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31일 월요일

격려를 받기 위해 어디로 갑니까?

주님께 온전히 헌신한 크리스천들이 편안하고 고난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어디서 찾아 볼 수 있습니까? 성령에 이끌리고 하나님으로 충만한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종 한 사람을 보여주면 나는 쫓기고 징계당하고 종종 좌절하고 깊은 물과 불타는 용광로에 익숙한 사람을 보여주겠습니다.

어려움을 피하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에 대한 계시를 받는 경우가 드뭅니다. 그들은 자신들 안에 진정 무엇이 들어있는지 발견하는 가장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믿음을 이용하여 위기를 면제받으려 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고난을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들은 검증된 내면적 힘의 원천이 없으므로 무너집니다.

바울은 기록했습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에베소서 3:16).

오늘날 주님은 어떤 바람이나 교리의 파도에도 이리저리 요동하지 않는 크리스천들을 요구하십니다. 상품화 되지 않은 자, 분별력이 있고 속지 않는 자, 새로운 계시를 받은 특수 교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 자신의 모든 발걸음을 인도할 인간 목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 자신의 행복과 영적 힘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의뢰하지 않아도 되는 자들로서 시험당하고 연단 받고 모든 필요를 돕기 위해 은혜와 자비를 공급하는, 하나님의 그 생명이 그들 안에 있음이 검증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계시 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 안에 계시되었습니다. 그분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들의 속사람의 강건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 왕이 시글락에서 겪었던 일에서 값진 교훈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사무엘상 30:6). 고난의 시기가 곧 닥칠 것이므로 우리는 필수적으로 주님 안에서 용기를 얻는 것을 배워야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인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간구합니다. 당신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에 눈뜨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하심과 완전하심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시기를. 우리가 어떤 불타는 용광로에 던져진다 하더라도 우리의 지고하신 주님은 우리가 그것을 통과해 나오도록 하실 것입니다.

2010년 5월 28일 금요일

다윗은 주님 안에서 자신을 격려했습니다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사무엘상 30:6)다는 것은 익숙한 말입니다. 그는 방금 가드에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 아기스왕이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전령 같이 선하”(29:9)다고 말했었습니다. 이 칭찬의 말들이 귀에 울리는 채 다윗과 그의 백성들은 아내와 자녀들을 만날 것을 고대하며 시글락으로 귀환했습니다. 허나 그들의 마을은 불타버렸고 집은 파괴되고 자녀와 아내들은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이 아벡에 있을 때 아말렉이 침공하여 다윗과 그의 백성들의 소중한 것들을 모두 사로잡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생애에 얼마나 끔찍스런 치욕의 날인지요!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사무엘상 30:4).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인해 백성들은 분노에 차 일어나서 다윗을 돌로 치자는 말이 나왔습니다. 다윗 자신도 슬픔으로 한 조각도 성한 것 없이 갈가리 찢겼습니다. “다윗이 크게 다급”(6절)했습니다. 그들은 속수무책이었고 모든 소망이 사라졌고 슬픔과 절망에 삼켜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당하고 한 때 좋아하던 사람들에 의해 거부당하여 낙심되고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무용지물로 느껴질 때 하나님의 자녀는 무엇을 할까요? 믿든지 안 믿든지, 하나님은 이 명백한 비극 가운데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앞에 엄청난 복을 두셨으나 그는 주님의 장중에 완전히 던져져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 자원으로는 그 양이 아무리 많다 해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6절).

다윗은 인격적 교제와 주님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그가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하며 오직 주님만 의뢰하며 홀로 서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윗이 인생의 폐허에 서서 주님의 신실하심가운데 기뻐하며 주님의 임재 안에서 스스로 용기를 북돋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승리의 장관인지요. 그는 사망과 절망에 직면하여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지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교훈을 배우게 되자 하나님은 하늘을 열어 다윗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지시가 큰소리로 분명하게 왔습니다. 다윗이 묻고 하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반드시...도로 찾으리라”(사무엘상 30:8). 빠진 것 하나 없이 다윗은 모든 것을 도로 찾았습니다.

2010년 5월 27일 목요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안식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히4:9-10).

당신은 궁금해 할지 모릅니다. “이 약속의 안식이 무슨 의미일까? 내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눈의 비늘을 치워주시고 이것을 깨닫도록 허락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의 약속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당신의 구원을 위해 모든 일을 해놓으셨다는 것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은 단지 믿음으로 그분의 구원의 은혜 안에 안식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우리를 촉구하실 때 뜻하시는 것입니다. 평강을 얻기 위해 당신이 기울이는 모든 육적인 애씀과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그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위해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일에 온전히 의지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전투는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구약은 이것을 분명이 밝힙니다. 이스라엘은 되풀이해서 하나님께 공허하고 헛된 약속을 합니다. “주님, 우리는 당신을 섬기기 원합니다. 당신이 명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들이 자신들의 말을 행할 능력도 마음도 없었음을 증명해 줍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믿는 믿음을 그들에게서 제거해야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우리의 존귀하신 주님의 존전으로부터 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17:28). 이 말은 중단되지 않는 친교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승리를 통하여 우리는 밤낮 상관없이 어느 때나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내 삶에 그리스도를 원한다. 나의 육 전체로부터 해방되기 원한다. 나는 그분의 임재 속으로 나아가 나의 기업을 청구할 것이다. 나는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 나의 만족의 유일한 원천이 되기를 원한다.”

