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31일 금요일

예배자 만들기

출애굽기 14장은 이스라엘의 역사상 놀라운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지휘 하에 애굽을 막 떠난 참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바로의 군대에게 다급히 쫓기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면이 가파른 산들로 둘러싸인 계곡으로 인도되었고 그들의 앞에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바다가 놓여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까지는 모르고 있었으나 이 백성들은 그들의 영혼의 가장 어둡고 폭풍이 휘몰아치는 밤을 곧 체험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마지막 한계까지 시험할 공포와 절망의 고뇌에 찬 밤을 직면했습니다.

나는 이 구절이 온전히 하나님이 어떻게 그분의 백성을 예배자로 만드시는지에 관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진정으로 성경의 다른 어느 장도 이것을 더욱 강력하게 제시하지 못합니다. 아시다시피 예배자들은 부흥회에서나 순조롭고 해가 쨍쨍할 때 또는 승리하고 건강할 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예배자는 캄캄하고 폭풍이 불어대는 밤에 만들어집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폭풍에 어떻게 대응하는 가에 따라 우리가 어떤 유형의 예배자인지 결정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노년의 야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11:21). 임종 무렵의 야곱은 왜 이렇게 묘사되었을까요?

야곱은 자신의 생애가 끝나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손자들에게 축복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야곱은 자신의 생애에 일어났던 일들을 회고하며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는 예배로 옮겨갔습니다. 이 사람에게서는 한 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지팡이에 의지하였을 때,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삶에 대해 경이로워하며, 그는 “경배하였”습니다.

야곱은 그 순간 자신의 영혼이 안식하였기에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이제 이 족장은 결론지었습니다. “내가 어떤 전투를 통과했든지 중요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신이 신실하시다는 것을 나에게 증명하셨다. 그분은 항상 신실하셨다. 오, 주님, 전능하신 하나님, 당신을 경배합니다.”

2010년 12월 30일 목요일

작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부활에 앞서 짧은 기간의 고난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죽습니다! 또 실제로 고난도 당합니다! 고통과 슬픔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하거나 상처를 입기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고통 없는 구원, 초자연적인 개입을 원합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나는 약하고 항상 약할 것이니 하나님이 하십시오. 내가 초자연적 구원을 기다리며 나의 길을 가는 동안 다 해주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문제들을 귀신들의 탓으로 돌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 그가 귀신을 내쫓아서 우리가 아무런 고통이나 고난 없이 우리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 되었다! 평화로운 승리의 인생에 순풍을 타고 도달하기 원합니다. 우리는 누군가 우리에게 안수하여 모든 메마름을 쫓아버리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승리는 항상 고난과 아픔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죄를 보십시오. 그것을 직면하십시오. 예수님이 하셨듯이 고투하며 통과하십시오. 그분의 고난으로 들어가십시오. 고난으로 한 밤을 지나지만 다음날 아침 언제나 기쁨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택을 요구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전투에서 고통이나 고난 없이 우리를 초자연적으로 건져 내셨다면, 모든 시험과 모든 유혹이 중지 될 것이며 자유로운 선택이나 불같은 시험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뜻을 인류위에 강요하시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메마름 가운데서 우리를 만나고 그것이 어떻게 새로운 믿음의 인생으로 가는 길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로 선택하십니다.

우리가 메마름과 더 나아가 고통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4:19).

고난은 언제나 궁극적인 승리에 앞서 잠시 당하는 것이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꼰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2010년 12월 29일 수요일

기도 생활 유지하기

영적 메마름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는 기도 생활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하는 대로 왜 아무도 기도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분과 홀로 떨어져 있을 때 우리의 모든 짐이 벗겨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성령의 음성은 계속 기도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오라!”

영혼의 갈증을 채워 줄 물로 나아오십시오. 자신의 자녀를 불쌍히 여기시는 아버지께로 오십시오. 모든 죄를 용서한다고 약속하신 생명의 주님께로 나아오십시오. 당신을 정죄하기를, 당신을 버리기를, 당신에게서 숨어버리기를 거부하시는 그분께로 오십시오.

우리는 죄책감과 정죄감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숨으려고 할 지 모르지만 그분은 절대로 우리에게서 숨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죄를 범하고 실패했더라도 그분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오십시오. 그분은 경건한 슬픔으로 회개하는 자들을 즉시 용서해 주십니다. 당신은 후회와 죄책감에 몇 시간이나 며칠을 보내지 않아도 되고 그분의 선하신 은혜로 되돌아가기 위해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께 나아가 무릎을 꿇고 당신의 마음을 열고 당신의 고뇌와 고통에 대해 부르짖으십시오. 당신의 외로움, 고립된 느낌과, 두려움과 실패에 대해 말씀드리십시오.

우리는 기도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시도해봅니다. 책을 읽고 공식과 안내서를 찾아봅니다. 위로의 말씀이나 충고를 듣기위해 모든 곳을 찾아다니며 친구들, 목사님들, 상담자들에게 갑니다. 우리는 중재자를 찾지만 모든 것에 대한 답을 갖고 계시는 그 유일한 중재자에 대해서는 잊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홀로 떨어져 한 두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더 신속하게 메마름과 공허감을 흩어버리는 것은 없습니다. 호젓하고 은밀한 골방에서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모든 건기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내가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사44:3).

2010년 12월 28일 화요일

건기 통과하기

수천 명에게 설교를 하긴 하지만 나도 따스한 주님의 존전에서 멀리 떨어져 아주 메마르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메마르고 공허할 때 나에게는 말씀을 읽고자 하는 강한 갈망도 없고 기도하고자 하는 강박감도 거의 없습니다. 내 믿음이 상하지 않았고 예수님에 대한 나의 사랑이 강렬한 것도 알고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맛보고 싶은 욕망도 없습니다. 단지 여러 날 동안, 어쩌면 수 주일이 될 지도 모르는 동안 하나님을 접촉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동안 다른 크리스천들이 복을 받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증거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다. 당신이 주님을 사랑하긴 하지만 세상에 불을 붙이지는 못하며 단지 터벅터벅 걷고 있을 동안 그들은 행복을 체험하는 산꼭대기에 살고 있는 듯 보입니다.

