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30일 금요일

너희는 거룩할지어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지 석 달 후에 시내산 밑에 이르러 장막을 쳤습니다. 모세가 주님과 대화하기 위하여 그 험한 산을 올라갔고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습니다. “내가 빽빽한 구름 형체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에게 말할 때 백성들이 듣게 하려는 것이니라. 그러면 그들이 너를 영영히 믿을 것이니라. 너는 내려가서 백성들이 내가 강림하는 것을 준비하게 하라. 그들을 성결케 하라.”

셋째 날 아침에 무시무시한 우레와 번개가 치는 폭풍이 있었고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임했습니다. 시내산은 여호와께서 불의 형체로 강림하심으로 인해 연기로 완전히 휩싸였습니다. 산 전체가 심한 지진으로 진동하였고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하였고 하나님께서 힘찬 음성으로 대답하셨습니다(출애굽기 19:9-19 참조).

하나님께서 모세와 그분이 선택한 백성에게 천둥치듯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애굽기 19:6).

히브리서에 기록된 땅을 뒤흔드는 예언이 이 때 계시되려는 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다시 한 번 말씀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히브리서 12:26).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히브리서 12:25).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모세 시대에 말씀하셨던 것과 동일한 메시지를 하늘로부터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이 두려운 명령을 우레같이 발하고 계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베드로전서 1:16).

이처럼 사악한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거룩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어느 누가 조금도 악에 오염되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요?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지키실 수 있습니다. 그분 자신께 점이나 주름 잡힌 것 없이 거룩한 백성으로 우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우리에게 그분의 거룩함을 부여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그 안에 지키실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겸손해져서 십자가 밑에 있는 것입니다. 시대가 악할수록 더욱 더 우리는 그분께 순종을 유지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2010년 4월 29일 목요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안식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히4:9-10).

당신은 궁금해 할지 모릅니다. “이 약속의 안식이 무슨 의미일까? 내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눈의 비늘을 치워주시고 이것을 깨닫도록 허락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의 약속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당신의 구원을 위해 모든 일을 해놓으셨다는 것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은 단지 믿음으로 그분의 구원의 은혜 안에 안식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우리를 촉구하실 때 뜻하시는 것입니다. 평강을 얻기 위해 당신이 기울이는 모든 육적인 애씀과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그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위해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일에 온전히 의지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전투는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구약은 이것을 분명이 밝힙니다. 이스라엘은 되풀이해서 하나님께 공허하고 헛된 약속을 합니다. “주님, 우리는 당신을 섬기기 원합니다. 당신이 명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들이 자신들의 말을 행할 능력도 마음도 없었음을 증명해 줍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믿는 믿음을 그들에게서 제거해야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우리의 존귀하신 주님의 존전으로부터 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17:28). 이 말은 중단되지 않는 친교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승리를 통하여 우리는 밤낮 상관없이 어느 때나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내 삶에 그리스도를 원한다. 나의 육 전체로부터 해방되기 원한다. 나는 그분의 임재 속으로 나아가 나의 기업을 청구할 것이다. 나는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 나의 만족의 유일한 원천이 되기를 원한다.”

2010년 4월 28일 수요일

내 기도들이 언젠가 응답 될까요?

나는 성령의 타이밍을 믿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시간에 우리의 모든 기도들이 어떻게든 응답될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기도들을 성령의 감찰에 내어 드리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몇몇 기도들은 정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종 우리의 믿음이 성숙하지 않은 요구들에 잘못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라는 기도를 할 줄 모릅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을 그분의 뜻에 의해 허용된 것들만큼 원치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믿음을 행사했습니다. 그가 맺은 축복 협정에는 다만 그가 거할 장막만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건축자이시고 제작자이신 도시에 자신의 전 믿음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용사들 중 믿음가운데 살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응답하기를 거부하신 기도들이 있습니까? 결국에는 그들 중 모두가 구원을 받지는 못하였고 그들 모두가 살아서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고통이나 고난 그리고 죽음까지도 면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고문을 당했고, 어떤 이들은 산산조각 찢겼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히브리서 11:36-38).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라고 알려진 사람들 중에도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히브리서 11:39)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약속을 받은” 자들은 의를 행하기 위해, 연약할 때에 힘을 얻기 위해, 대적이 도망가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믿음을 사용했습니다.