2010년 5월 26일 수요일

명성이 없는 곳

한 때 모세는 존경을 받았으며 정부 고위직에서 평판이 좋았으며 높은 명성과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 사이에 오갔으며 당시에 가장 잘 알려진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불타는 떨기나무로부터 그에게 말씀하셨을 때(출애굽기 3:5 참조) 모세는 제로 눈금(zero point)으로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그의 세상적인 부착물들로부터 떼어내기 전에는 그를 사용하실 수 없었습니다. 이제 누가 모세를 알겠습니까? 자취를 감춰 눈앞에서 사라지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아무런 영향력 없는 그를. 그는 자신의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할 곳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제로 눈금에 도달하는 바로 그 순간, 그의 명성을 총체적으로 잃어버렸을 때, 자기 확신에 찼던 옛 모세의 모습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거룩한 땅 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떨기나무 옆에서 영화로운 새 계시를 발하실 준비를 하시며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셨을까요? 오직 모세가 진정으로 더 이상 자신의 일이나 명성에 대해 개의치 않는 궁극적인 단절의 순간이 올 때 까지. 모세가 자기 의뢰의 마지막 자투리를 내려놓았을 때 그는 계시를 발견했습니다.

주 예수님도 이 동일한 거룩한 땅에 섰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He made himself of no reputation, KJV) 종의 형체를 가지사...”(빌립보서 2:7).

명성을 피하고 종이 되는 것은 의지적인 선택입니다. 주님이 흥하고 자신은 쇠하기를 구하며 종의 신분에 합당하게 준비되어 다시금 그 거룩한 땅으로 부름 받는 자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느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기록했습니다. “진정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사람은 결국 알려지고자 하는 생각을 포기할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면, 그의 명성은 지속적으로 쇠하고 그리스도가 흥할 것입니다. 진정한 선지자들은 무명으로 죽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죽은 후에야 그들에게 응분의 삯을 주십니다.”

우리가 더 크게, 널리 알려지는 명성을 구한다면 우리의 메시지에 뭔가 빠진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자아가 지나치게 두드러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인정 받아야하고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을 잃어가야 합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바울처럼 하나님과 함께 골방에 있게 되기까지 우리는 덜 알려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모두 쇠하기를! 그분 홀로 흥하시기를! 하나님 우리가 이 거룩한 땅

2010년 5월 25일 화요일

치유하는 고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나는 치유에 대해 믿습니다. 나는 고난에 대해 믿습니다. 나는 “치유하는 고난”을 믿습니다. 내가 그릇행하는 것을 막고 그분의 말씀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도록 만드는 고난은 치유입니다.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하나님의 가장 은혜로운 치유능력은 고난들 일 수 있습니다.

고통과 고난이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라고 다윗을 몰아댄 것이 마귀라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나는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나는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그분이 완전히 치유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계속 믿는 가운데서도 나는 하나님께 현재의 상태에 대해 감사드리고 이것이 나에게 얼마나 그분을 진실로 의지할 수 밖에 없는지를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하도록 했습니다. 다윗과 함께 나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119:71)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통과 고난이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업신여기면 안 됩니다. 그러한 괴로움이 믿음과 통찰력을 지닌 위대한 사람들을 만들어내었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벧전5:7).

바울은 자신에게 지워진 교회들의 “염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고후11:28 참조). 새로 태어난 교회는 모두 그의 어깨에 지워진 또 하나의 “염려”였습니다. 교구가 성장하고 확장되고 연장되는 것들은 항상 새로운 염려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어깨가 넓어야합니다. 수많은 염려와 책임들의 도전앞에서 감히 움츠러들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셔서 밟도록 하시는 새로운 믿음의 단계마다 수많은 새로운 염려와 문제들이 야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신뢰하여 맡길 수 있는 염려거리가 어느 정도 되는 지 정확히 알고계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건강이나 기력을 상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추수할 것은 너무 많고 자원하는 일꾼이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에게서는 거두어져서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당신이 지고 있는 염려의 짐 덩어리를 잊어버리십시오. 우리는 그것들 모두를 그분께 맡길 수 있지 않습니까?

모든 새로운 축복은 염려 일가와 친척입니다. 이들을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당신이 염려와 함께 사는 것을 배우기 전 까지는 축복과 함께 사는 것을 배울 수 없습니다.

2010년 5월 24일 월요일

나병이 노출되는 곳

모세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초자연적으로 부름 받았으며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계시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백성들의 죄에 대해 슬퍼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알 수 없었던 인도하심을 알도록 허락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자기 자신의 품에 있던 나병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출애굽기 4:6).