나는 모든 진정으로 믿는 자들이 그들 크리스천 삶의 어느 시점에 건기를 경험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조차도 고립됨을 느껴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크게 외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지 않으면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분의 영광의 이슬이 내려야만 메마름이 멈출 수 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확신에 의해서만 절망이 사라져 버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불이 마음, 몸과 영혼을 뜨겁게 덥혀야만 합니다.

내가 최악의 죄인처럼 하찮게 느껴질 때가 있었으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나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하튼 나는 분명하고 작은 목소리가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 자녀야, 오너라. 나는 네가 겪고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결코 너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너의 아버지이고 너는 나의 자녀이니 우리가 같이 그것을 직면하자.” 나는 꺼지지 않는 불꽃을 내 안에 가지고 있고 그분이 나를 그 어떤 건기에서라도 이끌고 나오실 것을 압니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32:9-10).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사43:19-20).

2010년 12월 27일 월요일

요즘 포기하고픈 생각이 드십니까?

많은 목사님들이 주저 없이 포기해 버리는 그들의 교구민에 대해 염려하는 편지를 나에게 보냈습니다. “선량하고 정직한 크리스천들이 죄책감과 정죄감에 압도당한 나머지 절망에 빠집니다. 그들 자신의 기대감에 그들의 삶이 미치지 못할 때, 죄에 다시 빠져들 때, 그들은 포기하기로 결정합니다.....”

한계에 도달한 크리스천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멈춘다는 생각을 감히 하는 크리스천은 거의 없지만 그들은 절망에 빠져 자신들에 대해 포기하는 것을 고려합니다.

오늘날 어떤 목사님들은 단지 긍정적인 메시지만을 계속해서 설교합니다. 그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모든 크리스천들은 기적을 체험하고, 기도에 즉각적인 응답을 받으며 모두가 기분이 좋고 잘 살고 세상 전체가 눈부시고 장밋빛입니다.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그렇게 좋고 건강한 것들을 갈망하기 때문에 그런 설교를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아주 정직하고 신실한 수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패하여 포기하는 것도 의아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종교가 만들어 놓은 근심 없고, 부유하고, 성공하고, 항상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크리스천의 이미지에 맞추어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세상은 그렇게 이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슴 아픈 일,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위기들, 그리고 가족의 문제들 속에 살고 있습니다.

바울이 환난에 대해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고후1:8).

긍정적인 사고는 이러한 문제들이 떠나가도록 하지 못하고 이러한 문제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것도 사태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치료법은 무엇일까요? 나에게 큰 위로와 도움을 준 두개의 절대적인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으로부터 오로지 우리를 건져내기 원하시는 사랑하는 아버지이시다.

*그분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은 나의 믿음이다. 그분은 내가 그분을 신뢰하기 원하신다.

2010년 12월 24일 금요일

당신은 살아남을 것입니다

행복은 고통이나 상처 없이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슬픔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하루씩 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상관없이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당신은 거부당하고 내버려졌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신의 믿음은 약해지고 당신은 끝났다고 생각 할지 모릅니다. 때로 슬픔, 눈물, 고통과 공허가 당신을 삼켜 버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보좌에 계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확신시키십시오. 당신은 거기서 벗어날 것이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삶은 계속 되고 하나님이 도우시면 당신이 얼마나 견뎌낼 수 있는지에 대해 놀라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도울 수 없고 고통을 멈추게 할 수 도 없지만 우리의 복된 주님이 당신에게로 오실 것입니다. 그분이 사랑스런 손을 당신 아래 넣으시고 당신을 들어 올려 천상의 장소에 다시 앉히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구원하시고 당신에 대한 그분의 가없는 사랑을 계시하실 것입니다.

위를 쳐다보십시오! 주님 안에서 당신을 격려하십시오. 안개가 당신을 둘러싸서 당신의 딜레마로부터 빠져 나갈 길을 볼 수 없을 때 예수님의 품에 누워 그저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이 모두 하셔야만 합니다! 그분은 당신의 믿음과 신뢰를 원하십니다. 당신이 크게 부르짖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다! 그분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이 지금도 모든 것을 이루어 가고 계신다! 나는 버림 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탄의 희생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정신을 잃거나 방향을 잃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내 편이시다! 나는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은 나를 사랑하신다!”

기본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바로 이 절대적 말씀위에 안식합니다. “너를 치려고 제조된 모든 연장이 쓸모가 없을 것이라....”(사54:17).

2010년 12월 23일 목요일

하나님은 당신이 부숴 지도록 놔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얼마나 감당 할 수 있는 지 정확히 아시고 당신이 부숴 지는 지점에 이르는 것은 허용치 않으실 것이라는 점을 스스로 상기시키십시오.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최악의 신성 모독은 당신의 모든 상처와 고통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늘의 아버지가 당신을 연단하시며 당신이 그분의 복을 받을 준비가 되기 위해 한두 번 더 비통한 일을 겪을 필요가 있다고 하나님이 생각하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 징계는 잠시 동안이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인생에 혼란을 초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도 아닙니다. 믿지 않는 부인을 통해서 욥에게 상처를 주려고 했던 것처럼 원수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려고 합니다.

