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사탄이 견뎌내지 못할 무기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 기도, 금식과 믿음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현재 고통으로부터 눈을 떼 내어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우리의 시련으로부터 눈을 들어 이 전쟁의 대장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승리의 열쇠를 쥐고 계시며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전쟁에 필요한 모든 무기를 너에게 공급해주었다. 그리고 네가 연약할 때 힘을 부어 주기위해 준비되어 있다.

2010년 1월 28일 목요일

기쁘시게 하는 행함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1:10).


기쁘시게 행하려면 무엇이 필요 할까요?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3:12-13).


바울은 우리에게 여러 말로 이야기합니다. “이같이 중요한 시기에 너희에게 해 줄 말이 있다. 너희가 아는 험난한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고려하여 너희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점검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가? 나는 인내심이 늘었는가 아니면 성격이 더 급해졌는가? 친절하고 온유해졌는가 아니면 더욱 심술궂고 더 따지고 드는가? 더 온화해지고 용서하는가 아니면 더욱 불만에 싸여 원한을 품는가? 다른 사람을 용납하는가? 가까운 사람들의 약점과 잘못을 잘 참아주는가 아니면 나만 항상 옳다고 고집하는가?


바울은 다가오는 날에 비추어 볼 때 당신이 성취한 일이나 자선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합니다. 당신이 낯선 사람을 얼마나 친절하게 대했든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든지 상관없이 이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당신은 더욱 사랑하고, 인내하고, 용서하고 용납합니까?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을 점검한다는 것은 당신이 무엇을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 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행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저 “나는 이런 성도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결단한다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이 말씀을 읽고 자신을 점검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성령께 진정 우리가 누구인지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견주어 우리 자신을 측정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리고나서 성령께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기를 구합니다.

2010년 1월 27일 수요일

솔개를 쫓아버리라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영광스러운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족장에게 암소와 암염소를 가져와 둘로 쪼개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또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를 가져다 머리를 맞대어 땅에 놓아야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시를 따라 행했고 이 짐승들이 피를 흘리며 땅에 놓여 있을 때 솔개들이 사체위에 내려앉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아브라함은 큰 흑암이 임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흑암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사탄입니다.


당신이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당신의 것이 되려는 것을 볼 때 사탄이 어떻게 반응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마귀는 질투에 불타 격노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주님과 함께 끝까지 동행하리라고 굳게 결단하는 것을 볼 때 그의 반응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지옥 전체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솔개가 내려앉으려고 할 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성경은 그가 솔개들을 쫓았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도 우리에게 위협적인 솔개들을 다루는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공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강력한 전쟁 무기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의심이 들거나 의문스러운 목소리가 내 마음에 들릴 때, 나의 사랑하는 주님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에 그것을 견주어 보아야만 합니다. 어떤 생각이든지 그것이 단지 내가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에 기초한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진리라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생각들을 예수님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그분이 나를 위해 쟁취한 승리에 대하여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약속에 견주어 측정해 보아야만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만일 내게 비난하는 생각들이 들어와 그것이 의심과 공포심을 야기하거나, 책망한다거나, 또는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거나 하면, 나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무서운 생각들이 들이 닥칠 때를 대비해야만 합니다. 광야에서 시험 당하실 때 주 예수님조차도 예외 없이 원수로부터 온 이런 생각들을 겪으셨습니다.


솔개가 당신이 합당치 못하다거나 불안감을 야기하는 생각을 가지고 당신에게 내려앉으려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쫓아버리십시오. 주님의 인도로 당신이 드린 희생 제물은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은 그것을 존중하여 주실 것입니다.