자기 품에 손을 넣어 나병을 만지다니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요! 육의 극심한 부패상을 보여주는 얼마나 생생한 실물 교훈인지요! 하나님이 모세에게 마술을 약간 부리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배워야만 하는 강력한 교훈이었습니다. 그분의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자아가 지배하고 있을 때 너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나의 사역에 비난을 야기하게 된다. 네가 나의 일을 멋지게 육적인 방법으로 하려고 할 때 너는 생명을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사망을 사역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언하고 계십니다. “나는 애굽에서 나온 옛 성품을 사용할 수 없다. 그것은 변형될 수 없으며 앞으로도 항상 나병에 걸려있을 것이다. 새사람, 스스로 있는 자의 영광과 능력에 사로잡힌 자가 있어야만 한다.”

모세는 나병에 걸린 손을 다시 그의 품에 넣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출애굽기 4:7).

손을 내미는 것은 사역을 상징합니다. 나병은 죄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은밀하고, 노출되지 않고, 버려지지 않은 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거룩한 땅에 서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그의 속 영혼이 노출됩니다. 가장 깊숙이 감추어진 죄들이 그의 눈앞에서 빛으로 나오게 되고 그는 치유와 회복을 위해 그리스도의 온화하신 자비를 향해 이끌려 갑니다.

그 두 번째 성결케 하시는 손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씻음의 순간, 그 때 믿음으로 옛 육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사역의 손길이 정화되며- 다시 한 번 우리가 합당한 육- 그분의 육으로 옷 입혀집니다.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씻김 받는 가운데 우리가 기뻐할 수 있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2010년 5월 21일 금요일

거룩한 땅

모세가 양을 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으로부터 그를 부르시고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발에서 신을 벗으라”(출애굽기 3:5).

거룩한 땅은 물질적인 장소가 아니라 영적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가 선 곳이 거룩한 땅이므로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분은 가로 2 피트, 세로 4 피트 면적의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영적 상태에 관해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거룩한 땅에 거룩한 사람을 두셔야만 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거룩한 곳에 세우기 전 까지는 그를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그 땅은 거룩했습니다! 어떤 땅 말씀입니까? 그 땅은 모세가 마침내 다다른 영적 상태, 즉 하나님이 그와 말씀이 통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자리입니다. 그는 수용하고, 경청할 준비가 되고, 거룩한 하나님의 다루심에 기꺼이 응할 만큼 성숙한 자리에 마침내 이르렀습니다.

모세가 거룩한 땅에 홀로 있었다고는 잠시라도 생각지 마십시오. 이스라엘 전체가 비록 그들의 소망이 거의 끊어진 상태이긴 했으나 그곳에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모세가 자비로운 지도자로 성숙할 시간을 주기 위해 전 민족을 노예상태로 머무르게 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을 차별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 사십년 동안에 하나님은 모세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사랑의 심판이란 방법으로 주님은 이스라엘을 거룩한 땅- 여호와에 대한 갈급함으로 돌이키고 계셨습니다.

모세가 그의 모든 권리가 벗겨지며 -신을 벗는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산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은 모든 인간적인 힘이 제거되며 계곡에 있었습니다. 모세는 아무 권리도 없었으며 이스라엘은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자신을 강력하게 증명하실 수 없었습니다. 위대한 스스로 있는 자가 계시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쓰임 받음으로 나아가는 동일한 길을 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자존심과 자신감을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2010년 5월 20일 목요일

디모데들은 어디에?

바울이 맨처음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진리를 소개한 것은 빌립보의 교인들이었습니다. 그가 로마에서 투옥되어 있을 때 그들에게 이 서신을 썼습니다.

바울이 예수님과 그분의 교회의 종이 되기 위해 자신의 명성을 내던지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있다고 선언한 곳은 감방 안 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빌2:19).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부터 나온 생각이고 외부로 드러나는 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감옥에 앉아 있는 목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안위나 어려운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자신의 사람들의 영적, 육적 상황에 대해서만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양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영적으로 육신으로 모두 평안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내가 안위를 받는다. 그래서 나를 대신해서 너희 안부를 알기 위해 디모데를 보낸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이렇게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2:20) 얼마나 슬픈 말입니까! 바울이 이것을 쓸 당시 로마에서 그의 주변 교회들은 성장하고 복을 받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로마 교회에는 경건한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와 같이 나눌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2:21). 명백하게도 로마에는 종의 마음을 가진, 자신의 명성을 내던지고 산제물이 된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그 대신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데 마음을 쏟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빌립보로 가서 그 믿음 공동체의 진정한 종이 될 만하다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말은 완곡하게 표현 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만을 위해 일한다. 이 사역자들은 그들의 유익만을 구한다. 그래서 디모데 외에는 너희의 필요와 상처를 진심으로 돌보아줄 것이라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우리의 기도는 이래야만 할 것입니다. “주님, 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염려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내 길은 당신의 손이 붙들고 계심을 압니다. 주님 저에게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생각, 당신의 염려를 주십시오. 당신과 같은 종의 마음을 갖기 원합니다.” 아멘.

