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31일 금요일

상세한 지시와 명확한 결정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그분의 목적은 우리가 성령의 왕권과 통치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 5:25)
다른 말로 하면, “만일 성령이 당신 안에 거하면, 그분이 당신을 지시하도록 하라!”

나는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당신에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이 영광스러운 경지에 완전히 도달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 발짝씩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이 말을 들었습니다. “성령으로 행하라.” 그런데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나는 사도행전 16장이 바로 성령으로 행한다는 말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본보기라고 믿습니다.

성령은 그분 안에서 행하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이고 명백하게 상세한 지시를 내리십니다.
당신이 성령 안에서 행하면 당신은 혼동 속에서 행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린 결정들은 구름에 가린 듯 흐릿하지 않습니다.

초대 교인들은 혼동 속에서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결정, 모든 움직임, 모든 행동에 성령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성령은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그들이 깨어있는 모든 순간에 그들에게 지시하셨습니다. 그분과 상의하지 않고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신약 전체를 통하여 교회의 모토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였습니다.

나는 성령께서 아주 분명하게 “뉴욕 시로 가서 교회를 세워라” 고 말씀하셨기에 뉴욕 시에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언제 가야하는 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느 마귀나 귀신도 나를 이곳으로부터 떠나도록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상세한 지시를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브로드웨이와 7번가 사이에 서서 울며 손을 높이 들고 서있던 것을 기억합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곳에 나는 교회를 세울 것이다. 데이빗, 나에게 순종해라. 뉴욕 시에서 교회를 시작하라!” 타임 스퀘어 처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명확하고 상세한 성령님의 지시에 따른 결과입니다.

2009년 7월 30일 목요일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하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가?

바울은 “진노하심에 맡기라” (롬 12:19)로 기록했습니다. 그는 “억울한 일을 당하라. 그 일을 내려놓고 지나쳐 가라. 성령 안에서 살라,” 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한 상처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대하게 될 것입니다.

1. 우리는 우리를 상처 입힌 사람보다 더 죄의식에 빠질 것입니다.
2.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닫혀 질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우리 삶이 어긋나기 시작하고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3. 우리를 거스려 성가시게 참소하는 자가 계속 우리의 평강을 앗아 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는데 성공하며 그가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4.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복수의 생각에 사로잡히도록 하여 우리를 더욱더 악한 죄 가운데로 몰고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당한 것 보다 훨씬 더 나쁜 죄를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잠언 기자는 다음과 같이 조언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잠 19:11) 다시 말하면, 우리는 분노가 가라앉을 때 까지 아무것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분에 차있을 동안에는 결코 어떤 결정을 내려서는 안되며 어떤 행동을 끝까지 밀고 나가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상처를 괘념치 않고 우리에게 지은 죄를 용서할 때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안에 성품이 지어져갑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듯이 우리가 용서할 때, 그분은 우리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은혜와 복의 계시 속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예수님은 다음의 세 가지를 행함으로써 우리와 원수 된 자를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1. 우리는 그들을 축복할 것이다.
2. 우리는 그들에게 선을 행할 것이다.
3.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것이다.

마태복음 5장 44절 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009년 7월 29일 수요일

기도- 그 핵심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전도서 5:2)

긴 기도에는 겉치레가 종종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 신망을 쌓아두려는 욕망,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들의 기도 생활을 따라하려는 야심, 많은 말을 퍼부어 하나님이 그만 지쳐서 움직이시도록 만들려는 교묘한 시도 등의 허식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싫증내시는 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하나님은 간결함과 지식으로 틀이 잡힌 기도와 간구를 더 많이 원하시지 않을까요? 우리 중 몇몇 사람은 골방으로 들어가 그저 말을 장시간 쏟아 냅니다. 우리는 사려 깊지 못하고, 말이 많고, 앵무새같이 진부한 말을 반복하여 무의미한 간구와 틀에 박힌 경배를 드리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지적으로, 정확하게 아뢰어야 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신실한 경배의 제물을 드려야 하며, 왕 중의 왕이신 분에 대한 존경에 기초한 권위를 마땅히 돌려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 하십시오. 그러면 그분도 구체적으로 응답하십니다. 냉랭함이나 경솔함은 그분의 궁정에 거할 자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마26:38)

