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9일 금요일

니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저는 사역 안에서 현대적 방법을 쓰는 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사역에도 그러한 것들을 많이 사용하지만 이러한 “사역의 도구”들로부터 우리의 나아갈 방향을 받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봉사활동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의 방향을 얻기 위해 기도하며 주님을 구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역자들 간에 기도는 잊혀진 방법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보다는 오히려 컴퓨터와 현대 방법들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전문가”들이 교회의 고삐를 쥐고 있습니다. 죄는 심리적인 용어로 이해되며 “질병”이라고 불립니다. 마약 중독자는 “연약함”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제단들이 상담실들로 바뀌어지고 있습니다. 경건한 선지자들의 자리는, 최첨단의 인간 중심적 전문 용어를 발설하는 심리학자들과 사회 봉사자들로 대치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예수님이 왕좌에서 끌어내려 지고 프로이드가 높임을 받고 있습니다.

50년 전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뉴욕시에 있는 마약 중독자들과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사역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돈도 없었으며 안내 책자도 없었고, 오직 성령만 전적으로 의지했습니다. 우리 사무실에는 “이곳에는 그 누구도 빛나지 않는다. 오직 성령님만이 빛나신다!”라는 글이 붙어 있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우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우리의 도움은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 있지 않고, 오직 성령님께 있습니다. 당신께서 우리의 마음부터 변화시키지 않는 한, 머리만으로 일할 수 없습니다!”
우 리가 만났던 초창기 갱 단원 중 하나였던 니키 크루즈는 마음에 살인을 품은 자였습니다. 우리가 알던 한 정신과 의사가 그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하루 온 종일을 니키와 보낸 후에 그 정신과 의사는 니키는 구제 불능이며 가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니키가 모든 정신과 의사들을 혼란시키는 장난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니키를 위한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고, 전문가들이 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을 그리스도께서는 불과 5분 만에 이루셨습니다. 니키는 정신 분석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의 두뇌가 검사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에 화살을 쏘셨는데, 그 화살은 진리의 복음이었으며,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니키, 예수님은 너를 사랑한단다!”

단 순간에 니키의 굳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대치되었습니다. 니키는 울며 우리 모두를 껴안았습니다. 사회 전문가들이 그를 단념한 후,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그가 초자연적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2013년 3월 28일 목요일

보상의 날

저는 여러분께, 주님을 왕좌에서 끌어내린 자들에게 임할 네 가지 비극적인 결과에 대해 알려주려 합니다.

1. “이스라엘은 헛된 포도나무라, 그가 자기에게 열매를 내는도다” (호세아 10:1).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자들은 자기들 이익만 챙겼고 그 결과는 절대적 공허였습니다. 호세아는 믿는 자들에게, 자신들의 삶에서 주님을 끌어내린 모든 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림을 보여주며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비참해졌으며, 그들의 모든 추구는 공허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2. “그들의 마음은 나뉘었고…주께서 그들의 제단들을 부수실 것이요, 그들의 형상을 헐으시리라”. (2절)

우리 나라의 마음은 나뉘어졌습니다. 미국인들은 하나님과 종교에 대해 말만 앞세울 뿐, 진정으로 주님을 예배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곧장 우리의 모든 신성한 단체들을 붕괴로 이끌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다른 것들을 의지하면, 그것들이 우상이 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일이 오늘날 우리 나라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더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있으며 그 대신 정부, 대통령, 교육 체계, 사회 보장 등을 의지합니다. 즉, 모두 뭔가의 안정을 찾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나를 신뢰하지 않으면, 나는 너희가 신뢰하는 모든 기관들을 무너뜨릴 것이다."

3. “너희가 악을 갈고 죄악을 거두었으며 너희가 거짓말의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 용사가 많음으로 네가 네 길을 신뢰하였기 때문이라” (13절)

호세아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주님을 신뢰하는 것을 멈추었으니 이제 너희는 죄악의 열매를 거둘 것이다” 오늘날 인류는 세련되고 학식이 있으며 지식도 많습니다. 우리는 성경과 기도를 거부하며 하나님을 끌어 내렸습니다. 그리고 과학, 심리학 그리고 교육을 대신 왕좌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수확하셨나요? 우리의 모든 교양 있는 학습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습니까?