당신의 하늘 아버지는 눈을 깜박이시지도 않고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모든 동작을 관찰하시고 모든 눈물을 병에 담아 두십니다. 당신의 모든 상처를 감지하시고 당신이 원수로부터 괴롭힘을 분량에 찰 만큼 당한 시점을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개입하셔서 말씀하십니다, “그만 됐다!” 당신의 고통이 더 이상 당신을 주님께 더욱 가까이 이끌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영적 삶을 내리막길로 향하게 할 때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그분의 자녀가 지나친 영혼의 고통과 고뇌로 인해 침몰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정시에 당신을 전투에서 들어 올려 구해 내실 것입니다. 그분은 절대로 당신의 상처가 당신의 마음을 파괴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정시에 오셔서 당신의 눈물을 닦으시고 애통대신 희락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

2010년 12월 22일 수요일

구하는 자가 되기로 결단함

“내가....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단9:3,4, 20). 이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보십시오, 분리된 삶을 살겠다는 그들의 첫 결단은 하나님을 구하는 자가 되겠다는 두 번 째 결단으로 뒷받침되어야만 했습니다. 진정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그러한 삶을 인도하시는 능력과 권위를 위해 하나님을 구하며 오랜 시간 무릎 꿇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 신실한 기도가 당신을 위기로부터 면제시켜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당신을 불이 이글거리는 용광로와 사자 굴로 데려갈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기도는 신뢰하며 이 모든 것을 직면할 수 있도록 당신을 준비시켜 줄 것입니다 - 예수님을 위하여 산 제물이 되도록!

다니엘의 기도는 그를 즉각 사자 굴로 인도 했습니다. 이번 시험은 이 히브리소년들이 시험을 겪은 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다가왔습니다. 이때 다니엘은 80대였습니다! 얼마나 세월이 지나야 시험을 겪지 않을까 궁금하다면 아마 이 사실이 당신을 두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얼마간 세월을 지낸 후에 당신은 아마 모든 “중요한” 시험을 거쳤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한데, 여기서 하나님은 조용하고 온유한 영의 사람, 그분의 가장 위대한 기도 용사 중 한사람에게, 그가 수 십 년간 신실한 중보기도의 시간을 보낸 후 그의 일생일대의 위기를 직면하도록 허락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오실 때, 또는 당신이 그리스도안에서 죽을 때, 오직 그 때에만 시험이 그칩니다. 기도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은 더럽혀지지 않은 삶을 살겠다고 결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단은 또한 하나님을 구하겠다는 결단 없이는 실행에 옮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2010년 12월 21일 화요일

사악함 가운데서 더럽혀지지 않음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1:8).

여기서 더럽히다 라는 말은 “절연을 통해 자유함”이란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니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기준을 조금이라도 타협하는 것은 내게서 자유를 앗아간다!” 그리하여 다니엘은 열흘 동안 오직 콩만 먹고 물만 마시기로 결단했습니다. 그가 환관장에게 이것을 고했을 때 환관장은, “너 때문에 내가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열흘 후에 너는 병색이 돌 것이다. 네 뺨은 꺼지고 왕께서 분명히 알아차릴 것이다. 자, 고기를 조금만 먹어라. 너는 단백질이 필요하다. 혈색이 돌도록 포도주를 마셔라. 기운을 차리도록 단것도 좀 먹어라!”

나는 다니엘과 세 명의 히브리인들이 제사로 인해 더럽혀진 음식을 피하려고 했던 것 보다 더욱 큰 의도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다른 수 천 명의 조국 사람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들이 보았던 장면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충격이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말할 수 없이 느슨하고, 부도덕하고 저주로 가득 찬 사회였기에 이 네 사람의 영적 민감성이 습격당했습니다.

그래서 이 네 사람은 결단하였습니다. 서로에게 “우리는 감히 타협해서는 안 된다. 이 도덕 기준을 감히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분리하여 우리 믿음의 여정 안에서 훈련받을 것이다!”

이 네 사람은 그들의 삶의 방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며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그들과 하나님사이의 일이었습니다.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당신은, “주님, 내가 당신이 필요 할 때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당신은 나를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부르짖습니까?

그 런데 주님이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어떡하시겠습니까? “내가 목소리를 필요로 할 때 너는 어디 있느냐? 나는 이 죄가 만연한 시대에 내가 말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순수한 그릇, 목소리가 필요하다. 너는 네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내가 와주기를 원한다고 한다 하지만 너는 여전히 사악하고 세상적인 체제의 일부이다. 나에게 말해다오, 너는 내 목적에 헌신 되어 있느냐?”

2010년 12월 20일 월요일

교회는 회개로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교회는 회개로 시작했습니다. 오순절에 베드로가 십자가에 대해 설교하자 수 천명의 사람이 그리스도께 왔습니다. 이 새로운 교회는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차고 모든 인종으로 구성된 한 몸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조직의 생명은 복음 전도, 희생정신, 나아가 순교에 까지 이르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 놀라운 시작은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반영해 줍니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렘2:21). 그런데 주님의 다음 말씀은 그 하신 일에 종종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2:21).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올바르게 심었다. 너는 내 이름과 성품은 지닌 나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너는 타락해 버렸다.”

무엇이 교회 안의 타락을 야기했습니까?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인데,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실 때 우상숭배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2:11).

오늘날 대부분 기독교의 가르침은 우상을 하나님의 백성과 그분 자신 사이에 끼어드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만 우상숭배의 부분적 묘사에 불과합니다.

우상숭배는 더욱 깊은 마음의 문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가운데서 첫 번째 우상은 간음, 음란물, 또는 알코올이 아닙니다. 그것은 더욱 더 강력한 정욕입니다. 이 우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공을 향해 쫓기는 야망입니다. 이것을 합리화하는 교리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성공이라는 우상숭배는 오늘날 하나님의 집의 많은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올바르고 도덕적으로 깨끗하며 선행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속에 야망의 우상을 세워놓았고 그로부터 요지부동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복주시기를 좋아하십니다. 그분의 백성이 정직하게 일하는 모든 일에서 성공하기 원하십니다. 하지만 많은 무리들을 덮치는 격렬한 영이 지금 이 땅에 있습니다. 그것은 인정받기 좋아하고 물건을 손에 넣기 좋아하는 영입니다.