당신의 요구에 대해 하나님이 “예스” 또는 “노”라 하실지 염려하지 마십시오. 응답이 보이지 않을 때 낙심하지 마시고 제발 믿음의 공식이나 방편에 집중하는 것을 멈추십시오. 다만 모든 기도를 예수님께 의탁하고 확신을 가지고 당신의 할 일을 처리하십시오. 그분은 한 순간이라도 이르거나 늦게 응답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구하는 응답이 오지않는다면 마음에 대고 이렇게 말하십시오. “내가 필요한 것은 그분이 전부이다. 내가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분이 보류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의 시간에, 그분의 방법으로 응답하실 것이다. 만일 내 요구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그분에게는 그럴만한 완벽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이 있든지 나는 항상 그분의 신실함을 믿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께 완전히 순종하는 것을 배우는 것 보다 기도 응답을 받는 것에 더욱 관심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 우리를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얻는 것들로 인해 순종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고통 받는 것들에 의해 순종을 배웁니다.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기도로 인해 조금 더 고통당함으로써 기꺼이 배우겠습니까? 약속을 인내로 기다리며 그분의 사랑 안에 안식하겠습니까?

2010년 4월 27일 화요일

약속의 땅의 참의미

하나님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영원한 기업”(창17:8)으로 주셨습니다. 히브리어로 영원한 이란 말은 끝이 없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아마 “아브라함이 이 일로 기뻐하였겠다. 하나님은 그의 후손에게 그들의 눈이 최대한 멀리 바라볼 수 있는 만큼 넓은 영원한 고향을 약속하셨고 이 약속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다,”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신약은 우리에게 이 세상이 불로 파괴당하고 완전히 불에 타 없어지고 그 후에 주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지고 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아마도 의아해 할 것입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이 단지 하나의 땅덩어리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그것이 어떻게 영원할 수 있을까?” 사실은 이 약속의 땅은 이 지구를 초월한 장소에 대한 상징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그의 영으로 이것을 알고 있었다고 믿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거류할 때에 항상 이방인처럼 느꼈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히11:9). 왜 그랬을까요? 아브라함의 마음은 땅 자체를 초월한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111:10). 아브라함은 땅의 축복에 대한 참의미를 알 수 있었고 “이 장소는 진정한 기업이 아니다. 다가올 위대한 축복에 대해 그려 보여 주시는 설교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깨달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의 참의미를 파악했던 것입니다. 그는 가나안이 오실 메시야를 상징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몸소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성령께서 이 족장으로 하여금 다가올 세월을 꿰뚫어 그리스도의 날까지 볼 수 있도록 가능케 해주셨습니다. 그는 약속의 땅이 온전한 평강과 안식의 장소를 의미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아는 한 이 안식의 장소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옳습니다, 주 예수님이 우리의 약속의 기업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것일 뿐 아니라 그분도 우리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한 믿음으로 우리의 영원한 기업을 얻으라고 우리를 초대 하십니다.

2010년 4월 26일 월요일

7,000명 클럽

거룩과 의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는 자신의 나라가 처했던 도덕적 타락에 낙심하게 되었고 아합 왕의 사악한 왕비 이세벨의 협박을 피해 도망쳤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숨어있던 호렙산 동굴에서 그를 찾아내시고 물으셨습니다. “엘리야야 이곳에 숨어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엘리야는 분개하여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당신의 영광을 위해 열심을 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백성은 당신의 말씀을 저버렸습니다. 당신의 제단은 무너졌고 당신의 사역자들은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나만 홀로 남았는데 이제 그들이 나를 찾아 잡고자 합니다.”

외관상 어느 모로 보나 엘리야의 말이 맞았습니다. 정부는 역사상 가장 사악하고 타락했으며 사회는 붕괴가 임박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합이)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열왕기상 16:33). 정부는 사실상 국민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왕비 위 (位)에 올랐던 여인 중 사상 최고로 사악했던 이세벨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여인이었고 여호와를 추종하는 모든 사람을 죽이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엘리야는 끝까지 견디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나라 전체가 하나님을 버렸다 해도 그는 진실한 채로 남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숨어있는 선지자를 치하하려 들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 성령이 나라 전체를 운행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결국에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는 엘리사가 자신을 감동시키시는 하나님의 첫 손길을 느끼고 있었고 힘세고 젊은 혁명가 예후가 국가의 타락과 불 경건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기 위해 애타게 기다리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도덕적 대각성이 막 일어나려는 참이었고 하나님이 곧 이세벨을 개들에게 던지시고 사악한 통치자를 폐위시키실 것이었습니다.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최대로 단호하게 알려주셨습니다. “나에게는 자신들을 둘러싼 사악함에 타협하지 않고 굴복하지 아니한 칠천 명이 있노라. 그들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느니라. 그들은 나의 것이니라!”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그분의 백성, 즉 만연한 타락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진실한 신자들이 나라 전체에 걸쳐 요소에 배치되어 있음을 알려주시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현재 우리 자신의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성도들의 소집에 눈을 뜨라고 장려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수천 명이 무릎 꿇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수백만 명이 무릎 꿇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고 나는 믿습니다.