기도의 진정한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과 한층 개인적인 교제를 누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헌신”에 자족합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에 속성으로 짧게 기도드리고 황급히 성경 몇 구절을 대강 묵상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모든 증인의 사역을 한다 해도 골방에서 기도하는 의무와 특권을 면제받지 못합니다. 육적인 영혼이 변형되기까지 하나님과 함께 골방에 머무르십시오. 어느 누구도 밭갈지 않고 기도하면 안되며 또 어느 누구도 기도하지 않고 밭을 갈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선물은 그 대가로 당신을 신음하게 만들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너무 연약하여 매일 매일 지속적인 기도 없이는 대적을 마주 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2009년 7월 28일 화요일

순종이 복보다 낫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2)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나는 또 복보다도 낫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람이 이삭을 제단에 제물로 드리는 이야기의 깊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가서 이를 행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순종했습니다. 아브람이 그 제단을 떠나며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셨나?” 라고 말했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순종을 원하셨습니다. 나는 오늘 마침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협상하라고 말씀하셨고 내가 어떤 것을 청구해야한다고 모든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손에 넣지 못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하나님께 의문을 품어야 할까요?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의심해야 할까요? 사탄이 나를 방해했다고 믿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하라,” 말씀하셨고 나는 그대로 행했습니다. 나는 순종의 평강 속에 안식할 것입니다. 그것이 복보다 더 나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동전의 한 면만을 보여 주십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종은 되묻지 않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믿음이기도 합니다. 주인이 그의 종에게 가라고 명하면 그는 가고, 오라고 명하면 그는 옵니다.

“Though he slay me, yet will I trust in him (그가 나를 죽이시나 그래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 (King James Version 욥 13:15) {한글 성경은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로 되어 있음}

하나님이 언약을 안 지키시는 것처럼 보일 때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마음을 결단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모든 인도하심이 그 면전에서 날아가 버렸을 때 사람은 아직도 믿음의 말들을 할 수 있을까요? 믿음의 거인들은 그리 하였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가장 혹독한 시련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자라게 하기 위하여 아주 특이한 방법들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과 더욱 깊이 동행할수록, 당신이 받는 시험은 더 독특해질 것입니다. 고난을 당신이 하나님을 거스렸다는 증거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적은 오직 불가능 가운데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하십시오 그리고 가장 특이한 시험들을 맛보는 인생을 맞을 채비를 하십시오.

믿음은 당신이 가진 것을 이용하여 옵니다. 장애물이 치워질 때 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어떻든지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믿음의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마지막 삼십분”입니다.

2009년 7월 27일 월요일

여전히 건재함

우리가 육에 대항하여 또 마귀에 대항하여 승리한 후 매번 더 강한 유혹과 공격이 뒤따라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탄은 우리에 대한 공격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한 번 패하면, 그는 병력을 배로 증강하여 곧 바로 다시 쳐들어옵니다. 그리하여 갑자기 우리는 이미 이겼다고 생각한 영적 전투를 다시 치르게 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람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진을 치고 더불어 싸우더니” (삼하 10:17) 갑자기, 다윗은 똑같은 옛날 원수를 마주 대했습니다-깨끗이 전멸시켰다고 생각했던. 이때 당시 다윗이 죄 가운데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경건한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허나 역시 인간이었으므로 다윗은 벌어진 상황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 원수가 다시금 다윗을 대적하여 일어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다윗과 같은 처지에 있어 본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기도해 본적이 있습니까?
“주님, 다만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고 옳은 일을 하기 원합니다. 주님은 제가 금식하고 기도하고 당신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을 아십니다. 주님을 슬프게 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왜 저는 이토록 극심하게 시험을 받습니까? 왜 옛 원수와 이 똑같은 전투를 벌여야 합니까?”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시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삼하 7:11-12)