최근 어떤 세상 사람이 말했습니다. “가장 많은 장난감을 가지고 죽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비극적인 것은, 크리스천도 이 추구에 휘말려 있습니다.

자신, 자아와 세상적인 야망에 대해 죽는 것을 통하여 사는 복음으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떠나 헤매고 있는지요.

2010년 12월 17일 금요일

그리스도는 초청과 경고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서서 모든 사람을 그분의 자비로운 보호의 날개 아래로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그분은 소경, 병든 자, 나병 환자, 가난한 자, 길 잃은 자, 모든 사람이 와서 치유와 용서를 받으라고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종교적인 군중들은 그분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그들에 대해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23:37)라고 증언하셨습니다.

이것을 읽는 동안 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은 구약에서 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행하신 사역을 처분해 버리실까? 그분의 은혜, 자비와 깨우침에 대한 제안을 거절한 사람들을 내어버리실까?

네,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23:38). 그분은 그들에게 “이 성전은 이제 너희 집이지 나의 집이 아니다. 나는 이곳을 떠난다. 너희가 허비하고 버린 것을 내가 떠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덧붙여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23:39)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선언하고 계십니다. “내 영광은 더 이상 이전 일에 머무르지 않는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비와 은혜가 성육신하신 분이 여기 서서 말씀하십니다. “이 낡은 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그리고나서 예수님은 새로운 것의 시작, 오순절로 옮겨가셨습니다. 그분은 이제 낡은 것의 복제품이 아닌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고 하셨습니다. 기초부터 새것으로 세워나가실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그분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제사장과 백성의 교회가 될 것이었습니다.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오늘날 당신이 보는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일입니까? 우리는 진정으로 승리하는 교회, 흠 없는 그리스도의 신부를 보고 있습니까? 길 잃은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이것이 이 말세에 하나님의 성령이 조성할 수 있는 최상의 것입니까?

당신은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임재하시고 말씀이 신실하게 선포되는 교회를 찾았습니까? 당신은 얼마나 감사해야하는지요! 당신은 아마 생명 있는 교회를 찾을 수 없는 많은 사람 중 하나 일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습니다. “나는 내 영적 굶주림을 채워 주는 교회를 찾지 못했다. 지나치게 오락위주이고, 지나치게 자신에게 집중하고, 지나치게 메마르다.”

용기를 내십시오. 하나님은 곧 믿을 수 없는 방법으로 사물을 흔드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두렵게 흔드시는 와중에서 하나님은 굶주린 양을 먹일 참된 목자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2010년 12월 16일 목요일

나는 이미 너에게 말씀을 주었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광대한 복음 계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느 때 보다도 많은 설교자들, 서적들, 더욱 포화 상태의 복음 매체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이토록 많은 고민, 시련, 괴로운 마음이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요즈음 목사님들은 단지 사람들을 격려하고 절망을 헤쳐 나가도록 돕기 위해 설교를 구상합니다.

이것이 잘못 된 것은 아닙니다. 나 자신도 이러한 진리를 설교합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왜 그토록 승리와 구원을 보지 못하는가에 대해 여전히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불신입니다. 사실은 이 말세에 하나님은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는 이미 너에게 말씀을 주었다. 그것은 완성되었고 완전하다. 이제 그 말씀위에 서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을 겪고 있다고 아무도 우리에게 말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진실인즉슨,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에 순종하는 것의 기근을 겪고 있는 중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은 아주 비이성적입니다만 절대로 논리나 이성에 의해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바울은 단순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이것이 바로 믿는 자의 마음에 진정한 믿음이 일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고 그에 의거해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시34:15, 17, 19, 22).

시편의 단 이 몇 구절에서도 우리의 모든 불신을 몰아낼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주어졌습니다. 이제 당신을 촉구합니다. 말씀을 듣고, 신뢰하고,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안에서 안식하십시오.

2010년 12월 15일 수요일

내 영혼은 왜 낙심하는가?

시편 기자는 계속 되풀이하여 묻습니다. “내 영혼은 왜 낙심하는가? 나는 무용지물이고 버려진 것 같다. 내 안에는 쉼이 없다. 주님 왜 그렇습니까? 왜 나는 나의 시련 가운데서 그렇게 무력하게 느낍니까?”(시42:11, 43:5 참조). 이 질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겼던 많은 사람들이 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예로 들어 봅시다. 우리는 그가 로뎀 나무 아래 앉아 하나님께 자신을 죽여 달라고 구하는 것을 봅니다. 그는 너무도 낙심하여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절망에 빠져 낙심한 의인 예레미야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선지자는 부르짖습니다, “주님, 당신은 나를 속였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이 모든 일을 예언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전 생애에 걸쳐 오직 당신만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대가가 이것입니까? 이제 더 이상 당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겠습니다.”

이 종들은 각각 일시적으로 불신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혼동과 의심의 때에 그들의 상태를 이해하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분은 언제나 그들에게 빠져 나올 길을 가리켜 보이셨습니다. 그들의 시련 가운데서 성령이 그들을 위해 불을 켜 주셨습니다.

예레미야의 증언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15:16). “여호와의 말씀이 그[엘리야]에게 임하여”(왕상 19:9). 어느 순간 이 종들은 각각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며 그들 삶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사실, 이 사람들이 고투하고 있는 동안 내내 주님은 옆에 앉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부르짖음과 고통을 들으셨습니다. 얼마큼 시간이 지난 후 그분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슬픔과 의심의 시간을 보냈다. 이제 나는 너희가 나를 신뢰하기 원한다. 내 말로 돌아가겠느냐? 너희에게 준 내 약속을 붙들겠느냐? 네가 그렇게 한다면 내 말이 너희를 도와줄 것이다.”