2010년 5월 19일 수요일

원망이나 불평하지 않도록 우리를 도우소서

이것은 요즘 내가 매일 드리는 기도입니다. 두려움이 확산되고 불확실이 도처에 넘칠 때에 성령께서 원망과 불평은 인내하지 못하고 우리의 신실한 주님을 불신하는 표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출애굽기 17장에서 모세는 원망을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이라 칭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불신하는 의심이 진영 전체에 퍼졌습니다! 백성들은 지난 날 곤궁에서 구원받았던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다시금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지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왜 애굽에서 인도해내셨습니까? 이곳으로 인도해 내셔서 죽게 하느니 왜 차라리 그곳에서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까?”

그들은 모세에게 돌을 던질 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큰 긍휼을 베푸사 반석에서 물을 내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곳을 맛사와 므리바, 즉 원망과 불평이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앞으로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는 장소가 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시련이 너무 고통스럽고 어렵기 때문에 불평하고 원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이같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출애굽기 17장을 되풀이해서 읽었을 때 “하나님이 이 사안을 매우 심각하게 여기신다,”는 주님에 대한 경외심이 내 영혼을 붙들었습니다.

그분은 지난 날 수없이 우리를 도우셨고 매 번 자신의 신실하심을 증명하셨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되어야 우리가 그분을 온전히 신뢰할 것인가 입니다. 언제나 되어야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지키시고 사랑하시고 아버지와 보호자가 되실 것이라는 그분의 약속을 온전히 믿을 것입니까?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당신에게 부탁합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믿음을 든든히 붙드는 모든 사람이 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닥칠 시험의 시기에 내가 이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도록 도우소서.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영광으로 귀결되는지 당신이 알 수 있다면 당신은 그분의 말씀 안에서 안식할 것입니다.

2010년 5월 18일 화요일

은혜의 법 아래

탕자에게는 사도 바울이 “마음이 새롭게 됨”이라고 불렀던 것이 필요했습니다. 나는 탕자의 비유에서 이 구절을 읽기 좋아합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15:22-23).

탕자는 비난을 받아야한다는 마음이 있었고 이것은 사탄이 넣어준 마음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같은 일들이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일어납니다. 우리 아버지는 사랑하는 팔로 우리를 껴안으시며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한데 우리는 그분의 사랑의 표현을 신뢰하기 보다는 우리의 과거 죄를 파헤치며 하나님께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는 자들이었는지 고하는 것이 겸손인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늘 죄의식으로 팽배하여 “하나님은 나에게 진노하실 수 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 보다 내가 더 악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종들이 가장 좋은 옷을 내어다가 아들에게 입힌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의로 입힌것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의 손가락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는 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에 발에 신발을 신겨주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평안의 복음으로 신기운 것을 상징합니다. 이 사랑하는 아버지는 그의 자녀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를 기쁘게 하려는 자기노력과 같은 조각 조각난 육의 누더기들을 버려라. 내가 너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보여주마. 너는 나의 집과 나의 존전에 새로운, 왕과 같은, 왕족 자녀로 들어오고 있다. 거지나 노예로서가 아니라 나를 기쁘게 하는 나의 아들로 들어오는 것이다! 자, 담대하게 확신을 가지고 들어오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자신의 임재 가운데로 받아들이시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19-20, 22 저자 임의 강조).

여기서 “담력”이란 말은 “해방된 노예”를 의미하는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의 법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아버지의 사랑에 의해, 오직 그분의 은혜로, 우리가 그분의 존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그 자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자격을 주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1:12-13 이탤릭체 부분 저자 임의 삽입).

2010년 5월 17일 월요일

하나님은 당신을 통찰하실 수 있습니다

이 종말의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통찰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까?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고 필요를 채우기 위해 요구되는 모든 것을 그분이 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까?”

이것은 우리 주님이 자비와 치유를 구하던 두 명의 맹인에게 물으셨던 것과 동일한 질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그 눈들이 밝아진지라”(마태복은 9:28-30).

주님은 당신과 나 그리고 교회에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를 지시하고 인도하고 너희 삶속에 나의 완전한 뜻을 행할 수 있다고 믿느냐? 내가 너희를 위해 여전히 일하고 있다고 믿느냐? 아니면 내가 너희를 버리고 실망시켰다는 은밀한 생각을 품고 있느냐?”그분은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던 것과 동일한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한복음 11:40).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그분을 위해 무언가 위대한 일을 하는 것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도리어 간절히 우리가 단순히 그분을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께 온전히 의뢰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의 소유를 원치 않으십니다. 당신의 집, 땅, 자동차, 또 다른 어떤 세상의 소유물이라도 노리지 않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신뢰를 원하십니다! 당신이 그분에 대한 확신으로 확고히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독일에 주둔한 어느 미군 병사가 내게 자신의 우상이라고 부르는 동전 소장품을 보내주겠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답장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동전 소장품 보다 더 한 것을 원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신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무슨 일을 하고, 무언가 포기하고, 희생하고, 일하고, 고통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시종 그분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순종과 신뢰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명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 그 자체를 기뻐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 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6).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기도는 들으신바 되었고 하나님은 그분의 완벽한 뜻에 따라 해결하실 것입니다. 참고 기다리십시오!