2010년 1월 26일 화요일

그가 죽었으나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브리서 11장을 읽으면서 이 장에 언급된 사람들의 생애에서 한 가지 공통분모를 발견합니다. 각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유형의 믿음을 상징하는 독특한 특성이 있습니다. 이 요소는 무엇일까요? 그들의 믿음이 주님과 깊은 친밀함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친밀한 교제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분을 갈망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가깝게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런 종류의 친밀함은 밀접한 개인적 유대감, 연합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이 세상의 어느 것 보다 더 갈망할 때 이루어집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11:4). 이 구절에서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 자신이 아벨의 예물, 또는 제물에 대해 증거하셨습니다. 둘째, 아벨은 주님께 제단을 쌓아야 했고 그곳으로 희생 제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희생 제사를 위해 흠 없는 양을 드렸을 뿐만 아니라 그 양들의 기름도 드렸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4:4).


여기서 기름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레위기는 기름에 대해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3:16). 기름은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께 올라가는 제물의 부위였습니다. 짐승의 이 부위는 빨리 불이 옮겨 붙고 타면서 향기로운 냄새를 풍깁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름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유형의 기도나 교제를 나타냅니다. 은밀한 골방에서 기도하는 우리의 주님을 향한 사역입니다. 주님 자신이 이러한 친밀한 예배가 향기로운 냄새로 자신께 올라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처음으로 이런 유형의 예배를 드린 사람이 아벨이라고 언급합니다. 이런 이유로 아벨은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전당에 이름이 올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최고의 것을 드리면서 주님과 친교를 나누었던 종의 유형이었습니다. 히브리서가 선언하듯이 아벨의 본보기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믿음의 증거로서 오늘날도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그가 죽었으나 지금도 말하느니라”(11:4).

2010년 1월 25일 월요일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마가복음 4장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몹시 흔들릴 때의 이야기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단 한 번의 명령으로 파도를 잠잠케 하시는 장면을 봅니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의 제자들을 향하여 물으십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4:40).


당신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런 폭풍을 무서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꾸짖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토록 나와 함께 있고서도 너희는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이렇게 긴 세월을 나와 함께 동행 하고서도 어떻게 나를 친밀하게 알지 못할 수가 있느냐?


제자들은 진정 예수님이 행하신 엄청난 기적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4:41).


상상이 되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을 몰랐습니다. 그분은 제자들 각각을 불러 자신을 따르게 하였고 그들은 예수님 곁에서 많은 무리에게 사역하였습니다. 그들은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였고 굶주린 많은 무리를 먹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주가 진정 누구인지에 관해 생소했습니다.


비극적이지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수의 크리스천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그분 곁에서 사역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을 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가 누구신지 정작 모르고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 홀로 있는 친밀한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께 마음을 열고 기다리며 그분이 무슨 말을 하기 원하시는지 깨닫기 위해 귀를 기울이며 그분의 존전에 조용히 앉아 있는 적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 제자들의 믿음에 관한 또 다른 장면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17:5)라고 요청하며 나아옵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도 같은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믿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답을 얻기 위해 주님 자신을 찾지 않습니다.


당신이 믿음을 더 얻기 원한다면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동일한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분은 믿음을 구하는 요청에 무엇이라고 답하셨습니까?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17:8). 예수님 말씀의 요점은 “인내의 옷을 입어라. 그리고 내 식탁에 와서 나와 함께 먹어라. 나는 네가 그곳에서 나를 먹여주기 원한다. 너는 하루 종일 나를 위해 기쁘게 수고하였다. 이제 나는 네가 나와 함께 교제하기를 원한다. 나와 함께 앉아서 마음을 열고 내게 배워라.

2010년 1월 22일 금요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에녹은 주님과 가깝게 교제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과 그의 교제가 너무도 친밀했기에 주님은 그의 지상에서의 생명이 끝나기 오래 전에 그를 영광으로 옮기셨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11:5).