2010년 12월 14일 화요일

내 약속이 네가 필요한 전부이다

믿음은 매우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다른 아무런 증거 없이 그것에 순종해야할 것을 믿음은 요구합니다. 우리의 장애물이 얼마나 크든지 상관없고 우리 환경이 불가능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에 따라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약속이 네가 필요한 전부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이전의 모든 세대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의구심을 갖습니다. “주님, 내가 왜 이번 시험에 직면 했지요? 나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당신은 내 생애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많이 허락하셨습니다. 왜 내가 겪고 있는 일에 대해 아무 설명이 없으신가요? 왜 내 영혼이 이렇게 요동하고 크나큰 시련으로 꽉 찼을까요?”

다시 내 말을 들으십시오. 믿음의 요구는 인간에게 철저히 비이성적 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그분은 자신의 약속을 상기시키시며 그분의 말씀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저 나에게 순종해라.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신뢰해라.” 그분은 아무리 우리의 환경이 불가능해 보여도 변명이나, 흔들림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이 아무 이유 없이 마구잡이로 고통당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와 상한 마음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능력이 그분의 손에 달려 있고 기꺼이 그렇게 하실 것을 압니다. 그분은 단지 한 말씀으로 모든 시험과 역경을 우리에게서 없애 버리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인즉, 하나님은 어떻게, 언제 그분의 약속을 우리에게 이행하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분은 우리에게 이미 답을 주셨기에 더 설명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삶과 경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살아가며 부닥치는 모든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전부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분이 이미 계시한 말씀 위에 서 계실 것입니다. “너희 손닿는 곳에 내 말이 있다. 내 약속은 모든 믿는 자에게 예와 아멘이 된다. 그러므로 내 말위에서 안식하라. 그것을 믿고 순종하라.”

2010년 12월 13일 월요일

믿음의 비이성적 면

하나님이 인류에게 “믿으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전적으로 이성을 초월한 무언가를 요구하십니다. 믿음은 완전히 비논리적입니다. 그 정의가 바로 비이성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말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합니다. 우리는 요약하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지도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믿으라고 요구당합니다.

나는 중요한 이유가 있어서 이 주제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지금 현재, 전 세계에 걸쳐 믿는자들의 많은 무리가 의기소침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사실 인생에서 우리는 모두 계속해서 실망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의 본성, 즉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성질을 이해한다면 이를 통과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발견할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노아에게 요구된 믿음을 숙고해 보십시오. 그는 통제를 벗어났던 세대에 살았었습니다. 인간의 상황이 너무도 사악했기에 하나님은 더 이상 견디실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분은, “이제 그만! 인간은 스스로 파멸하기로 작정했다- 이는 중지되어야한다,”(창 6)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고 했던 노아의 당황한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지구 전체를 멸망시킬 만한 대 변동의 사건을 일으키실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그 일에 대해들은 것은 하늘로부터 온 이 짧은 말들이었습니다. 그는 120년 동안 더 이상의 지시를 받지 못했으나 단순히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어떤 믿음이 노아에게 요구되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거대한 방주를 지으라는 엄청난 업무가 주어졌으나 당시 그는 위험한 세상에 살았어야했습니다. 그의 주변 세상 전체가 춤추고 잔치를 벌이고 관능 속에 뒹굴고 있는 동안 그는 믿음을 지켰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그가 받은 말씀을 한 세기가 넘도록 계속 신뢰했습니다. 그의 순종에 대해 성경은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히11:7)다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12:1-4 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나가 너의 고향을 떠나라.” 당연히 아브라함은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주님, 어디로요?” 하나님은 단순히 “네게 말해주지 않는다. 그냥 가라.”고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논리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각 하는 사람에게 전혀 비이성적인 요구입니다. 모든 크리스천 부인에게 묻는다고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당신의 남편이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 “여보, 짐 싸요. 우리 이사 가요,”라고 말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당연히 당신은 왜,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 알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의 대답은 단지, “나도 몰라요. 하나님이 가라고 말씀하신 것만 알아요,”뿐입니다. 이런 유형의 요구는 시운도 없고 이유도 없습니다. 명백히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정확히 이 비논리적인 지시를 아브라함을 따랐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 하나님이 그에게 주셨던 짤막한 말씀이 그가 알고 있었던 것 전부였습니다. “아브라함아,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너는 아무런 해도 당하기 않을 것이다.” 믿음은 아브라함이 단지 이 약속에만 의존해서 행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별이 총총한 어느 날 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보아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별들이 보이느냐? 할 수 있으면 그들을 세어보아라. 너는 앞으로 그렇게 많은 후손을 갖게 될 것이다”(창 15:5 참조). 이 말씀에 아브라함은 분명 머리를 흔들었을 것입니다. 이 당시 그는 나이 많았고 그의 아내 사라도 늙었습니다. 그들은 자녀를 가질 수 있는 나이를 훨씬 지났습니다. 하지만 이 때 그가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가 의지하고 나아갈 증거는 하늘로부터 들려온 말씀, “나는...여호와니라”(창 15:7)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에 대해 노아에 대해 말씀했던 것과 같은 말씀을 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다시 한 번, 우리는 비논리적인 장면을 봅니다. 그럼에도 한 사람의 믿음이 의로 해석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비논리적일지 모릅니다. 그분이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는 증거를 주시지 않을 때, 상황이 소망이 없어 보이고 우리가 이제 모두 끝났다고 확신할 때,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을 신뢰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나를 신뢰해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비논리적이라고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수세기에 걸쳐 주님은 자신이 언제나 시간을 지키셨고 사탄이 마지막 말을 하도록 허용한 적이 결코 없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성령의 완벽한 시간에 맞춰 해내고 마십니다.

2010년 12월 10일 금요일

날로 더욱 퍼부으심

에스겔 47장에서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바로 종말의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전 역사를 통틀어 더욱 영광스럽고 더욱 승리할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진정한 몸은 쇠약해지거나 피식거리며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숫자가 줄어들거나 능력 또는 영적 권위가 감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의 교회는 능력과 영광의 불꽃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던 예수님의 충만한 계시를 누릴 것입니다.