4. “우리가 주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에게는 왕이 없도다” (3절)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타락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믿음을 잃어버리는 그들을 멈출 힘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권면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들의 머리를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지도자가 없고 나아갈 방향도 없다. 우리는 떠내려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고, 같은 일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목사들의 권위를 비웃으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이 목사들의 말에 능력이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교회에 더 이상 어떤 더 이상 지도력이 없다. 우리는 길을 잃었고 혼란스럽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끌어내린 일에 대한 댓가인 것입니다!”

2013년 3월 27일 수요일

주님의 충고를 거부하는 것

하나님을 그분의 보좌로부터 끌어내리고 육신의 힘을 의지함으로 얻어진 끔찍한 결과에 대해 묘사하면서, 호세아 선지자는 여러 해 동안 주님께서 직접 인도하셨던 자들을 충고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짓지 않은 집과 심지 않은 포도밭을 주시면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셨고 번영케 하셨습니다. 주님은 백성들에게 명확한 방향의 말씀을 전하시려고 경건한 자들을 선지자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을 백성들은 하나님께 그들의 신실함을 증명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충고의 말씀을 들었고 육으로 절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강력한 대적들로부터 기적적으로 구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변절이 이스라엘을 덮었고 주님은 그들의 지극히도 사악한 죄를 이렇게 책망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심히 부패케 하였다…” (호세아 9:9). “그들의 모든 고관들은 반역자들이니라” (15절).

그들이 범한 이 끔직한 죄는 무엇이었을까요? 술 취함, 성적 문란함, 탐욕, 간음, 살인 등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의 사악함은 하나님의 충고로부터 돌아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대신 사람에게 순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내버리시리니, 이는 그들이 그에게 경청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17절). 하나님 보시기에, 믿는 자가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악은, 더 이상 그분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 너희는 나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내가 더 이상 너의 안내자, 너의 지혜의 원천이 아니구나. 이제 너는 사람의 지혜를 의지하려 한다. 너는 도움을 구하려고 내가 너를 구해냈던 바로 그곳, 애굽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너는 내 말을 거절했고 나로부터 돌아섰다.”

한 위대한 청교도 선지자가 이렇게 썼습니다: "순전한 권능은 협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요청할 뿐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는 네 임무를 하고, 나는 내 할 일을 할테니 가끔씩 내게 상의하거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고 말고요! 하나님은 순전하신 원초의 능력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다른 무엇보다도 더 그분을 따를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며, 그 어떤 것도 우리 삶 가운데서 그분의 권좌에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2013년 3월 26일 화요일

왕으로 보좌에 앉히심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15절에서 “주께서 나타 나시리니 그분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통치자시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라” 하며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대해 썼습니다. 요약하자면,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모든 나라들과 모든 만물 위에 왕으로, 그리고 교회 위에 주로 보좌에 앉히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어떻게 보이든지 상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통제 불능처럼 보이고 마귀가 장악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수님 발 밑에 두셨고 그분은 여전히 모든 만물 위에 왕이십니다!”

“이는 만물이 그에 의하여 창조되되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좌들이나 주권자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그에 의하여 또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골로새서 1:16).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 이는 그가 만물 안에서 으뜸이 되려 하심이라” (18절).

이 구절들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정하셨고, 그리고 그 예수의 손에 모든 통치권이 주어졌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하지만 도처에서 우리는 사회와 정부가 주님의 권세와 왕위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면서, 그리스도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학교와 법정으로부터 하나님을 없애버리고 우리의 법을 제정하는데 있어서도 그분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끔찍한 결과들을 걷어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미국의 거부가 우리 사회 안에서의 피흘림, 폭력, 인종간의 증오, 도덕적 타락, 마약 남용, 그리고 치명적인 성병들의 발생이 생기게 한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법 제정자들, 교육자들, 그리고 방송이 하나님을 형편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미국의 거부보다 더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문제가 더 심각하고 훨씬 비극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일들이 그분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입니다! 우리의 귀하신 주님이 이 땅 도처에 있는 교회들 안에서, 그리고 수많은 신도들 삶 가운데서 끌어 내려졌습니다.

불 경건한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폐위되는 것을 원하리라는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분 이름에 의해 불림 받는 자들에 의해 끌어 내려지는 것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비통하실까요.