우리는 소수의 남은 자가 아니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는 이 광적인 시대에 삶의 모든 여정 가운데 굽히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군대요, 피로 씻음 받은 무리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숫자가 급속히 감소하는 중이라고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그는 진정한 신자들이 다수가 이미 탈영했다고 생각하여 두려움에 숨어버리기를 원합니다. 사탄의 거짓말을 믿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분의 성령을 부어주시며 굶주린 심령을 자신께로 이끄시면서 여전히 역사하고 계십니다.

2010년 4월 23일 금요일

흑암에서 빛으로

무엇으로 죄의식, 두려움과 우울증에 싸인 우리의 비참한 삶에서 우리를 구출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영광스러운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할까요?

바울이 말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로새서 1:12).

당신은 이 영광스럽고 해방된 삶을 원하십니까? 당신은 지금 이것이 당신의 유산이라고 믿습니까? 당신은 지금 하나님께서 당신이 이 삶을 소유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으로 이사해 들어가십시오! 그것을 당신의 것으로 청구하십시오.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만큼 고통당했으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직도 깨우치지 못했습니까?” 다시 말하자면, “두렵고 심적 고문을 당하는 삶을 살기에 지긋지긋하고 지치지 않았습니까? 더 나은 길이 있다는 것을 아직도 배우지 못했습니까?”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갈라디아서 3:11). 단순히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행하시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강의 해방된 삶은 선물입니다. 일하여 얻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기쁨은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당신의 믿음이 그분 앞에서 당신을 의롭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기쁨입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로마서 4:7-8).

아브라함은 단순하게 하나님을 그분의 말씀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열국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그는 의심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도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로마서 4:20-24).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지키실 것이라고 믿어야만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능력이 우리를 지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우리 삶으로 인도해 들인 믿음이 우리가 실족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로마서 5:1-2).

2010년 4월 22일 목요일

창세전에 부르셨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그리스도 안에”있는 사람은 모두 주님에 의해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같은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시련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불렀을 때 그에게 이 약속을 하셨습니다. (렘1:1-10 참조) 예레미야처럼 우리는 세상에 대고 전해야 할 메시지를 미리 준비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필요한 그 시점에 우리의 입을 그분의 말씀으로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을 신뢰할 때에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설교자로, 교사로, 사도로 부름 받았고 그로 인해 그들이 모두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도 그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딤후1:11-12).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거룩한 일을 맡기셨다. 그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고난을 당할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바울은 다른 어느 사역자보다 더 시험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시시때때로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소위 종교적인 무리들이 그를 거부했고 조롱했습니다. 때로는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조차 욕설을 퍼붓고 내버리고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결코 사람들 앞에서 당혹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코 낙담하지 않았고 세상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코 지치지 않았습니다. 매번 꼭 필요한 그 때에 말해야 할 기름 부음을 받은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사실 바울은 어떤 일에도 결단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주님에 대한 신뢰를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 그의 말은 “나는 내 삶을 온전히 주님의 신실함에 맡겼다. 살든지 죽든 나는 그분의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 후임 디모데에게 그도 그렇게 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딤후1:13).;

2010년 4월 21일 수요일

동일한 믿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구해내실 수 있다고 믿었으면서도 그분이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일 수 있다는 것은 믿지 못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그들은 10가지 초자연적인 재앙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며 보았으나 그들 중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져 쌓여 그 한가운데로 마른 통로가 드러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고 바다 한 가운데를 걸어서 통과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바다가 바로와 그 군대 위를 덮쳐 그들을 익사시키는 광경을 놀래며 바라보았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출애굽기 14:30-31).

이스라엘이 얼마나 흥분했겠습니까! 그들은 이제 구원받았습니다! 옛 삶은 지나가고 새 삶이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쁨으로 춤추고 아름다운 안식의 땅에서의 영화로운 새 삶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찼습니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출애굽기 15:17).

단 6주 만에 백성들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비참했고, 불안했으며 두려워하고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아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애굽 땅에서....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출애굽기 16:1-3).

그 후 동일한 이 사람들은 열 번의 다른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누가복음 12:32).

하나님이 나에게 그 나라를 주기 원하신다고요? 그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0, 21). 그것은 당신의 속사람 안에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그 무엇입니다. 그것은 해방된 삶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로마서 14:17).

2010년 4월 20일 화요일

새사람으로 행하라

여러분이 잘 알고있는 이야기입니다. 한 젊은이가 자기 몫의 아버지 유산을 챙겨서 방탕한 생활로 탕진 해버렸습니다. 그는 빈털터리가 되고 건강도 정신도 쇠약해졌습니다. 가장 비참했던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이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하는데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 아들이 해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의 죄를 고백하는 일 조차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화해하기 위해 이미 모든 것을 예비해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정으로 모든 것이 아버지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아들이 길을 걸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달려가 안았습니다. 사실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용서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가 회개하는 자녀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용서는 이슈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탕자가 단순히 용서받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고 명백하게 밝히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단지 용서하고 그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려고 품에 안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회복 그이상의 것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자녀와 함께 있고, 그의 존재, 교제를 원하였습니다.