에스겔은 기록했습니다.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겔47:10). 주님의 임재의 불어나는 물속에서 헤엄을 칠 믿는 자의 하나된 무리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차오르는 물의 환상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겔47:3-4 참조).

에스겔은 여기에서 성령의 증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말세에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더욱 늘어날 것입니다.

이 강의 샘과 근원은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이것의 문자적인 형상을 다음 구절에서 봅니다.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19:34).

이 물의 흐름이 늘어나는 것은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셨던 오순절의 이미지입니다. 이 성령의 선물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분이 그들 안에서 솟아오르는 생명의 강이 될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강은 온 세상으로 흘러나갈 것입니다(요7:39-39 참조).

이 생명의 강은 주님이 오시기 직전에 절정에 달할 것입니다. 이것은 에스겔이 받았던 환상 속에서 예언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놀라운 여행길에 데리고 갔습니다. 측량하는 막대기를 들고 주님은 1,000규빗, 약 삼분의 일 마일을 나아가셨습니다. 그만큼 떨어진 곳에서 주님과 에스겔은 발목까지 오르는 물속에서 걷기 시작 했습니다.

에스겔은 “그사람이...내게 물을 건너게 하”(겔47:3)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계속 선지자로 하여금 앞으로, 더 깊이 더 멀리 물속으로 나아가라고 촉구하셨습니다. 1,000규빗을 더 나아간 후 물은 그들의 무릎에 차올랐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계속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시겠습니까? 에스겔은 미래로, 바로 우리의 시대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은 이 환상속의 마지막 1,000 규빗의 강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측량한 바로 그 물속에 있습니다. 에스겔이 이 측량한 물가에 발을 디뎠을 때 그 물은 그에게 너무 깊고, 너무 위압적이었습니다.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겔47:5).

하나님이 그에게 “에스겔, 이렇게 수위가 오른 이 바다가 무엇이냐? 이 강이 모두 생명과 부활의 능력에 관한 것이라면 이러한 영광 속에서 헤엄치도록 복 받은 자가 누구 이겠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나는 이 사람의 궁금증이 어떠했을 지 다만 상상할 뿐입니다. 그는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을 마음에 그리어 볼 뿐이었습니다.

당신은 아마 예수님의 임재를 풍성하게 체험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분에 대해 현재 받은 계시로 당신은 흥분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의인에게 앞으로 다가올 증가된 양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고 우리 가운데 경이롭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이미 영화된 몸 안에 있지 않고는 지탱할 수 없을 만큼 그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면서 자신을 계시해 주실 것입니다.

2010년 12월 9일 목요일

까불림이 다가 올 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눅22:31).

사탄은 오로지 자신의 일을 위협하는 사람들만 까부르기 위해 찾는다는 것을 이해해야합니다.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나무를 쫓아갑니다. 하지만 마귀는 왜 베드로를 까부르려고 했을까요? 왜 그를 시험하려고 안달했을까요? 3 년 동안 베드로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쳤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과 불에 의한 또 다른 세례를 약속하신 것을 들었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이제 마귀는 베드로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을 들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앞으로 행할 더욱 위대한 일에 비하면 지난 3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유다를 이미 끌어내리고 나서 그는 베드로의 믿음을 실패로 만들기 위해 베드로 안에 구축해 나갈 수 있는 어느 정도의 부패성을 찾아야 했을 것입니다.

아마 베드로처럼 지금 당신도 흔들리고 까불림을 당하면서 체 안에 들어있을 지 모릅니다. 왜 하필 나에요? 왜 하필 이때지요? 라고 당신은 묻습니다. 우선, 당신은 지옥에서 그런 명성을 떨치고 있다는데 대해서 기뻐해야합니다. 당신이 순종의 선을 넘지 않았던 들 사탄은 절대로 하나님께 당신을 까부르도록 승락을 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당신을 두렵게 하고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흔들어 대면서 당신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데 그가 힘을 쓰겠습니까? 당신이 이 말세에 하나님의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당신을 까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마지막 시대에 다시 한 번 새 일을 행하고 계시며 당신은 그분에 의해 많은 사람에게 강력한 증인이 되도록 구별되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자유롭게 하셨고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당신의 은사가 클수록, 당신의 가능성이 클수록, 하나님의 뜻에 더욱 당신이 항복할수록 까불림은 더욱 심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까부르는 불을 통과하고 있을 때 그사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예수님은 베드로의 임박한 실족에 대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분은 그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눅22:32)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의 본을 보고 내가 실족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거의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잠18:24)고 말씀하신 바로 그 친구인 것입니다. 그분은 베드로에게서 장점과 단점을 보고 결론지으셨습니다. “이 사람은 구원할 만하다. 사탄이 그를 원하지만 나는 한층 더 그를 원한다.” 베드로는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했고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너를 위해 기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것이 닥쳐올 줄 오래 전에 보셨습니다. 그분은 아마도 베드로에 대해 그분의 아버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 하나님의 왕국에 베드로가 얼마나 필요한지, 그를 친구로 자신이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이야기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주님,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사랑을 주십시오! 형제와 자매가 타협하거나 문제와 재난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볼 때, 주님이 베드로에게 경고하셨던 것처럼 단호하게 경고 할 만큼 그들을 사랑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탄과 전쟁하는 데 쓸 수 있는 또 하나의 “기록되었으되”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당신은 마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너는 나의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 나를 까부를 허락을 받았을 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나의 예수님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