2013년 3월 25일 월요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by Gary Wilkerson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물리치려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해 지쳐 있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한 방울의 기쁨이 다 고갈되어 버릴 때까지 그들의 모든 에너지를 그 노력하는 데 다 쏟아 넣습니다.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쟁취한 승리는, 그들 자신의 의를 성취하려는 끈질긴 노력 속에 온데 간데 없어져 버립니다.

믿음이 아닌 다른 것으로 좇아 난 의는 언제나 실패합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하나님의 의와 우리의 의가 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두 개의 복음, 즉, 하나님의 복음과 인간의 복음이 있다는 말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의와 우리 자신의 의는 결코 혼합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의아해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죄를 멀리 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나요?” 죄를 멀리 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받아들이는 진리이실 뿐 아니라,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시며 당신을 성화시키시는 분입니다. 당신 안에서의 그분의 성화 작업은 낮이나 밤이나 절대로 멈추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실제로 의를 얻은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의 노력에 대한 의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합니다. “의를 따르지 아니하던 이방인들이 의에 이르렀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라” (로마서 9:30). 이러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 인해 지치지도 않으며 그들의 실패로 인해 마음이 짓눌리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믿음을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올려 놓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풍성하신 생명에 의해 그들은 보존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의가 되시고자 율법의 끝이 되셨느니라”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마침이 되십니다. 다른 무엇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원하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요, 달리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며 오직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의해서니라” (로마서 9:16). 이 구절들은 모든 믿는 세대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친구여, 당신은 좀 더 잘하려 애쓰느라 지쳤습니까? 당신은 재 다짐하고는 또 실패하는 끝없는 반복으로 인해 피곤합니까? 모든 것을 잊어 버리세요! 당신의 모든 노력을 멈추십시오. 주님과의 당신의 올바른 관계는 당신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당신의 승리를 위해 그분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2013년 3월 22일 금요일

예사롭지 않은 말씀

최근 성령께서 제게 예사롭지 않은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제가 별로 듣고 싶어하지 않았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주님의 다정하며 사랑스러운 긍휼의 바다에 대해 매우 제한된 시각에 묶여있다. 네가 성령으로 하여금, 용서하고 치유하며, 회복시키는 내 긍휼의 광대함이 드러나도록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네가 많은 죄책감과 비난 그리고 두려움을 통과해야만 했다. 너는 나의 다정함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바로 많은 포기와 실패의 근원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죄가 공격해 올 때, 사탄이 홍수처럼 밀려올 때, 당신이 옛적 나쁜 습관이나 죄에 빠질 때, 마귀는 속박을 만들어냅니다. 일단 죄책감이 밀려 들어오고 나면, 두려움이 당신의 마음을 채웁니다. 완전한 패배감과 무력감이 당신의 영혼을 압도합니다. 이 상황에 도달하면 대부분의 성도가 은혜로부터 이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그들의 관점이 너무도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당신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네 한계에 달했어. 너는 네 죄를 매번 고백했었지. 네가 빛을 대적해서 죄를 범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이 너를 용서해 줄 리가 만무해. 네가 또 한 번 돌이켜서 죄를 고백한다 해도, 돌아서면 다시 똑같은 죄를 짓게 될 거야. 그러니 이제 포기해라!”

마귀는 당신이 하나님의 긍휼의 바다를 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는 당신이 아주 조금밖에 보지 못하기를 원합니다! 용서와 회복의, 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에 대한 우리의 무지 때문에 우리는 파멸했습니다. 우리가 제한된 시각에 처참하게 묶여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향한 긍휼도 고갈되었습니다. 우리의 영안은 다정하신 우리 아버지의 끝없는 긍휼에 아직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긍휼에 대한 거짓되고 제한된 관점에 너무도 묶여있기 때문에, 야고보가 이렇게 말한 것을 믿거나 받아들이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께서는 지극히 동정심이 많으시며 친절한 긍휼을 베푸는 분이시니라” (야고보서 11:5).

이 구절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와 상처에 쉽게 괴로워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과 실패를 감지하시고, 항상 친절하시며 우리를 향한 동정심을 품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적이었을 때에도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그분께 죄를 범할 때에도, 그분은 우리를 신속히 도와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며 용서해 주십니다.”

긍휼이라는 단어의 뜻은 “누군가의 능력 아래서 친절과 동정심으로 범죄자를 다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범할 때마다 우리를 지옥으로 떨어뜨릴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통제 아래 두셨고 그분 뜻대로 우리에게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가장 실망하게 한 자들을 향해서도 기꺼이 동정심과 사랑과 친절의 다정한 마음을 품으십니다.