2010년 5월 14일 금요일

그분의 목전에 존귀함

나는 내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고통스러울 때, 즉시 내게 전화해라. 내가 가겠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이 갈 것이다.” 나는 단지 세상의 아버지 일뿐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더 잘 돌보시겠습니까? 우리가 부를 때 응답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시편 72:12-14).

하나님이 “모든 가난한 자, 모든 어려움에 처한 자, 도움이 없는 듯 보이는 자 모두- 원수가 공격하고 있었느니라. 너희의 그 피가 내게 소중한 것을 모르느냐? 너희는 부르짖기만 하라 그러면 내가 사탄의 계략에서 너희를 구원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말했습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구원하셨도다”(시편 34:6).

종교적 용어를 많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단 한 가지 알아야만 할 것은 당신이 무엇을 하였든지, 얼마나 사악했었든지 상관없이, 회개하는 그분의 사람들은 그분의 목전에 언제나 존귀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말씀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요한계시록 3:20).

왜 그분이 문을 두드리십니까? 당신의 생명이 소중하고 그분이 당신을 놓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좌지우지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만 계속해서 오셔서 당신의 마음에 말씀하실 것입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즉시 나를 불러라,” 그분이 속삭이십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정죄하고 비하하던 교회에 다녔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겉모습만 보고 당신을 판단했던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잠재력을 보십니다. 그분은 먼지와 오물과 재 대신에 기쁨과 아름다움을 당신에게 주실 것입니다. 당신을 자유롭게 풀어주실 것입니다!

2010년 5월 13일 목요일

새 사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그분의 말씀대로 믿고 그분이 우리가 어떤 존재라고 하시는 말씀을 진리로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옛사람”은 아직도 육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지칭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거스르기를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양심이 늘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 문제를 극복하려고 다짐합니다. “나는 변화될 것이다! 오늘부터 얼마만한 대가를 치르든지 나를 괴롭히는 죄와 싸울 것이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 하나님이 봐주시면 좋겠다.”

이러한 사람은 많은 땀과 허다한 눈물을 들고 주님께 나옵니다. 하나님께 자신이 선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기도하고 금식합니다. 그는 한 번에 며칠 씩 죄를 이겨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틀을 성공했으니 나흘도 가능할거야. 일주일은 왜 안되겠어?” 한 달이 끝날 무렵이 되면 스스로 노력하여 자유하게 되었다고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자 그의 옛 죄가 떠오르고 그는 낙심하고 절망에 깊이 빠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이클이 또 다시 시작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내려 오지도 못하고 끝없이 뛰어야하는 러닝머신에 올라서 있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게 되지 않기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육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진실로 바울은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사망선고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옛사람을 자신과 함께 무덤으로 데려가시고 그곳에서 그는 죽은 채로 잊혀졌습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그의 아들안의 “옛사람”을 무시해 버렸듯이 주님도 우리의 옛사람에 대해 “나는 그러한 자를 알지도 못하고 상대하지도 않는다. 내가 현재 인정하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고 그 사람과 상대할 것이다. 그는 바로 내 아들 예수이고 믿음으로 그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다.”

새 사람은 육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소망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육의 예습관에 죽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길이 오직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인정하시는 이가 오직 한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 그리스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이 새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믿기에 다른 어느 것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충족하신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것에 대한 자신의 원천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 대해 하신 말씀을 믿습니다. “네 옛사람은 죽었고 네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춰져있다.” 아마 그는 이것을 완전히 느끼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사랑하는 아버지의 말씀에 대해 논쟁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분의 말씀에 신실하시다는 것을 믿으며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2010년 5월 12일 수요일

순종이 수문을 엽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분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그분 앞에 놓인 즐거움으로 인해 인내하고 자신의 천부에게 순종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인내로 경주했습니다. 수치를 견뎌내고 마음으로 결코 나약해지거나 지치지 않았습니다. 순종의 영광스러운 보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내적 소요에 지칠 만큼 지쳐서 그리스도안에서 약속된 영화로운 부요를 갈구하기 시작해야하지 않을까요? 두려움은 순종을 향한 최고의 동기가 아닙니다. 사랑이 그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주신 위협은 결국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시당했습니다. 귀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과 그분의 두려운 천둥소리조차도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 송아지 주위를 돌며 춤추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깊고 내주하는 사랑과 존경만이 그러한 불순종으로부터 그들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하늘을 우리에게 열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즐거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 모든 불순종의 행위를 내어드리는 것이 그리스도가 진정 어떤 분인가에 대한 계시를 우리에게 허락해 줍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 3:6).

우리가 불순종가운데 살아감으로써 그분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은 아닐까요? 그리스도, 그분이 죄를 미워하심, 그리고 그분의 영광과 자비에 대한 계시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방식대로 사는 것이 아닐까요? 쉽게 말하자면 “불순종 가운데 사는 자는 현실에서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한복음 14:21).