혼란스런 마음과 영혼의 탐색 가운데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와 맺으신 언약을 기억했습니다. (삼하 7:11-12 참조) 그리하여 마귀가 다윗을 향하여 지옥의 모든 무기를 쏟아 부을때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가 전투에 임하기도 전에 승리자가 될 것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다가오는 적으로부터 눈을 떼고, 대신 하나님의 인애의 계시를 누렸습니다. 대적이 홍수처럼 밀어 닥칠 때 하나님이 그의 모든 자녀에게 의도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으로 그들 “앞서 나아가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다가오십니다. “내가 약속하건대, 너는 이 상황을 극복하고 나올 것이다. 부상을 당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괜찮다. 내가 너를 이미 승리하도록 만들었다.”

2009년 7월 24일 금요일

언약의 땅 소유하기

모든 나라로부터 큰 무리가 그리스도를 그들의 모든 것으로 소유 하였습니다. 하지만 많은사역자들을 포함해서 이 무리의 다수가 그들의 원천으로서의 예수를 버렸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자신의 육에 의지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을 넘어 지성소에 발을 들여 놓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주님의 존전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육이 모두 죽어야함을 깨닫습니다. 영적 고양을 향한 모든 갈구, 위대한 부흥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 구원에 집중된 모든 초점, 새로운 사역과 운동을 찾는 모든 일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당신의 모든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분 한분만이 당신을 흥분시키는 원천이요, 당신의 지속적인 부흥의 원천인 것입니다. 그분이 계속해서 당신을 인도하는 말씀이시오, 아침마다 새로운 은혜이십니다. 일단 경계를 넘어서면, 이제 당신은 더 이상 뛰어난 교사나, 기름부음을 받은 설교자나, 능력있는 복음전도자에게 의존할 수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 모임 저 모임 바삐 다닌다거나 당신을 축복해줄 사람을 찾아다니며 여전히 그리스도 대신 사람을 의지한다면 당신은 예수님으로 만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분이 당신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벗” (야고보서 2:23)이라고 불리었습니다. 벗이란 그의 마음을 자유로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명백히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아브라함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렇게 증언하셨습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세기 18:17)

진정으로 바울도 선언했습니다. “또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갈라디아서 3:8)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창세기 18:18)에서 언급하셨던, 그로부터 일어날 많은 나라들을 포함해서 미래에 일어날 위대한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언약된 소유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승리의 예수님이 모든 통치자와 권세를 무력화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승리를 보았고 많은 나라들이 그들의 언약, 즉 그리스도 자신을 소유하고 언약의 땅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들어오기 위해 갖은 애를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공허한 약속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여 오직 믿음으로 언약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언약의 땅을 소유했습니까? 당신은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쟁취하신 공급과 복을 붙들고 있습니까? 제가 촉구합니다. 예수님으로 당신의 생명, 당신의 전부, 당신의 모든 것을 삼으십시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여 당신의 영원한 소유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평강과 안식으로 들어가십시오.

2009년 7월 23일 목요일

우리안의 견고한 진 다루기

크리스천들은 빈번히 고린도 후서 10:3-4절을 인용합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견고한 진이라는 말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죄 중에서 최악 1,2위를 다투는 음행이나, 마약 중독, 알콜 중독등과 같이 사람을 옭매는 굴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우리 인간들이 죄라고 헤아리는 범주를 넘는 훨씬 더 나쁜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는 귀신 들린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견해로는, 마귀는 극복하고자 하는 크리스천의 마음속에 들어와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비유적으로 사용한 ‘견고한 진’의 희랍어 원어 뜻은 ‘논쟁거리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짐’ 입니다.
견고한 진이란 다름 아닌 당신의 마음속에 굳게 자리 잡은 참소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 안에 거짓말, 허위, 그릇된 관념 등, 특별히 하나님의 성품에 관하여 거짓을 심어놓음으로써 견고한 진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원수는 당신의 마음속에 당신이 영적이 아니기에 전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거짓말을 심어 놓습니다. 그리고 귀에 못이 박히게 속삭여 댑니다.
“네 안에 뿌리박힌 죄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할 거야. 그 정도 노력으로는 아직도 멀었어.
너는 하나도 안변했잖아. 하나님도 네가 계속 일진일퇴 하니까 더 이상은 안 참으신다.“