2013년 3월 21일 목요일

끝까지 굳게 붙들면

하나님께는 가장 작은 불신도 싫어하십니다. 그것은 영혼을 파멸시키는 저주스러운 죄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며,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는 모든 죄의 근원입니다.

당신은 모든 속세의 소유로부터 완전히 끊어졌고, 예수님의 재림만을 갈망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분의 교회에서 강력한 설교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정적으로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렇게 기도하지 않는 한 절대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 하나님, 제 속 사람이 이 말씀을 듣게 해 주소서; 저로 하여금 그것을 제 삶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제 생명이 될 것임을 믿게 하소서.” 당신이 듣는 것은 믿음과 화합 되어져야 합니다.

“전파된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 것은, 그것을 들은 자들이 믿음을 결합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히브리서 4:2). 이 구절이 충분히 이해되도록 설명하자면: “너희가 읽는 것과 듣는 설교가 믿음과 합쳐지지 않는한, 너희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느니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신실했던 것 같이 자기를 세우신 분에게 신실하셨느니라” (히브리서 3:2). 그들의 신실함이 어떠한 방법으로 측정되었을까요? 어떻게 그들이 모든 일에 그토록 신실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신실함이 인정되었던 이유는, 천부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절대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말씀 하신 것을 반드시 행하실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실함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지키실 것을 단순히 믿는 것입니다.

이 의미로 보면, 예수님과 모세는 “(그들의) 확신의 시작을 끝까지 확고히 붙들고” (히브리서 3:14)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르락내리락하거나,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 하는 종류의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절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향한 확신에 신실하셨듯이 우리의 신실함도 같은 기준으로 측정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집을 다스리는 아들로서 신실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기쁨을 끝까지 굳게 붙들면 우리가 그분의 집이니라” (히브리서 3:6).

우리의 시험이 증가하고 전투가 더욱 치열해질 때 우리 육신이 지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간을 보내면서 많은 성도들은 두려움과 의심이 침투해 오게끔 허용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그들 자신을 포기했던 것과 어린아이와도 같았던 믿음을 잃어버렸을 때, 의심이 그들의 마음을 침범하게 됩니다.

제 남은 삶의 길을 내려다 볼 때, 저는 제한된 시간을 봅니다. 그리고 저는 소망으로 기뻐하며 끝까지 굳게 붙들 수 있게 되기를 무엇보다도 더 원합니다.

2013년 3월 20일 수요일

성벽 위의 파수꾼들

구약은 다음과 같은 말라기의 놀라운 예언으로 끝을 맺습니다: “보라,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대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며,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며,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치지 아니하게 하리라” (말라기 4:5-6).

이 예언은 세례 요한의 사역에서 위대하게 성취되었습니다. 한 천사가 요한의 아버지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의 아들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며 “그가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 그분보다 앞서 가서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불순종하는 자를 의인의 지혜로 돌아오게 하며 주를 위하여 예비된 한 백성을 준비하리라” (누가복음 1:17).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에 대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할진대 와야할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태복음 11:14). 또 말씀하시기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5절). 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언된 그대로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 오는 요한에 대한 영적 중요성에 대한 각성을 요구하셨다고 믿습니다.

요한은 엘리야에게 임했었던 두려워할 줄 모르는 영과 권능의 같은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는 쾌락을 추구하던 그 당시 사람들에게 불순종의 죄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곧 오시려는 찰나에 이 용감한 진리의 사람이, 백성으로 하여금 오실 주님에 대해 준비시키려고 그 현장에 홀연히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 광야의 선지자는 ‘백성의 마음을 주님께 돌리도록’ (이것이 곧 참된 회개에 대한 가장 근접한 정의입니다.) 보내심 받았던 것입니다. 요한은 회개, 마음의 정결성, 공의, 그리고 죄의 공개적 고백과 상응하는 거룩의 실제적 행함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저는 말라기 선지자뿐만 아니라 구약의 다른 선지자들이 그리스도 재림 바로 전에 부상할 거룩한 자들의 군단을 말하고 있는 것을 믿습니다. 그들은 엘리야와 세례 요한에게 임했던 같은 영과 권능으로 사역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 군단의 성도들은 이사야의 예언에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고 네 목소리를 나팔소리 같이 높여서 내 백성들에게 그들의 범죄를, 야곱의 집에서 그들의 죄들을 보여 주라” (이사야 58:1). 이 자들이 성벽 위의 파수꾼들 입니다. “그들이 낮이나 밤이나 잠잠하지 아니하리라… 또 그분께서 예루살렘을 굳게 세우사 땅에서 찬양이 되게 하시기까지 그분께서 안식하지 못하게 할지니라” (이사야 62:6-7).