탕자는 용서를 받고 다시 한 번 은혜를 입었으나 아직 자신의 아버지 집에 정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그 집에 정착을 해야 아버지가 만족할 것이요 또 그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게 될 때에만 아버지의 기쁨이 충만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비유의 이슈입니다.

이쯤에서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어집니다. 아들은 명백히 자기 아버지의 용서에 대해 편치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요점은, “제가 했던 그 모든 더럽고 불경한 일들을 모르고 계십니다. 저는 하나님과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에 거스르는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쫓겨나야 마땅합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에게서 책망하는 말은 한 마디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탕자가 행했던 일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고, 반항한 일이나, 그의 어리석음, 방탕한 생활, 영적으로 파산 지경에 이른 일 등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자격이 없으므로 집밖에 머무르고자 했던 시도들을 인정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도들을 무시해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버지의 관점에서 옛 아들은 죽었습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의 생각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지금, 아버지의 눈에 집으로 돌아온 이 아들은 새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과거는 결코 다시 화제에 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내게 관한 한, 옛날의 너는 죽었다. 자, 새로운 사람으로 나와 함께 행하라. 더 이상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 필요가 없다. 죄의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다. 이제 내 앞에 담대하게 나와서 나의 자비와 은총에 참여하여라.”

2010년 4월 19일 월요일

해방된 삶

그리스도가 탄생하시기 수세기 전에 이사야는 하나님이 인류를 해방시킬 구원자를 보내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어느 안식일에 유대인 회당에 서서 이 예언을 세상에 상기시키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하시니”(누가복음 4:17-21).

예수님은 온 세상에 대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나의 사명은 모든 상한 인생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해방시킨다는 말은 모든 굴레를 풀어주다, 모든 노예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다, 억압하는 모든 것을 없애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가 진리를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당신은 그분이 당신과 나에게 “나는 너의 삶을 해방시키기 위해, 너를 모든 억압과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 나는 네 영혼을 자유하게 하려고 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바울도 또한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를 해방된 삶으로 부르기 위해 오셨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1).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로마서 8:21)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비참한 삶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려고 오셨다면 왜 우리는 계속해서 옛날과 동일하게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두려움과 죄의식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삶이란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24시간 안식과 평강이 있는 삶 -정죄감이나 우울증의 무거운 짐이 없는 삶, 우리의 모든 필요를 돌보시는 사랑이 많으시고 온유한 구세주의 임재가운데 있는 삶- 을 우리는 상상하지 못합니다.

진실이라기에는 너무 좋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모든 자녀가 누리기원하시는 해방된 삶입니다. 단지 몇 명의 자녀가 아니라 그분의 모든 자녀가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이 삶은 어떤 신학적 암호를 해독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삶에 대해 온전히 그분을 신뢰하는 모든 자를 위한 것입니다.

2010년 4월 17일 토요일

포기 직전인 이에게 드리는 각별한 말씀

오늘 나는 감정적으로 또한 정신적으로 너무 무거운 짐을 지느라 등이 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라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당신이나 당신의 가족에게는 작용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기도하고 진정으로 그분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기력과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믿음을 붙들수록 시련이 더 늘어갑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침묵하시는 듯 보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 혼자 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수많은 경건한 사람들이 그와 같이 고통당하고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라고 속삭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삼키려는 자가 하는 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옥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욥기 19장으로 가서 장 전체를 읽으십시오. 욥이 말했습니다. “내가...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그가 내 길을 막아....내 앞길에 어둠을 두셨으며...사면에서 나를 헐으시니...나를....원수같이 보시는구나”(19:7-11).

이같이 사탄의 공격을 받는 가운데 욥이 부르짖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19:25-27).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내버려두라”(호세아 4:17). 그 족속에게는 시련이나 시험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우상과 연합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그분의 눈동자입니다. 하나님이 계속 일하실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을 당신 안에서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십니다. 그것은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께서 장차 계시하실 그분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처럼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신 적이 없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2010년 4월 16일 금요일

믿음에 대한 진리

내 아들 하나가 숲속에서 곰덫에 걸려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며 도와달라고 소리치면서 쓰러져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의 아버지로서 아들의 믿음의 본질을 분석해 보기위해 멈추어 설까요? 내가 스스로에게 “내 아들이 내가 와서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고 신뢰할 만큼 나에 대한 믿음이 있을까?” 라고 질문할까요?

아닙니다. 천 번이라도 아닙니다! 나는 아들 곁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믿음 여부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친 아이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나를 움직이는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믿음이 나의 동기를 유발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는 어떤 행위 때문이 전혀 아니고 그저 단순히 아이에 대한 나의 사랑이 동기입니다.