사랑하여 순종하는데 대한 보상으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것 보다 우리가 원하는 더 큰 보상이 있겠습니까? 그토록 큰 계시에 대한 공식이 얼마나 단순한지요! “나에게 순종할 만큼 나를 사랑하여라. 나도 너를 사랑하여 내가 누구인지 너에게 보여주리라!” 당신은 그분에 대해 모두 읽을 수 있고, 그분의 성품, 역사적 배경을 연구할 수 있지만 모든 일에서 그분께 완전히 순종하는 그처럼 단순하고 기본적인 일을 행할 때 까지는 그분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하늘이 열리고....보리라”(요한복음 1:47, 51).

우리가 항복하고 절대 순종에 우리 자신들을 맡기는 순간, 우리 속사람 안에서 경이로운 치유 능력이 풀려나옵니다. 하나님이나, 지옥,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더 이상 없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이상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영이 새로운 빛, 새로운 소망, 큰 기쁨, 영광스러운 평강과 풍성한 믿음으로 우리에게 넘치기 시작할 것입니다.

2010년 5월 11일 화요일

하나님을 시험함?

예수님의 성전 꼭대기에 섰을 때 사탄이 그분께 속삭였습니다. “자, 뛰어내려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분이 너를 구해줄 것이다.”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4:6).

여기서 사탄의 교활함이 보이십니까? 그는 성경의 약속 중에서 하나를 떼어내어 예수님께 그분의 전 생애를 그 약속에 던지라고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제안 하는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내게 증명해 보여라. 너의 아버지는 이미 나에게 너를 성가시게 하도록 허락하셨다. 거기에 그분의 임재가 어디 있느냐? 너는 지금 당장 뛰어내려서 그분이 너와 함께 하시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면 그분이 네가 사뿐히 내려앉게 하실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네 자신감의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네가 홀로 있는지 의아해하며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아버지가 너와 같이 계신 것을 증명하려면 너는 기적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어떻게 응답 하셨습니까?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4:7).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다”라는 말을 정확히 무슨 의미로 쓰셨을까요?

고대 이스라엘은 하나의 표본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신실하시다는 것을 열 번이나 중명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주님이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 증거를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매번 이 백성은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안계신가?” 하나님은 이것을 가리켜 “그분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사탄에게 대답하면서 바로 같은 구절 “하나님을 시험하다”를 인용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의심하는 것은 심각한 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지 의문을 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였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이미 모든 증거를 주셨습니다. 첫째, 그분의 말씀에 우리와 가까이 계시겠다는 수많은 약속이 있습니다. 둘째, 우리에게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역사가 있습니다. 지나온 우리의 삶 동안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신 간증들이 많이 있습니다. 셋째, 과거 수세기동안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증인들로 가득한 성경이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불신에 빠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마지막 부으심

내가 지금 하려는 말을 어떤 이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압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나는 요엘서에 예언된 성령의 부으심의 영광과 충만함을 우리가 이미 보았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본 것은 그저 소량이 뿌려진 것에 불과합니다. 세계적으로 성령 회복 운동이 일어났고 사랑이 많은 사람들을 화해시켰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에 걸쳐 체험한 일이지만 아직은 맛보기 일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계획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것은 어느 것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불시에 원수가 끼어듭니다. 교회가 사탄의 홍수로 인해 물에 잠길 것처럼 보이는 찰나에 성령은 기준을 높이실 것입니다. 그 기준이 무엇인지 이해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려고 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 기준은 순결하고 더럽혀지지 않고 세상에 만연한 부패에서 구원받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 기준은 새로운 품종의 성화된 크리스천들로서 사악하고 변태적인 세대 가운데서 빛처럼 빛날 것입니다. 단지 사랑과 찬양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향한 거룩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외침과 찬양이 있겠지만 그것은 마지막 부으심의 목적을 성취하는, 죄와 타협에 대한 승리의 외침일 것입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요엘 2:32).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입니까?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세상의 영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세례 받은 백성들이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완전히 분리할 때 까지는 성령의 충만하게 부으심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분리와 마음의 순결을 강조해야만 합니다. 성령 강림의 목적은 주님의 재림을 위해 백성을 성결케 하고 예비하는 것입니다. 점도 없고 주름 잡힌 것도 없는 백성으로.

성령의 충만한 부으심이 모든 육체에게 임할 때, 죄에 대한 찔림이 도처에 있을 것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한복음 16:8). 그것이 성령의 부으심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지만 악마처럼 사는 비극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죄가 결코 뿌리 뽑히지 않았고 그들이 받은 것은 황홀경에 대한 체험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은 거룩과 순종의 심도 깊은 삶으로 그들을 부르시기에 충분한 만큼만 그들에게 복을 주셨는데 그들은 멈춰버렸고 “나는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며 다녔습니다.