또는, 마귀는 당신이 피해를 입은 사람이기 때문에 쓴 뿌리를 품고 있을 권리가 있다고 당신을 확신시키고자 할지도 모릅니다. 만일 당신이 그의 거짓말을 계속 듣고 있으면 얼마 안가서 당신은 그 거짓말을 믿게 될 것 입니다. 사탄은 형제를 참소하는 자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그의 참소하는 군대를 이끌고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 마음속에 마귀가 하는 거짓말들을
심어놓습니다. 이 거짓말들이 그의 견고한 진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하지 않으면 이것들은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마귀가 무서워하는 유일한 무기는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 했을 때 그를 쫓아버린 바로 그것입니다. 그 무기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의 진리입니다. 미가 선지자에 따르면 이것이 우리가 붙들어야할 약속의 말씀입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가 7:18-19)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밟아 항복시킬 수 없습니다.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그분이 밟으십니다.

2009년 7월 22일 수요일

최고의 위험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최고의 위험은 우리의 환난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신 우리는 귀신을 봅니다. 가장 캄캄한 , 폭풍이 극도로 몰아치는 공포의 절정에 예수님은 자신이 홍수의 주인이요, 폭풍가운데 구원자이심을 계시하기 위하여 항상 우리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29:10).

 

마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배를 타라고 명하셨고 배는 폭풍을 향하여 나갔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배에 타라고 재촉하셨다고 말합니다.  배는 흉흉한 파도를 향해 가고 있었고 위에 있는 코르크 마냥 마구 흔들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그분은 바다를 내려다보는 산위에 계셨습니다. 그분은 그곳에서 그들이 통과해야만 하는 시험에 실패하지 않도록 기도하며 계셨습니다.

 

당신은 적어도 제자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알아채고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것입니다. “친구들이여, 예수님은 절대로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임무에 우리를 보내셨다. 우리는 그분의 뜻의 중심에 있다. 그분은 의인의 발자국은 그분 자신이 명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보라. 저것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분이 바로 여기 계시다. 우리는 결코 그분의 시야에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하지만 제자 사람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폭풍 속에 그분이 계시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결코 그들은 그분이 폭풍 가운데에 자신들과 함께, 또는 그들 가까이에 계시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실제로 위를 걸어서 오셨습니다.

 

배워야할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입니다. 심오하고 신비하고 지구를 뒤흔드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인생의 모든 폭풍 가운데에서 그들의 주님으로 신뢰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그저 그들이 가장 어두운 시련의 시기에도 자신들의 활기와 자신감을 유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뿐입니다

2009년 7월 21일 화요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담이 죄를 지었을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숨으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했을 그는 그분을 대면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에서 전도하기를 거부했을 두려움이 그를 주님의 임재에서 도망치도록 바다로 내몰았습니다.

 

실패보다 더욱 나쁜 것은 그에 수반되는 두려움입니다. 아담, 요나, 베드로가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났던 것은 그들이 그분에 대한 사랑을 잃어 버려서가 아니라 그분이 그들로 인해 너무도 분노하여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는 솔개처럼 당신이 어떤 식으로든 실패하기를 기다립니다. 그런 후에 그는 지옥의 모든 거짓말을 동원하여 당신이 포기하도록 만들고 하나님이 지나치게 거룩하다거나 당신이 돌아오기에는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고 확신하게 만듭니다. 또는 당신이 충분히 완벽하지 못하다고 두려워하게 하거나 당신의 실패를 결코 만회하지 못할 것이라고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모세에게서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프로그램에 쓰임 받을 있도록 하는데 40년이 걸렸습니다. 만약 모세나 야곱 또는 다윗이 실패에 체념하고 말았다면 우리는 결코 이들에 대해 다시 듣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영웅 하나로 다시 일어섰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죄를 직면하고 자기가 속였던 형과 다시 만났으며 새로운 승리의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전으로 달려가 용서와 평강을 발견했고 자신의 전성기로 돌아왔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발자국을 되돌아가 처음 자신이 거부했었던 일을 행하고 도시 전체가 회개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베드로는 부인하였던 잿더미에서 일어나 교회를 오순절로 인도하였습니다.