세상의 어떤 아버지가 단순히 자녀가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표명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피 흘리고 다친 채로 외딴 숲속에 내버려두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도 결코 그분의 자녀가 홀로 고통당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연약하다고 해서 그들의 부르짖음에 결코 귀를 막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디모데 후서 2:13).

나의 믿음, 당신의 믿음, 모든 믿음은 우리 천부의 인애와 돌보심에 기초를 두어야합니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의 사랑과 영원한 인자를 기뻐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예레미야 9:24).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를 몹시 사랑하시기에 마치 엄마가 아기의 울음을 예상하듯이 자녀가 부르기 전에 들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이 이렇게 기도했던 이유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내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와여 주의 규례들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시편 119:149).

그분은 나를 사랑하시고 내 믿음이 연약할 때, 그분으로부터 응답받을 만한 자격이 없을 때, 오로지 그분의 사랑과 인자로 인해 나를 구하러 오십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편 103:8).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신하고 나서부터 가장 큰 평강이 내 삶에 밀려들어왔습니다. 그토록 사랑하시므로 그분은 나를 구하러 오실 것이며 내 인생의 모든 상황에서 적절히 행하실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하든지 상관없이 그분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며 그 사랑을 방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2010년 4월 15일 목요일

아라비아로

만약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애쓴다면 나는 명백하게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의 마음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동기 유발 된다면, 그것이 나의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마음가짐이라면 내 충성심은 나누어 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닌 어떤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항상 애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개종하고 몇 년 지나, 예루살렘 교회로 가서 그곳의 제자들과 만나 합류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행9:26).

사도들은 핍박자였던 바울의 명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갈1:22-23).

바나바의 도움으로 사도들은 바울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교제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가기로 행로를 정했습니다. 진실로 바울은 자신의 부르심을 명확하게 묘사하기위해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이것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갈 1:1)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덧붙여 강조하여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갈1:11-12, 16).

바울이 여기서 하는 말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기를 소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적용됩니다. “내가 가진 것을 얻기 위해서 책을 읽거나 사람의 방법을 빌릴 필요가 없다. 나의 메시지, 나의 사역, 나의 기름 부음은 무릎을 꿇고 받은 것이다.” 갈라디아서 1장 17절에서 바울은 아라비아로 갔다고 명시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서 얻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아라비아로 갔다. 사막으로. 그리스도가 내게 계시하시도록 하기위해. 그곳에서 나를 비우고 성령의 말씀을 듣고 성령에게서 배우며 귀중한 시간을 보냈다.”

바울은 자만하거나 거만한 독불 장군 전도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가 종의 마음을 가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야망을 비우고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만족을 발견하였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것에 고정되어 있다면 당신은 사람의 갈채나 인정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2010년 4월 13일 화요일

은밀한 장소에서

성령이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라는 경건한 사람에게 임하셨습니다. 이 영은 아나니아에게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가서 사울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물론 사울의 명성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이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성령이 아나니아에게 어떻게 사울을 천거하는지 보십시오.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행9:11).

요점을 말하면, 주님은 “아나니아야, 너는 이 사람이 무릎 꿇고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는 네가 오는 것을 알고 있다. 네 이름도 알고 네가 왜 자기에게 보냄을 받았는지도 알고 있다. 그는 눈을 뜨기 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언제 이 깊은 지식을 받았을까요? 그는 어떻게 이 비전, 하나님으로부터 온 순수한 말씀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간절한 기도와 간구를 통해서 왔습니다. 사실, 나는 성령이 아나니아에게 하신 말씀,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를 통해 무엇이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를 밝혀준다고 믿습니다.

사울은 모든 음식과 물을 거부한 채 사흘 동안 하나님과 함께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주님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계속 무릎 꿇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구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목사이신 나의 아버지가 가르쳐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길을 열어 주신다.” 내 삶에서 이에 대해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주님이 보여주신 경우들이 있습니다. 나는 여덟 살 때 성령이 임하셔서 말씀을 전파하라고 부르셨습니다. 나는 울며 기도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주 예수님, 나를 채워주십시오.” 그 후 틴에이저가 되었을 때 성령이 하늘로부터 강하게 임할 때 까지 나는 기도했습니다.

젊은 목사였을 때 내 안에서 깊은 목마름이 일어나 나를 부지런히 기도하게 만들었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초월한 무엇인가가 있을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무릎을 꿇고 한 번에 몇 시간씩 울며 기도하며 수개월을 지냈습니다. 드디어 주님은 나에게 뉴욕 시로 가서 갱들과 마약 중독자들에게 사역하라고 부르셨습니다.