참으로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언어로 기도하는 특권으로 인해 나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것은 내 이해를 초월하는 교제 가운데 눌려있던 모든 찬양을 하나님께 풀어놓아드리는 나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사람들의 말들이나, 천사들의 말로라도 말할 수 있다 해도 자애로운 마음이 없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받지 않은 것입니다. 이보다도 더 깊이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 영혼의 감추어진 모든 부분이 드러나고 모든 죄가 고백되고 버려지기 까지는 당신은 진정으로 성령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2010년 5월 7일 금요일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

구약은 다음과 같은 영광스러운 예언으로 마무리됩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라기 4:5-6).

예수님은 요한에 대해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 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사람이니라”(마태복음 111:1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에게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이 있다. 너희가 그것을 볼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우리는 주님의 천사가 사가랴에게 그의 아들 요한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고 예언했던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말라기의 예언이 또한 오늘을 위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은 자신이 택하신 수많은 종들에게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 하나님의 사람들은 가족들의 회복을 일으키기 위해 강력하게 쓰임 받을 것입니다. 이혼들이 취소될 것입니다! 자녀들은 자신의 반항에 찔림을 받아 그들의 부모들에 대한 사랑이 회복될 것입니다.

이 예언은 지금 당장 우리 눈앞에서 성취되고 있습니다. 텍사스 한 마을에서 어느 얌전한 젊은 목사가 그 지역 학교에 있는 아이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엘리야의 역동적인 심령과 능력을 기름 부으셔서 그의 지역학교의 수 백 명이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가는 곳마다 회복이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수 백 명이 아니라 수 천 명의 고등학생들이 마약, 알코올, 섹스, 반항에 대해 찔림을 받았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부모와 화해하기 위해 집회에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들은 뿌리 깊은 증오심을 고백해왔었으나 이제는 통곡하며 회개합니다. 이는 전국으로 퍼져 나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모와 자녀들을 회복시킬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다가오는 일을 보기 때문에 나는 아주 흥분됩니다! 너무 흥분되어 이 글을 쓸 수 없을 지경입니다. 무명의, 얌전하며 겸손한 하나님의 젊은 남녀들이 기적적으로 감동받으며 기름부음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가서 회복시켜라! 주의 날이 왔기 때문이다. 마약과 알코올 같은 해충은 더 이상 젊은이들의 삶을 갉아먹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해충들을 파멸시키실 것이다.”

2010년 5월 6일 목요일

우리를 이끌어 들이기 위해 이끌어 내셨다

십자가 사건이 이전에는 일반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없었고 다만 대제사장만이 지성소에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아버지의 존전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오직 그분의 은혜로 하나님은 우리와 자신의 임재를 가로 막고 있던 벽을 허물어버렸습니다. 이제 그분은 인간에게 오셔서 자신의 탕자들과 온갖 죄인들을 품으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기적적인 구원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른 땅을 밟으며 홍해를 건널 때 그들의 뒤에서 파도가 대적위에 부서져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순간이었고 그들은 힘찬 찬양제를 열고 춤추고 노래하며 감사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얻었다! 하나님이 압제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해 내셨다.”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속박과 죄의식으로부터의 구원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사탄이 십자가에서 패배한 것을 알고 있으며 그 즉시 우리는 그의 강철 같은 손아귀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시고 구원하신 것에는 그 이상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이 홍해 건너편 승리한 그 지점에 장막을 치고 머물러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그분의 더 큰 목적은 가나안, 즉 그분의 충만한 땅으로 이끌어 들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분의 마음 안으로, 그분의 사랑 안으로 영접해 들이기 위해서 그들을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자비, 은혜, 사랑에 온전히 의지하는 백성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자신의 백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며칠이 안되어 이스라엘에 첫 번째 시험이 닥쳤습니다. 그들은 불평하고 원망하며 완전히 불만에 싸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 교훈의 열쇠는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구원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알기 전 까지는... 당신과 교제하며 느끼는 그분의 마음의 기쁨을 깨닫기 전 까지는... 십자가에서 모든 장벽이 제거된 것을 보기 전 까지는... 당신 과거의 모든 것이 판단 받고 지워져 버린 것을 알게 되기 전 까지는... 당신은 기쁨과 평강안으로 들어올 수 없을 뿐 아니라 진실로 주님을 어떻게 섬기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계속 전진하기를 원한다. 나의 존전 안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는 충만함 속으로!”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십자가의 유익을 누리며 기뻐합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와 홍해의 시련을 넘어 “승리한 쪽”에 서 있습니다. 자유를 누리며 그들의 압제자를 바다에 던져버린 하나님께 계속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바로 이 믿는 자들 중에서 다수가 하나님의 더욱 위대한 목적과 그들을 위한 유익을 놓치고 있습니다. 주님이 왜 그들을 불러내었는지에 대해 놓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 자신에게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서입니다.

2010년 5월 5일 수요일

회복

이방인의 때는 거의 끝나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이 영원히 반역하는 자들과 싸우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러 번 경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세대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 하에 들어가기 전에 커다란 회복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주리니”(요엘 2:25).