 

1958 작은 자동차안에서 나는 울며 앉아있었습니다. 나는 처참하게 실패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일곱 명의 십대 살인자들에게 증거 하기 위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다고 생각하였는데 법정에서 볼품없이 쫓겨났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어린 불량배들을 도우려했던 나의 시도는 비참한 실패로 끝났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암흑의 시간에 내가 만일 포기해 버렸더라면 얼마나 많은 축복을 내가 잃어버릴 했는지 생각하면 몸이 오싹합니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실패를 직면하고 나를 위해 그분이 인도하시는 다음 단계로 계속 진행하도록 가르쳐 주셨던 것이 오늘날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2009년 7월 8일 수요일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오직 당신의 믿음 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집이나 자동차, 가구, 저축, 또는 당신의 소유물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당신의 믿음 즉, 그분의 말씀에 대한 당신의 강한 믿음이 전부입니다. 아마 그것은 더욱 영적으로 보이는 다른 사람이 결핍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아마 다른 사람을 당신 보다 더욱 영적이라고 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사람은 어쩌면 외형적으로 의롭게 보이려고 애쓰는 중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을 보시며 “저기 의로운 자가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의로워지는 것에 당신이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주님이 그분의 의를 당신에게 주신다고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신 바로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가 의롭게 여겨진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아브라함)의로 여겨졌느니라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실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4:22-24).

당신은 “나는 이것을 믿는다.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주님이 문제에 빠진 당신의 결혼 생활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분이 영적으로 죽은 친척을 살려낼 수 있다고 믿습니까? 당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습관의 구덩이에서 그분이 당신을 건져낼 수 있다고 믿습니까? 당신은 그분이 당신의 저주받은 과거를 지우시고 벌레가 먹어버린 그 세월들을 당신에게 회복시켜 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까?

불가능한 상황가운데 처하여 아무런 자원도 없고 소망도 없어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일 때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의 필요를 돌보시는 여호와 이레가 되실 것을 믿습니까? 그분은 당신에게 한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로 결단하셨고 만일 그분의 말씀 중 단 하나라도 실패한다면 하늘이 녹아버리고 우주가 붕괴해 버릴 것이라고 믿습니까?

2009년 7월 7일 화요일

징계하는 사랑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은 당신은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회개하고 그분께 돌아오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징계입니다. 당신은 과거와 현재의 죄들 때문에 당신 영혼 안에 하나님의 화살을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회개하는 심령을 가지고 잘못으로부터 돌이키기 원한다면 그분의 징계하시는 사랑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고침을 받게 되나 그분의 크신 자비와 동정심으로 고쳐주실 것입니다. 당신은 이방인들이 그렇듯이 그분의 진노를 느끼지 않고 도리어 그분이 사랑스런 손길로 치시는 훈련의 막대기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당신의 고통은 잘못내린 결정에서 온 것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하나님이 결혼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사람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자녀들이 부모를 한계상황으로 몰아넣으며 마음 아프게 합니까? 하지만 많은 경우 부모 자신들의 과거의 죄와 태만과 타협으로 인해 생긴 일입니다.

당신이 가장 밑바닥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때, 그 때가 깨진 가운데 회개와 믿음 안에서 주님을 구할 때입니다. 성령의 힘을 새롭게 주입 받을 때입니다. 당신 안에 영적 힘이 흘러넘치도록 새로워지고 회복되어야 할 때입니다.

아시다시피, 당신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그분은 당신에게 그분의 힘을 부어주십니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시138:3, 7-8).