또한 이십년 전 나는 무릎을 꿇고 눈물로 크게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구했습니다. 그 때 그분은 타임 스퀘어에서 교회를 개척하라고 나를 다시 뉴욕으로 부르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의 어떤 계시, 그리스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받았다면, 그것은 단지 성경 공부만을 통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 왔습니다. 그것은 은밀한 장소에서 하나님을 구함으로써 온 것입니다.

2010년 4월 12일 월요일

올라가는 길

너무도 어둡고 깊은 시련을 겪어 거의 인생 자체가 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였던 위대한 크리스천들을 알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가장 캄캄했던 시절에 마음에 새로운 소망과 확신을 가져다 준 영광스러운 진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었지만 자신의 한계에 도달할 때 까지는 그의 영혼에 와 닿지 못했습니다. 가장 밑바닥에서 그는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더 깊이 내려갈수록 하나님을 더욱 발견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맑은 하늘로 축복 속에 올라가는 높은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절망의 그림자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밑바닥을 쳤을 때 그는 하나님과 맞부딪쳤습니다! 그는 긍휼하신 하나님의 신실함에 부딪혀 심하게 넘어졌습니다. 그가 발견한 것을 들어보십시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예레미야 애가 3:22-23).

조금씩 예레미야는 바닥에 내려갔던 사람들만이 발견할 수 있는 위대한 진리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 있을 때, 고난이 물처럼 내 마음위로 넘쳐 내가 “이제는 멸절되었다”하였을 때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하셨나이다. (애가 3:54-57)

2. 하나님이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사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라도 그분은 나의 억울함을 보실 것이며 “원통함을 풀어주”실 것입니다. (애가 3:44, 59)

3. 하나님이 비탄과 애통을 허락하신다면 그와 동시에 그분의 풍성한 긍휼과 사랑으로 나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애가 3:32)

4. 내가 고난 속에 갇힌 자처럼 밑바닥에 있을 때 하나님은 나를 발로 밟아 부수려 하며 나를 대적하지 않으십니다. (애가 3:34)

5. 하나님은 나의 계획을 방해하려 하지 않으시며 나를 혼동케 하지 않으시며 나를 대적하여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애가 3:35-36)

6. 내가 절망과 비통가운데 새 날을 직면하기 싫어했을 때라도 그분의 긍휼은 폐함이 없었습니다. 매일 아침 그분의 자비가 새롭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애가 3:22-23)

7. 하나님은 항상 신실하시므로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내 곁에서 선을 행하시고 나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애가 3:25-26)

8. 내가 가장 밑바닥에 처했을 때 하나님 밖에 의지할 곳이 없어 내 마음과 손을 들고
그분의 신실하심으로 인해 그분께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애가 3:40-41)

9. 밑바닥에 있으면서 나의 힘과 소망이 소진되었습니다. 나는 공허하고 겸손해졌으니 이제 온전히 그분의 자비를 의지합니다! (애가 3:18, 20-22)

2010년 4월 9일 금요일

생명을 찾기 위해 그것을 미워하라!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5).

풍성한 생명으로의 열쇠는 바로 이 별 의미 없고 혼돈스러워 보이는 말씀 안에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작은 세상에 대한 그분의 도전입니다. 여기서 그분이 뜻하시는 바를 이해하는 것이 생명을 주는 계시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그리스도가 미워하라는 것은 명백히 이 말의 고전적인 사전상의 해석, 즉 ‘혐오하다 또는 못 견디게 싫어하다, 싫어하다, 거부하다’라는 의미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한일서 3:15).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말라”(골로새서 3:19)고 하십니다.

미움을 받아야 하는 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워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미워하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가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몰두했던 것이 우리에게 저질러 놓은 일을 미워해야만 합니다. 당신의 삶은 단지 당신의 자녀, 남편, 아내, 또는 부모로만 싸여 있습니까? 당신의 모든 즐거움이나 문제 꺼리들은 이 작은 원 안으로 제한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은 간단히 우리 삶의 원을 넓히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인생은 단순히 커튼이나, 청구서, 아이들 교육, 부모님의 복지, 가족관계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마르다는 사소한 일로 분주한 삶에 매어 있었으나 마리아는 성장하기를 원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시계를 넓히기 원했고 예수님은 삶에 대한 마리아의 접근방식을 승인하셨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현재 미성숙함을 미워하지 않는 한 성장할 수 없습니다.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본분과 의무를 저버릴 필요는 없지만 의무에 지나치게 매여 당신의 성장이 방해 받을 수 있습니다. 어느 날인가 당신은 깨어나야만 합니다. 거룩한 분노, 거룩한 미움이 당신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부르짖어야 합니다. “오, 하나님! 내 모습을 미워합니다. 나의 성질부리는 것을 미워합니다. 때로 나는 얼마나 신경질 적인지, 그것이 밉습니다. 나의 변덕스러움이 밉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처럼 왜소해졌는지, 그것이 밉습니다. 미워합니다! 미워합니다! 미워합니다!” 당신은 자신의 현재 삶을 아주 미워하여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어야만 합니다. “주님, 나를 건져 내사 능력과 승리로 충만한 당신의 영광스러운 왕국으로 옮기소서”(골로새서 1:13 참조).