2010년 12월 8일 수요일

선을 넘기

예수님이 지상에 계셨을 때 그분은 사탄의 능력의 치열함에 대해 그리고 사탄이 주님의 백성을 체로 치기위해 지옥의 모든 무기를 가지고 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나는 우리 중 누구도 영적인 영역에서 지금 맹렬하게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투쟁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끝까지 행하기로 그들의 갈급한 마음을 확정한 모든 신자들을 파멸하기 위해 사탄이 얼마나 굳게 결심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크리스천 여정에 있어 우리는 지옥의 전 경보시스템을 울리게 하는 순종이라는 선을 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 선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만 의지하는 삶으로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흑암의 왕국의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마귀의 통치지와 권세의 최대 표적이 됩니다. 전심을 다해 주님께 돌이킨 모든 믿는 자의 증언은 갑작스레 몰아닥치는 이상하고 혹독한 시련과 시험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순종의 선을 넘어갔다면 당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28-34에서 예수님은 성도들이 체질 당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31절). 그리스도 당시에 곡식을 다루는 노동자들은 자루에 곡식을 담기 직전에 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물이 덮인 정사각형 상자에 밀을 퍼 넣고 상자를 뒤집어 세차게 흔들었습니다. 그물사이로 모래와 먼지가 떨어져나가고 곡식 알갱이만 남게 됩니다. 이 구절에서 까부르다라는 말은 “흔들어 분리하다”라는 뜻으로 갑작스런 시련의 휘저음으로 인해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은 네가 단지 모래나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어서 너를 체 속에 넣고 흔들면 땅으로 굴러 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말씀하시기 위해 이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시험과 시련이 있고 또 까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까부르는 것이 사탄이 중점적으로 총공격을 퍼붓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보통 짧지만 혹독한 기간으로 압축 되어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이 까부르는 것은 단지 며칠 동안이었지만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믿음이 흔들리고 충격적이고 후회스러운 날들이었습니다. 이 까부르는 시간은 베드로를 실패하게 만들었던 자만심을 날려 보냈습니다. 이 까부름은 그의 증언을 망쳐버릴 수도 있었던 방해 요소들을 그의 영혼에서 단번에 제거해 버렸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던 것이 명백하신 것처럼 우리를 위해서도 그분은 똑같은 방식으로 기도하십니다.

2010년 12월 7일 화요일

고립의 시간

한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신성한 침묵을 직면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압니다. 내 뒤의 조용하고 세밀한 음성이 완전히 침묵해 버려 뚜렷한 인도 없이 온통 혼동된 기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내 심령을 조언의 말로 충족시켜줄 친구도 가까이 없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전에 나에게 있었던 모든 유형의 인도함이 실패해 버리고 나는 철저한 흑암속에 남겨졌습니다. 나는 내 길을 볼 수 없었고 연이어 실수를 범했습니다. 나는 “오, 하나님, 무슨 일이 있어났나요?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들로부터 얼굴을 가리십니까? 우리에게 신뢰와 의뢰를 가르치기 위해 잠시 동안 그분의 손을 들어 올리시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성경은 확연히 답해줍니다.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대하32:31).

당신은 지금 시련의 홍수 속을 통과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내가 하늘이 놋쇠 같다고 말 할 때 당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압니다. 반복되는 실패에 대해서도 잘 압니다.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당신에게 시련의 잔이 주어졌습니다. 아무것도, 아무도 당신의 심령 안의 필요를 어루만질 수 없습니다.

그 때가 바로 당신의 자리를 지킬 때입니다! 웃거나 즐거워할 수 없어도 괜찮습니다. 당신은 그 순간 전혀 행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신은 영혼 속에 혼란 밖에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시29:10).

곧 당신은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흥분하지 말라, 겁내지 말라. 그저 나를 바라보아라. 모든 것을 내게 맡겨라. 그리고 당신이 여전히 그분의 놀라운 사랑의 대상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2010년 12월 6일 월요일

하나님의 권능을 받고 그리고 가라

권능의 세례를 받을 것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제자들은 물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사도행전 1:6). 예수님은 명확히 대답하셨습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7절).

그들의 질문이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지 멈춰서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 그 방으로 시작해서 단지 우리들만으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실 겁니까? 우리가 바로 헤롯과 로마를 무너뜨릴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바로 땅을 정결케 하고 왕국을 세워 당신을 돌아오게 할 사람들 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 중 몇 사람 안에 있는 지도권과 권위에 대한 정욕을 다루셔야만 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나는 여기 그들의 질문 안에 지위와 권력에 대한 갈증을 넘어 무언가 있음을 감지합니다. 그것은 무언가 위대하고 궁극적인 운명에 연루되고자 하는 인간적인 욕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특별하고 싶은 욕구 - 때에 맞는 타당한 인물이고 싶은 욕구입니다!

제자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님, 당신의 예언적 계획 어디쯤 우리가 들어있습니까? 우리가 새 날이 동트려고 하는 한 체제의 종말에 있음을 아는 것은 대단한 영적 동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운명의 날에 살고 사역하며 당신이 우리를 쓰셔서 모든 것을 매듭짓고 계심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면 우리가 얼마나 흥분하겠습니까!”

성도여러분, 운명의 인물이 되고 싶은 이 동일한 욕구는 어느 정도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퉁명스러웠습니다. “때와 시기는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예수님은 운명의 사람들을 찾고 계시지 않습니다. 다만 그분에 대한 증인들을 원하십니다! “문제는 ‘예언적 시기’나 너희에게 지정된 위대한 운명이 아니라 나는 이 현 세대에게 증언할 증인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나를 깊이 찔렀습니다. 오늘날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바로 이 시간 하나님의 예언적 시계 상 우리가 어디쯤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대 환란에 들어가려는 참일까요?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마지막 남은 자를 거둬들이는 중이실까요?

그때 나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것은 네가 알 바 아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하나님을 기다리고 그분의 권능을 받고 나가서 증인이 되라!” 우리는 우리 등불의 심지를 가다듬고 불을 켜들고 기대하며 기다리면서 주의 깊게 살피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의 재림을 갈망하고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경고를 선포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그분의 증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010년 12월 3일 금요일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사람을 쓰십니다

나는 다수의 크리스천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죄악에 물들지 않기 위해 안전하고 조용한 산속의 은신처로 도피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여 말합니다. “이 모든 도덕적 타락에 대해 기독교인 한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거대하고 사납고 악한 도시에서 일개 교회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로서는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예수님께 가까이 머물러 있으면 되겠지.”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처럼 보잘 것 없는 크리스천이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있을까? 나는 돈도 없고 훈련받은 것도 없고 아무 영향력도 없고 다만 예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만 있을 뿐인데.”