크리스천들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 중 하나가 의인이 고통당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시대까지 유대인들은 번영과 건강을 경건한 것과 연관 지었습니다. 당신이 부유하고 건강하거나 또는 다른 면으로 복을 받았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하시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는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입니다. 제자들은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만약 당신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으면 하나님이 절대로 당신이 고통당하게 하시지 않고 하나님을 부르기만 하면 그분이 달려와 즉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잘못된 교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열거된 믿음의 영웅들은 모두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동행하였으며 돌에 맞고, 조롱당하고, 고문당하고 참혹한 죽음을 당했습니다(36-38절).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했던 바울 자신도 파선을 겪고, 돌에 맞고, 채찍질당하고, 죽도록 내버림을 받고, 강도당하고, 투옥당하고 핍박받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의 믿음을 시험받고, 정화되고,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험과 시련을 통하여 우리 마음가운데 뭔가를 심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주 예수님, 당신은 나의 보호자이시고 나는 당신이 내 삶에 일어나는 일들을 통치하신다고 믿습니다. 만일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당신이 허락하셨기 때문이며 그렇게 하시는 당신의 목적을 신뢰합니다. 그 일로 내가 어떤 교훈을 받기 원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내가 의안에서 행하고 내 마음속에 당신의 기쁨이 있다면 내가 살든지 죽든지 당신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어떤 영광을 예비해 놓으셨을 수도 있고 내 유한한 마음이 이해할 수 없는 영원한 목적이 있을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어떻든지, 나는 ‘예수님, 살든지 죽든지 나는 당신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2009년 7월 6일 월요일

완전한 마음 소유하기

완전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아십니까? 만일 당신이 주님에 굶주려 있다면 아마도 이미 진심으로 갈망하며 주님의 이 명령을 순종하려고 시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격려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요구를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완전한 마음을 갖는 것은 하나님이 처음으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을 때부터 믿음 생활의 일부였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구약에서 우리는 몇 사람이 성공한 것을 봅니다. 예를 들어 다윗은 완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고 마음을 결단하였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시101:2).

완전함에 대한 생각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완전함이 죄 없고 흠이 없는 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완전함은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온전함, 성숙함을 의미합니다.

완전함의 히브리어와 헬라어 의미는 “올바름, 점이나 흠이 없음, 전적으로 순종적임”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이행하기 위해 시작한 것을 끝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존 웨슬리는 이 완전함의 개념을 “지속적인 순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완전한 마음은 반응하는 마음, 즉 주님이 구애하시고, 속삭이시고 경고하시는 모든 일에 신속히 전적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언제나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의 종이 경청하고 있습니다. 길을 보여주십시오. 그 안에서 행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완전한 마음이 다윗과 함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139:23-24).

하나님은 진실로 우리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그분은 예레미야에게도 마찬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렘 17:10). 이 구절의 히브리어 의미는 “나는 꿰뚫는다. 나는 심도깊이 검사 한다”입니다.

완전한 마음은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모든 것들을 검사하고 드러내어 파내버리기 위해 성령께서 오셔서 속사람을 살피고, 모든 감춰진 부분들을 속속들이 비추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은밀한 죄를 감추고 있는 사람들은 찔림을 받거나 살핌을 당하거나 탐색 당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완전한 마음은 안전이나 죄를 덮어 주는 것 이상의 것을 갈망합니다. 그것은 교제 가운데 거하기 위해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기를 구합니다. 교제는 그분과 즐거운 친교를 나누며 그분의 얼굴을 구하고 그분의 임재를 알며 주님과 대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마음을 살피시는 것은 앙심을 품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보상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의 목적은 우리가 죄 가운데 있는 것을 적발하거나 우리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고 순전한 그릇으로서 자신의 거룩한 임재 안으로 들어오도록 우리를 준비시키려는 것입니다.