2010년 4월 8일 목요일

그리스도를 시인함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10:32-33).

이 구절에서 시인하다의 희랍어 단어는 언약, 동의 또는 합의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과 합의한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할 일은 매일의 삶에서 그분을 시인하고 또는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개인적으로 돌보실 것이라는 그분의 약속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를 통해서 그분의 놀라운 축복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은 그분의 신성을 믿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땅에 묻히시고 부활하셔서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 이상의 것입니다. 성경은 귀신들도 이것을 믿고 알기에 떤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시인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Whosoever therefore shall confess me... KJV)” (마10:32). therefore(그러므로)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말한 것에 비추어 볼 때...” 또는 “내가 방금 너희에게 말한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가 경청하는 자들에게 방금 말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0:2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온 지구상에 있는 수백만 마리의 새들을 생각해 보아라. 그리고 창세후로부터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새들을 생각해 보아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중 한 마리도 너희 하늘 아버지가 모르신 채 죽거나 덫에 걸린 것이 없다.”

그리고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10:30)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은 매우 위대하시다. 너희의 이해 능력을 초월하시는 분이다. 그분이 너희를 얼마나 세밀하게 돌보시는지 너희는 결코 알 길이 없다,”라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10:31)고 결론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요약해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10:32)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내가 방금 너희에게 계시한,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아버지의 돌보심에 대해 생각해 보아라. 너희는 이 진리를 온 세상을 향해 시인해야 할 것이다. 너희는 살아 숨쉬며 ‘하나님이 나를 돌보신다,’고 증언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고 그분의 친밀한 보살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모든 두려움과 의심을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간과하지 않으셨다는 믿음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살아가십시오. 모든 사람들에게 시인하십시오. “그분의 눈은 참새를 주시하고 계신다네. 나는 그분이 나를 돌보시는 것을 안다네.”

2010년 4월 7일 수요일

그분은 완벽하게 이해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15-16).

나의 구세주가 나의 감정들을 이해하신다는 것을 알므로 나는 매우 위안을 받습니다. 그분은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에 결부되어있습니다. 그분은 진정으로 모든 감정을 이해하고 대적의 공격으로 고통당하는 나를 결코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에게 견뎌내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자신도 이런 유의 고투에 익숙하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내가 곤핍할 때에 자비와 은혜를 약속하시며 그분의 보좌에 앉아 인자한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육체적 전투의 결과인지 또는 영적 전투의 결과인지 상관없이 우리 주님은 가장 필요할 때 위로와 도움을 건네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무슨 의미로 이렇게 하실까요? 자신의 사랑스런 자녀들 모두에게 부정적인 생각들의 영향력 하에 있을 때 초조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실패와 사악함에 대해 당신 자신을 더 이상 비난하지 마십시오. 절망과 두려움은 죄로 인한 것일 수 있으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저 자리에 누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그분과만 따로 떨어져 그분의 보좌에 담대하게 나아가 그분이 그토록 명확하게 약속하신 자비와 도움을 청구하기 전에는 밤에 잠자리에 들지 마십시오.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쫓아내기 위해 자비, 용서와 은혜를 청구하십시오. 이것은 나의 공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식입니다.

승리를 청구했고, 그분의 이름의 권위를 사용하였고, 용서와 약속들을 붙들기 위해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갔다면 안식하는 가운데 당신의 폭풍을 이겨 내십시오! 하나님이 그분의 보조에 맞춰 부정적인 감정들을 흩어버리게 하십시오.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히브리서 6:15).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편 30:5).

입술로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리며 잠자리에 누웠으면 합니다. “오 주님,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물리칩니다. 그것들과 의절합니다. 그것들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모르지만 이 모든 것들을 당신께 의탁합니다. 나에게 새로운 확신을 주시고 모든 두려움을 제거해주십시오. 아멘!”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브리서 2:18).

2010년 4월 6일 화요일

완전한 통제권

주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삶을 살기위한 특정 공식은 없습니다. 내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하나님이 이 영역에 대해 이제까지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께 완전히 통제권을 내어드릴 수 있는지에 대해 두 가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내 삶의 사소한 일에 까지도 그분의 뜻을 나에게 알려주시려고 애쓰고 또 기꺼이 알려주신다는 것을 확신해야만 합니다. 내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아시고, 인도하시고 이끄시며 나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16:34-14).