종종 우리는 하나님이 성령을 초자연적으로 퍼부으셔서 많은 무리를 그분의 왕국으로 쓸어 담거나 또는 심판을 내리셔서 사람들을 굴복시키든지 둘 중 하나의 방법으로 움직이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은 하나님이 악한 때에 사물을 변화시키는 방법이 아닙니다. 폐허를 재건축하는 그분의 방법은 언제나 그분이 감동시킨 평범한 남녀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그분의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강한 믿음과 능력으로 무장시키고 전투에 투입함으로써 이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말씀과 기도에 헌신한 사람들로 구성된 거룩한 사역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그들은 어느 누구 위에도 군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남을 잘 돌보는 남녀들로 마음이 감동되어 하나님을 구하고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 외에는 마음속에 어떤 계획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즉각 복무하라고 당신을 부르십니다! 그분은 평범한 사람, 평신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은 대제사장이 “학문 없는 범인”(사도행전 4:13)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을 쓰십니다.

성경은 또한 오순절 다락방에서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사도행전 2:4). 모두가 전투에 강하게 되었고 모두가 담대하고 강력한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이 성령충만한 신자들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다른 잘 알려진 사도들 뿐 만 아니라 과부들, 젊은이들, 하인과 하녀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데반이 성령으로 충만했던 것을 압니다-“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사도행전 6:8).
그는 사도도 아니었고 안수 받은 목사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는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하기 위해 교회에서 식탁을 섬기라고 택함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으로 충만했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사는 곳에서 하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따로 시간을 보내며 마음이 감동되고 기도가운데 그분을 구하며 스데반처럼 성령으로 인해 믿음과 권능이 충만하여 나아가는 평신도들을 사용하십니다!

2010년 12월 2일 목요일

예수님께 수갑채워짐

바울은 종종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the prisoner of Jesus Christ]”(에베소서 3:1)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4장 1절에서는 주님의 포로가 된 것이 자신의 천직, 그의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것을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에베소서 4:7).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디모데후서 1:8). 나이가 들어서도 이 사도는 주님께 붙들리고 그분의 뜻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빌레몬서 9절).

바울은 주님이 그에게 수갑을 채워 체포한 순간을 당신에게 말해줄 수 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서 서신을 받아 쥐고 기독교인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기로 결단하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 오도된 열정가운데 증오, 원한, 분노로 가득 차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사도행전 9:1).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사도행전 9:3). 그 빛으로 인해 그는 완전히 눈이 멀었습니다. 그 빛은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은 그가 무력한 포로가 되어 남의 손에 이끌리어 다메섹으로 들어갔어야만 했다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증언했습니다. 그는 시력을 잃은 채 금식하며 사흘간 고립된 방에 있었습니다. 영으로, 혼으로, 육신으로 그는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사흘 동안 그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주님이 사울을 수갑에 채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포로인 바울로 만들고 계셨습니다!

이 생생한 장면에서 바울은 자신의 독립을 내어놓고 그리스도의 멍에에 순복했습니다. 자신의 손을 평생 수갑에 채우기 위해 예수님께 내밀었습니다! 그의 고통에 찬 기도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 주님, 나는 당신의 뜻을 행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토록 눈이 멀 수 있었을까요?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며 나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내 자신의 생각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나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예수님, 여기 제 손이 있습니다. 내게 당신의 수갑을 채우십시오. 당신의 뜻에 포로가 되게 하시고 당신이 내가 가기 원하시는 곳으로 나를 인도하소서. 당신의 강한 오른 팔에 나를 수갑으로 채워 주소서!”

2010년 12월 1일 수요일

허송한 세월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요엘 2:25).

회개하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기 전 얼마나 많은 세월을 허송했습니까? 얼마나 많은 세월을 죄와 반항의 느치가 먹어버렸습니까?

당신은 예수님의 피 아래 용서받았고 당신의 과거기 잊혀 졌다는 것을 압니다만 그 세월을 돌이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안에 더욱 더 깊이 있을 수 있었을 텐데! 그분의 심령에 큰 기쁨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나 자신과 가족에게 그 같은 고통과 고난을 주지 않았을 텐데. 나는 얼마나 눈이 멀었던가, 얼마나 마귀의 노예로 지냈던가! 내 영혼과 온전한 정신을 잃을 뻔 했지 않았던가. 그렇게 허송한 모든 세월을 보상할 길이 전혀 없구나.” 얼마나 자주 이런 생각을 하십니까?

바울은 생의 말기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디모데후서 4:7-8 참조).

바울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립보서 3:13-14). 다시 말하면, “당신의 과거는 잊어버리고 예수 안에서 달려가십시오,”라고 합니다.

사탄이 즐겨 사용하며 괴롭히는 방법은 당신을 무섭게 하기 위해 옷장에서 해묵은 해골을 끄집어냄으로써 당신의 과거를 들먹이는 것입니다. 그는 당신의 마음속에서 옛 중독이나 정욕이 다시 일어나 당신을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고 설득하려 들 것입니다. 또는 당신은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부심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당신은 원수의 목표물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살아있는 동안 내내 후회의 고통을 느낄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기억이 당신을 겸손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당신의 과거는 끝난 일입니다. 정죄와 죄의식에 관한 한 하나님은 “과거는 잊어버려라.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향해 달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한 편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을 때 이러한 회복의 모습을 봅니다.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마태복음 12:13). 예수님이 당신을 회복시키실 때 상처도 또한 고쳐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나간 상처들, 즉 당신이 허송한 세월에 대한 근심과 후회들을 가지고 하나님이 그 허송한 세월들을 당신에게 회복시키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분 안에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달려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