2009년 7월 3일 금요일

주님의 비밀들

마태는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 13:34-35)

오늘날 다수의 크리스천들에게 비유는 너무 단순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에 의하면 각 비유는 엄청난 비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비유에는 감추어진 천국의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이 진리는 오직 부지런히 구하는 자만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비유들을 빨리 대강 훑어봅니다. 그들은 자명한 교훈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곧 지나쳐 다른 데로 갑니다. 또는 본인들한테 적용되지 않는다고 비유의 의미를 기각해 버립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비밀들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His secret is with the righteous” 그의 비밀이 의로운 자에게 있다 말합니다. (King James 영어 성경 잠언 3:32). {한글 성경에는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 로 되어있음} 이 비밀들은 세상의 기초가 놓일 때부터 알려지지 않았었으나 마태는 이것들이 예수님의 비유 속에 묻혀 있다고 말합니다. 이 숨겨진 진리는 크리스천들을 진정으로 자유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발견하기위해 비싼 값을 치르고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주님의 비유를 하나 생각해 보겠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마 13:45-46) 이 비유에서 장사는 누구입니까? 장사라는 말의 희랍어 어근을 살펴보면 이 장사는 이곳저곳 여행하며 다니는 도매상입니다. 이 장사는 또한 감정사나 검사하는 사람으로서 다시 말하면 값진 진주의 품질과 가치를 평가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장사가 발견한 값진 진주임을 압니다. 그분은 매우 귀합니다. 그 가치를 계산할 수 없습니다. 장사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살 정도였습니다. 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이 진주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분명히 이 진주는 아버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분은 다른 어느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소유하듯이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아버지의 가장 귀하고 소중한 소유였습니다. 유일하게 한 가지만이 아버지로 하여금 이 귀한 진주를 포기하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랑 때문에 그리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밭에 묻힌 보물 상자입니다. 그분 안에서 나는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했습니다. 더 이상 사역 안에서 목적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더 이상 가족이나 친구 속에서 만족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쌓아올려야 한다거나, 성공을 해야 한다거나 유용하게 쓰임을 받는지 느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무리들을 따라하려 하지도 않고 뭔가 증명해 보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더 이상 사람을 기쁘게 할 방법을 찾지도 않습니다. 더 이상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내 나름의 생각과 이론을 짜내지도 않습니다.

나는 내가 찾던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의 보물, 나의 진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진주의 주인은 내게 다만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데이빗,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를 입양하게 해다오. 나는 이미 내 아들의 피로 서류에 서명을 했다. 너는 이제 그와 함께 내 모든 소유를 물려받을 공동 상속인이 되었다.”

이런 거래가 어디 있을까요! 나는 자기 의뢰와 선행이라는 남루한 옷을 버렸습니다. 애씀이란 이름의 낡은 구두도 치워버렸습니다. 의심과 두려움의 거리에서 잠 못 이루던 밤도 뒤로 했습니다. 그 대가로 나는 왕에게 입양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이 진주, 이 보물을 구하되 주님을 발견하기 까지 찾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그분 자신 전부를 내어 놓습니다. 그분은 기쁨, 평강, 목적, 거룩을 가져다주십니다. 그리고는 그분이
당신의 모든 것이 됩니다. -당신의 깨어남, 당신의 잠듦, 당신의 아침, 오후 그리고 저녁.

2009년 7월 2일 목요일

당신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죄에 대한 승리

죄는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굴욕적인 패배가운데 사는 비열한 겁쟁이가 되도록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 가운데 있는 은밀한 죄 때문에 죄에 대해 용기있게 대항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불순종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죄를 묵인하고 자신들이 패배 속에 살기 때문에 승리에 대해 설교할 수 없습니다.

다윗왕은 대적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주님과 바르고 좋은 교제를 나누고 있을 때 그의 대적 중에서 아무도 그 앞에 설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죄를 짓고 주님에게서 멀어졌을 때 그의 대적들이 대담해지고 그를 이겼습니다.

다윗의 간음죄는 그의 가장 위대한 승리 중 하나를 이룬 직후에 있었습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은 대단한 승리의 영광에 취해 밧세바를 탐하기 시작했고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를 죽이고 그녀와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하 11:27).