시편 기자 다윗은 의인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시편 1:3 참조). 그러나 이 약속은 오직 자신을 악인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한자들, 그리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한 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학생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라고 다윗은 말했습니다(4절). 그들은 쇠약해지고 시들어 바람이 불때마다 그리고 교리의 파동이 있을 때 마다 이리저리 날릴 것입니다. 타협하는 자들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병충해를 입고 썩어버린 시든 나무로 비유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는 수많은 입교 크리스천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성경읽기를 게을리 합니다. 그들은 기도하는 것과 믿음 안에 스스로를 세워가는 것에 지나치게 열중합니다. 그들은 경건치 않은 자들과 편안하게 지내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습니다.

한 떼의 해충이 타락한 다수의 크리스천들의 삶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외관상으로는 물가에 심긴 나무같이 보이나 내적으로 그들은 타락하고 쇠약하며 병들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말라가고 있습니다. 해충이 나무껍질에 해를 끼쳤습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임재로부터 멀어진 자들 속으로 깊숙이 먹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거대한 회복을 어떻게 일으키실 것인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그분의 성령을 풍성하게 부으셔서 그분의 숲속에 있는 모든 나무들이 건강과 힘을 되찾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금 성경을 읽을 때 죄의 벌레들은 기운을 잃기 시작할 것입니다. 주님의 새 언약에 대한 강력한 계시가 하나님의 백성을 사자와 같이 담대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으십시오. 영적인 힘과 신성의 건강을 되찾는 부흥이 위로부터 퍼부어질 것입니다.

2010년 5월 4일 화요일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갈 담대함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참마음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19-10, 22).

갈보리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한 면은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한 면은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는 죄인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 측면에서 본 유익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진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속박을 이기는 능력과 죄를 지배하는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자비와 은혜를 공급받았습니다. 그리고 물론 영생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죄와 지옥의 공포로부터 탈출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나는 인간에게 이러한 십자가의 유익과 그에 따른 안도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 사실이 전 세계에 걸쳐 교회에서 매 주 마다 선포되기에 나는 기뻐합니다.

헌데 십자가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유익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인하여 가능해진 아버지의 기쁨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분이 돌아온 탕자를 집으로 맞아들일 때 마다 느끼는 기쁨 말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초점이 모두 용서에 맞추어진다면, 우리가 선포하는 것의 대단원이라면, 십자가에 대해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중요한 진리를 놓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좀더 온전한 이해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바로 그분의 기쁨에 대한 것입니다. 이 진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단순한 안도감을 훨씬 초월하는 것을 공급할 것입니다. 자유, 안식, 평강과 기쁨을 줄 것입니다.

나의 견해로는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용서를 구하며, 필요를 채우기 위해, 기도의 응답을 받기위해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믿음의 측면에서 볼 때 담력이 부족합니다. 이것은 주님과의 동행에서 똑같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면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인해 우리가 그분께로 나아갈 길이 열렸기에 대단히 기뻐하십니다. 진실로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웠던 순간은 바로 그리스도가 돌아가시던 날에 성전 휘장이 둘로 갈라졌던 때입니다. 바로 이 순간 하나님에 대한 유익이 터져 나왔습니다. 인간과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갈라놓았던 성전의 휘장이 찢겨진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시점 이후 인간이 주님의 존전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인간에게 오실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2010년 5월 3일 월요일

전적인 포기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로마서 3:21-24).

하나님은 그분이 보시기에 절대적으로 거룩하고 완벽해 질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셨습니다. 그에 따르면 그분의 자녀들은 모두 하나님이 그들을 거룩하고 순전하게 보신다는 것을 알므로 절대적인 평강과 기쁨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값없이 받는 은사입니다!

그분이 주시는 거룩의 은사는 결코 우리가 행한 것에 대한 보상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하여 얻은 것이 아니요, 받을 자격이 없는데 받은 호의, 즉 명백한 선물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로마서 4:3-5).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에 순종하는 순종이 하나님의 거룩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당신의 의지력을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의지력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힘은 그분의 것이며 그분은 자신의 것 외에는 어떤 힘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이 명령으로 인해 겸손해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비참하게 실패하여 무릎을 꿇고 “소망이 없습니다. 나는 결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나는 연약하고 감각적이며 죄가 많습니다. 내안에는 선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부르짖으며 그분의 보좌로 달려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분은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것을 지켜보십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회개는 우리의 헛된 노력의 약함을 고백하는 것과 우리 자신 안에 조금이라도 어떤 능력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벌거벗고, 가난하고, 가엾고, 약하고, 완전히 의지할 곳 없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릴 때 까지는 절대로 그리스도의 거룩으로 옷 입혀 질 수 없습니다. 당신은 죄를 저항할 능력이 없으며 주님께 드릴 것이라고는 산산이 부서지고 실패하고 무력한 흙덩이 뿐이라고 단호하게 인정해야만 합니다. 도움을 받는다 해도 당신은 거룩할 수 없다고 인정해야만 합니다. 당신은 거룩을 선물로 받아야만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그분이 당신에게 그분의 거룩을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사야는 크게 기뻐했습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주 여호와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이사야 61: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