지금 당신은 어떤 시련을 겪고 있는 중인지 모릅니다. 아마 너무 성급히 내린 결정의 결과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주님은 당신에게 약속하십니다. “네 마음의 귀는 나의 영이 네게 ‘저 길로 가라. 이것을 해라. 저런 일을 하지마라’고 하는 것을 들을 것이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해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기도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1:6-7). 하나님이 무엇을 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는 끝까지 견디고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 능력이 필요합니다. 50여년 사역하면서 나는 사탄과 육이 항상 내 마음 속에 의심과 의문을 심어놓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예수님이 “No,”라고 말씀하실 때 “Yes,”라고 말하지 않으려면 하늘로부터 오는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주님, 제게 말씀하신 것을 압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것이 정말 당신의 음성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의 음성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영적인지 자신이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문을 열든지 닫든지 그렇게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에게 기대하는 믿음의 반응이 아닙니다. 당신은 몇 시간이든지, 또는 한 번에 며칠이든지 원하는 만큼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처럼 성령이 당신을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 없이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당신에게 결코 전달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받아들이고 의문 없이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것을 볼 때 까지 기다리십니다.

2010년 4월 5일 월요일

감정들, 사탄의 사자들

나의 감정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참 다행입니다. 더욱이 감사한 것은 감정들이 나의 구원이나 주님과 나와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수가 우울한 감정들과 부정적인 생각들 속에 나를 빠뜨리려고 홍수처럼 밀려올 때 나는 나 자신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오, 내 영혼아 왜 낙담하느냐? 왜 갑자기 마음이 불안한가? 내가 원치 않건만 왜 이렇게 안절부절 하며 짜증이 나는가? 내가 무슨 악한 일을 했기에 이같이 부정적이고 우울한 감정들을 느껴야한다는 말인가?”

부정적이고 우울한 나의 감정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으므로 내가 그것들을 참고 견딜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디모데후서 1:7).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은 그중 하나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내가 알기 때문에 나는 그 모두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두렵게 하는 감정들은 하늘로부터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지옥의 구덩이로부터 온 사자들입니다. 그것들을 물리치고 기도와 믿음의 능력을 통하여 묶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두려움과 의심의 감정들을 주지 않았다. 도리어 사랑과 능력과 권위의 영을 주었다.” 그분은 이렇듯 원치 않는 생각들을 폐하고 그것들을 사로잡아 그분 자신께 복종시키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다시는 우리의 감정이 주인 노릇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는 우리의 감정이 오래 머물러 쓴 뿌리와 의심으로 자라가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하여 무너뜨려야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린도후서 10:5).

낙심되는 감정은 모두 사탄이 주는 불신의 씨앗의 열매입니다. 그것은 옛 뱀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문을 품게 하고 하나님의 돌보심에 의문을 품게 하고 하나님께 의문을 품게 하려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말들이 부정적인 감정들의 씨앗이고 하나님은 그것들에 대항하여 싸우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2010년 4월 2일 금요일

하나님은 당신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정확히 아시고 당신이 가는 길의 모든 발자국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늘로부터 놀라운 약속들을 전달하기 위해 선지자들을 파송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매일 돌보시는 것을 의심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전혀 동일합니다. 우리가 곤궁할 때에 하나님이 그분의 장중에 우리를 두고 계신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대신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는 실패할 것이고 적에게 멸망당할 것이라고 두려워합니다.

우리가 계속 고통 중에 있고, 계속해서 패배와 실패 가운데 살고 있는 이유는 어쩌면 단순히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한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고 스스로 힘으로 해결책을 구하기 위해 계책을 짜내라고 우리를 내버려두셨다고 생각하는 동일한 죄를 짓고 있습니까? 우리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하나님이 정시에 역사하실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우리 주님이 진심이셨다는 것을 실제로 믿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비록 부르심을 받고 택함을 받았다고 해도 우리의 대부분은 그분이 재림하실 때 그분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고 암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중 몇 사람은 이미 그분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기도가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완전히 독자적으로 사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제 정직해 보십시오! 근래 믿음이 약해졌습니까? 열심히 기도해오던 어떤 일을 거의 포기했습니까? 기다림에 지쳤습니까? 마치 당신은 “도저히 돌파구를 찾지 못하겠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내 기도가 왜 응답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어. 하나님이 내게 안 된다고 하시는 게 분명해”라고 말하는 양, 항복하며 두 손을 번쩍 들어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당신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천 번 아닙니다! 지금 그분은 우리가 그분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로마서 8:28)는 것을 믿기 원하고 계십니다. 해결책을 궁리하는 것을 멈추고, 염려를 멈추고, 당신의 주님을 의심하는 것을 멈추십시오! 응답이 오는 중입니다. 하나님은 귀를 막지 않으셨고 당신이 낙심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둘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