그래서 주님은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냈습니다. 이 선지자는 다윗의 죄와 정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조언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나단은 이 사안의 핵심을 찔렀습니다. “당신은 주님의 율법을 멸시했습니다. 당신은 주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당신은 은밀한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은 광야로 도망했습니다. - 죄로 인해 그의 능력과 용기를 박탈당한 비열한 자로서 울면서, 맨발로.

우리는 우리의 문제와 두려움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 충분히 배웠습니다. 우리의 삶속에 있는 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배우지 못했습니다. 습관이 되어버린 죄를 당신은 어떻게 극복합니까? 거의 당신 삶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죄에 대한 승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어떤 공식이나 간단한 해결책이 없습니다. 영과 육 사이의 전투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성경에 많은 위로가 있는 줄 압니다. 바울도 동일한 종류의 원수에 대항해서 동일한 종류의 전투를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7:19).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은 성령께서 그들 심중에 심어놓으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잠언서 기자는 선포합니다.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잠 16:6).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3: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14:27).

여기서 언급된 “하나님을 경외함”은 존경에서 나온 두려움과 존중을 훨씬 능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에 대한 경외가 우리 안에 깊이 뿌리내리기 전에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충만한 계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모든 계시는 그분에 대한 거룩한 경외와 연결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없이는 우리가 죄로부터 지속적인 구원을 체험할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하지만 많은 교회에서 주님에 대한 경외가 금기시 되는 주제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주제로 한 설교를 마지막으로 들어 본 것이 언제 입니까?

이에 대한 한 가지 이유로 사회의 방임주의가 하나님의 전을 침투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최근 들어 “은혜”라는 단어는 죄를 덮어준다는 의미가 되어버렸습니다. 시편기자가 기록했듯이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습니다(시36:1).

2009년 7월 1일 수요일

그리스도를 닮음으로 부름 받음

예레미야는 주님을 찾는데 마음을 열중하는 것에 대하여 말했습니다(렘 30:21 참조). 예레미야는 또한 주님을 찾기로 자신의 마음을 정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다”는 이 선지자의 말에 대하여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르고 이것은 그에 대해 확실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또한 구약에서 가장 복되고 가장 찬양할만한 복음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어찌되었든 그는 임하실 영광에 대해 예언했습니다(렘 32:40).

이것이 복된 소식입니다. 예레미야가 한 예언은 긍휼과 은혜 기쁨과 평강 그리고 선함으로 충만합니다. 하지만 여기 예레미야의 말 배후에는 개인적인 역사가 깃들어있습니다. 그 역사는 인간의 능력을 훨씬 초월하는 깨어짐을 포함합니다.

예레미야는 기록했습니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렘4:19).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9:1).

예레미야는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거룩한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습니다. 진실로 이 선지자는 하나님 그분이 심령이 상하여 울고 계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실제로 들었습니다. 첫째로, 주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에 심판을 보내실 것이라고 예레미야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분은 이 선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산들을 위하여 울며 부르짖으며 광야 목장을 위하여 슬퍼하나니”(9:10). 여기서 히브리어로 “슬퍼한다”는 말은 “울고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분의 백성들에게 내려질 심판에 대해 울고 계셨습니다.

예레미야가 이것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의 백성으로 인해 울고 계시는 하나님의 짐을 나누어졌습니다. 자, 우리가 울고 계시는 하나님의 짐을 나누어 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주님은 그 대가로 그분의 진정한 마음과 생각을 우리와 나누십니다. 예레미야가 이것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그는 앞으로 다가올 일을 볼 수 있도록 그의 시대를 분별하는 지식을 받았습니다.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렘 11:17-18). 깨어지고 말씀에 젖은 성도라면 누구라도 시대를 분별하는 감각을 받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계시며 그 마음은 바로 아버지의 본질이신 그리스도라고 믿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측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인간적인 마음이십니다. 그분은 우셨습니다! 그분은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그분은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귀한 사람들은 이 영원한 하나님의 인간적인 마음의 감정들과 기쁨과 고통을 나누는 특권을 가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