주님은 왜 에녹을 옮기시기로 작정하셨을까요? 위 성경 구절 첫 부분에서 그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아주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끝부분에서 에녹의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기쁘시게 했다는 말의 헬라어 어근은 완전히 연합한, 전적으로 동의한, 총체적으로 하나 된 이란 의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에녹은 하나님과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친밀한 친교를 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친밀한 교제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성경은 에녹이 그의 아들 므두셀라를 낳고 나서 주님과 동행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에녹은 그 당시 65세였습니다. 그 후 300년을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지냈습니다. 히브리서는 분명하게 에녹이 아버지와 아주 긴밀하게 접촉하며 시간시간 너무도 가깝게 교제하였기에 하나님이 그를 그분 자신에게로 데려왔다고 밝힙니다. 요점은, 주님이 에녹에게 “네가 육신에 있는 한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다. 나와 네가 더 친밀해지기 위해서는 너를 내 곁으로 데려와야만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에녹을 영광으로 데려가셨습니다.


히브리서 11 5절에 따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은 에녹의 친밀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기에 이 사람은 결코 기적을 행한 일도 없고, 심오한 신학체계를 개발한 적도 없고 성경에 언급할 만큼 가치 있는 위대한 일을 행한 적도 없습니다. 그 대신 이 신실한 사람의 삶에 대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는 단순한 언급이 있을 뿐입니다.


에녹은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애는 진정으로 믿음의 여정을 걷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간증입니다.

2010년 1월 21일 목요일

하나님의 벗

하나님이 친히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묘사한 “나의 벗 아브라함”(41:8)이란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신약도 마찬가지로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2:23).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칭찬입니까! 대부분 크리스천들은 유명한 찬송가 “죄 짐 맡은 우리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를 불러 보았을 것입니다. 위의 두 성경 구절들은 이 진리를 힘차게 절실히 느끼게 합니다. 우주 만물의 창조주께서 한 인간을 벗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일이 아브라함에게 일어났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사용한 친구라는 히브리말은 애정과 친근함을 의미합니다. 야고보가 사용한 헬라어 친구는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를 뜻합니다. 둘 다 깊은 친밀함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가까이 자라갈수록, 그분의 존전에서 전적으로 살고자하는 우리의 바람도 커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토대가 되심을 점점 더 확실히 알게 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11:10)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 인생에서 영원한 것이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 그에게는 “낯선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곳은 뿌리를 내릴 곳이 못 됩니다. 아브라함이 갈망했던 하늘의 본향은 실제로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아버지와 함께 집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의 본향”의 히브리말은 Pater 인데 아버지(Father)를 뜻하는 말의 어근에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바랐던 하늘의 본향은 문자 그대로 아버지와 함께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신비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몽롱한 영적 안개에 싸여 살았던 금욕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상의 삶을 살았고 세상사에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어떻든 수천이나 되는 가축을 소유했던 사람이었고 사병을 조직할 만큼 많은 하인이 있었습니다. 하인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소, , 염소들을 사고파느라 바빴을 것입니다.


그토록 많은 업무와, 책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2010년 1월 20일 수요일

늘푸름의 위력

나는 인도하심을 받아 황충에 관한 요한 계시록 9장을 읽고 연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황충에게 푸른 것은 멸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4절을 읽으며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공포의 시기에 안전하게 살아남는 열쇠가 여기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즉 “푸름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52:8) 라고 기록했습니다.


다윗이 여기서 말하는 “푸른”은 영적 건강을 의미합니다. 번성하고, 자라고, 열매 맺는 것을 뜻합니다. 다윗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 건강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번영합니다. 그분에 대한 신뢰가 내 안에서 영적 생명을 생산해 냅니다.


여기에 바로 푸름을 유지하는 것의 위력에 대한 영광스러운 진리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17:5-6).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사람을 믿지 말라. 네가 나보다 인간의 힘을 믿는다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신뢰한다면 우리의 믿음이 무엇을 생산해 내는 지 보십시오. “여 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17:7-8).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할 때 우리는 그분의 건강한 강에 뿌리를 내립니다. 그러면 그분의 신성한 힘, 즉 감미롭고 푸른 영적 건강이 우리 안에, 우리를 통해 흐릅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부패할 때 우리는 푸른 나무처럼 건강하고 강하게 번성할 것입니다. 그리고 시련의 시기가 올 때, 쇠하거나 시들지 않고 우리의 믿음은 성장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