2013년 3월 19일 화요일

거하는 성도

“내가 내 아버지의 명령들을 지켰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명령들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한복음 15:10).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모든 계명에 신실하게 순종했고 그것을 ‘거한다’는 뜻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일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계명들 중 그들이 순종할 목록을 선택하고 고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싫어하는 계명이 있으면 그냥 무시해 버리든지 아니면 그들의 불순종을 이렇게 변명해 버립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아. 나는 그렇게 믿지 않아.” 거룩해지라고 외치는 목사님의 설교가 싫어지면, 그들은 긍정을 강조하는 목사를 찾아 떠나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무관심이라는 무서운 전염병이 오늘날의 교회를 휩쓸고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기를 너무도 두려워해 왔고 율법주의에 너무도 짜증이 나 있어서, 순종을 나쁜 의미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분께 붙어있는 가지가 ‘거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버려져서 시드나니, 사람들이 그것들을 모아 불 속에 던져 태우느니라” (6절). 이보다 더 명확하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거한다는 것은 안식과 의무를 동반합니다. 그분께 거하며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는 생명의 흐름을 갖고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거함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과 상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가지는 그 자체 생명력인 자유 의지가 있습니다. 가지는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포도나무로부터 생명을 빨아들여야만 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7절). 여기서 ‘말(말씀)’은 아버지의 가지 치는 칼의 표상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무시되고 알려지지 않고 등한시된다면 과연 어떤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포도밭에서 간음, 간통, 음주, 마약 등의 메마른 열매들이 잔뜩 뻗쳐나오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이유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가지 치는 작업이 끝나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날선 검, 곧 그분의 칼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말씀을 읽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모릅니다. 그분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거하지 않고서는 의의 열매를 맺기가 불가능합니다. 말씀을 등한시하는 것은 열매가 맺히지 못하게 되는 근원이며, 하나님의 사람들을 치명적으로 메말라 버리게 합니다.

거하는 성도는 말씀을 갈급해 하고 그분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외하는 자입니다. 그는 말씀으로 모든 불순물이 제거됨을 기뻐하며, 그리스도의 참된 생명과 성품이 자기 안에서 계속 증가할 것과, 순종과 사랑 가운데 지속해서 성숙해 지기를 기도하는 자입니다.

2013년 3월 18일 월요일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십니다 by Gary Wilkerson

바울은 진정한 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스라엘을 예로 삼아서 가르칩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바울의 글은 우리에게 몇 가지 의문을 제시합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우리를 의롭게 만들까요? 맞습니다. 칭의가 우리를 의로움의 자리에 데려다 놓는다는 의미로는요. 성화가 우리를 의롭게 만들까요? 그렇습니다. 성화가 우리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실행됨을 경험하는 과정이라는 의미로는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칭의와 성화, 둘 다의 근원이십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그분 은혜의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예수님이 나의 모든 근원이십니다”라고 입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실제로 그들의 말을 반영할까요? 슬픈 진실은, 많은 성도가 칭의가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인 양, 그리고 성화가 그들 삶의 행위를 통해 성취되는 양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은혜를 받았어. 이제 나는 성화 되기 위해 열심히 개인적 노력을 해야만 해.”

어떤 면에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좋은 선물에 보답하기를 원한다고 그분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저를 의롭게 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십자가를 통해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해주셨고, 저는 그 보답으로 당신께 순종함으로써 성화될 것입니다. 당신이 처음 반을 하시고, 제가 나머지 반을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곧장 속박의 삶으로 유인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쓰인 교회의 대형 현수막을 얼마나 많이 보셨는지요?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당신은 그분을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이러한 사고방식이 교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삼 일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가 영생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그 보답으로 과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십일조를 잘하는 것일까요? 기도 모임에 참석하는 것일까요? 더 많이 전도하는 것일까요? 그러한 것들이 바로 이스라엘이 하려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의에 이르기 위해 율법을 따라갔습니다” (로마서 9:31). 그들은 의를 성취하기 위해 그들의 의지를 사용하려고 힘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것을 취득하지 못했습니다.

이 구절은 모든 믿는 세대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로마서 10:4). 그리스도께서 마침이 되십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로마서 9:16).

2013년 3월 15일 금요일

너희의 처음보다 더 좋은 것으로

“내가…. 너희의 처음보다 너희에게 더 잘해 주리라”(에스겔 36:11).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일, 즉 오순절보다도 더 엄청난, 이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에 대한 약속입니다.

당신이 처음 구원 받았을 때 당신의 영적으로 “처음”이었던 때를 회상 해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너무 행복했고 예수님에 대해 들떠 있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나는 너를 위해 그때 보다 더 큰일을 하려 하고 있다!” 그분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교회안에서 더 큰 일을 하려고 하십니다. 홍해 사건보다도 더 큰일이요? 엘리야가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게 하고 비 오는 것을 멈추게 했던 것보다 더 큰일이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더 큰일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더 큰일이 무엇일까? 당신은 물을 것입니다. “ 우리의 믿음이 이러한 위대한 실례들 위해서 세워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내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적의 위대함이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전시대를 걸쳐 가장 누추하고 음란하며 역사상 가장 냉담한 마음을 가진 세대들을 취하셔서 그들을 정결케 씻으시고 그들에게 사랑의 마음을 주시어서 그들을 거룩한 무리들로 바꾸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사람들을 양 떼처럼 늘려 주리라. 거룩한 양 떼처럼…” (에스겔 36:37-38). 하나님께서는 “ 양 떼”, 엄청난 수의, 남자 여자들을 구하시려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각계 각층으로부터 죄인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유태인, 이슬람교도들, 부한자, 가난한 자, 살인자들, 모든 배경의 사람들이 말입니다.

당신은 “ 그것은 뭐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사악한 죄인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에 의해 깨끗게 되 왔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사건 이후로 그 일을 해 오고 계셨지 않습니까”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억 하시기 바랍니다. 죄는 증가되고 있습니다. 사악함은 점점 심해지고 있고요. 그리고 죄가 넘치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 많이 넘치고 있습니다.

홍해에서 마귀는 진격해오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날 다른 점은, 마귀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아 노예로 만들면서 타락된 교회를 장악 했습니다., “ 그들이 너희를 황폐케 하고 사방에 있는 잔류자에게 소유가 되게 하여 너희로 …백성들의 치욕이 되게 하였음이라"”(에스겔 36:3).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는 다음의 이유를 위해 움직이실 것입니다. “적이 너희를 대항하여 말하기를아하, 옛 산당들까지도 우리의 소유가 되었도다”(2절). 사탄과 그의 졸개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조롱하며 비웃었습니다, “ 우리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일을 멸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 나는 내 이름을 위하여 강력한 구원을 하려고 한다”

당신은 이 기적을 이해하기 위해 믿음이 필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 역사상 가장 시급한 때에, 가장 위급할 때에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이 자신들의 과거의 죄들을 말 그대로 혐오하게 되는 그러한 죄책을 가져 올 것입니다. “내가 너희 위에…늘릴 것이니… 너희는 번성하고 소산을 낼 것이라… 그리고 너희의 처음보다 너희에게 더 잘해 주리라” (에스겔 36-10-11)

2013년 3월 14일 목요일

다시 한번 더 행하여 주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 그들은 주님께서 베푸신 그 전능하신 구원에 대해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다음과 같이 서로에게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이보다 더 위대한 기적은 다시는 없을 거예요! 앞으로 올 어떤 다른 세대도 이렇게 눈에 보이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이토록 강하게 목격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윗은 홍해에서의 이스라엘의 기적적인 구출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라. 사람의 자손들에게 행하신 그의 일이 두렵도다. 그가 바다를 마른 땅으로 바꾸셨으므로, 그들이 걸어서 하수를 통과하였으니, 그곳에서 우리가 그분 안에서 기뻐하였도다” (시편 66:5-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을 대신하여 일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권능에 대해 오는 세대들에게 이야기 해주라는 명을 하셨습니다. “오는 세대에게 주를 찬양함과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경이로운 일들을 전하리로다.”라는 시편 78:4편의 말씀처럼 그들은 홍해에서의 구원의 사건을 그들의 실례로 사용 하였습니다.

다윗이 어린 아이였을 때 거듭해서 듣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을 온통 빼앗겼을 것입니다. 지금은 다윗이 그의 자녀들에게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단단.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조상들을 마른 땅 위에서 홍해를 건너게 해주셨기 때문이지. 자 이제 그 이야기를 너의 자녀들, 또 손주들에게 말해 주거라!”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까마득히 먼 옛날에 하셨던 일을 이야기 해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분의 백성을 지금 구원하시는 것을 보기 원했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옛날, 곧 우리 조상들의 날에 주께서 행하신 일을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기를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으니, 즉 주께서 어떻게 그들을 쫓아내셨는가 하는 것이니이다” (시편 44:1-2)

여기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 주님 전 일생을 통해 당신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들, 이러한 놀라운 당신의 영광의 장면들이 이 어떻게 우리 조상들에게 눈에 보이게 펼쳐졌던 것에 대해 들었습니다. 저의 자녀들도 그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 손주들도 들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 오 하나님이여, 주는 왕이시니 야곱을 위하여 구원을 베푸소서”(4절). 달리 말하자면, “ 그러나, 하나님 당신은 저의 왕도 되십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이러한 일들을 한번 더 행해주십시오”

이 시편이 쓰여 졌을 때에 이스라엘은 극심한 시련의 때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엄청난 위기를 맞았었고 그들은 현재의 구원이 필요했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강한 이유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 와서 부르짖었습니다, “오 주님, 홍해에서 당신의 자녀들은 그들이 겪는 그러한 위기가 다시는 그들에게 안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었을 거예요. 우리는 당신의 전능하신, 구원하기 위해 두 팔을 벌리신 하나님의 강력한 표적이 필요합니다 주님 오늘 한번 더 그 일을 해주세요!”

2013년 3월 13일 수요일

근심하는 마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 14:27). 그러나 사실 많은 크리스천들이 근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두려움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같은 구절에서 또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화평을 남겨 두나니 나의 화평을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소수의 신자들만이 마음속에 지속적인 평강을 누리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평강은 왔다가도 떠나고 그들은 걱정과 불안 스트레스로 인해 시달린 채로 남습니다.

스가랴는 오실 메시야에 대해 이렇게 예언 했습니다, “우리를 우리의 원수의 손에서 구하여 내심은 두려움 없이 주를 섬기기를,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그 분 앞에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하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 1:74-75)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평생 그분의 평강을 누리며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할 수있는 것입니다.

평생 두려움 없이 누리는 평안한 마음과 영혼말입니다! 이것은 좋은 날 그리고 안 좋은 날, 고난, 혼란, 시험 그리고 불확실 한 날들을 포함합니다. 무슨 일이 우리에게 닥치든지 우리는 항상 평안을 누릴 것입니다.

스가랴는 예수님에 대해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 흑암에 있는 자들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비치고 우리의 발걸음을 화평의 길로 인도하리로다.”(79절) 그는 예수님이 그의 모든 자녀들을 불안과 공허 혹은 두려움 속으로가 아닌 평강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입니다. 그분이 태어났을 때, 천사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 땅에 평화로다” 그분의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라 일컬어지며 주님은 그분 자신이 이렇게 약속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서 화평을 지니게 하려 함이라”(요한 16:33). 사도행전 10장 36절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화평을 전하는 것이라” 말씀처럼 화평은 복음의 모든 것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환난, 핍박 그리고 불 같은 시험을 만날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7장 5절에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고 바울이 말 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시험도 만나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적은 광풍을 보내 구원의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세운 믿음의 집을 넘어뜨리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 때문에 평강 가운데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2013년 3월 12일 화요일

견딜 힘

성경은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없이는 우리는 견딜 힘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마음을 놓아선 안됩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죄책감과 정죄가 주님을 기뻐하는 것을 철저히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바로 지금 이 굴레 안에 있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그리고 값없이 주신 용서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죄를 미워하고 주님의 의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분의 희락의 기름을 부어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주께서는 의를 사랑하고 죄악을 미워 하셨나이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께서 주께 기쁨의 기름을 부어 주의 동료들 보다 우위에 두셨나이다” (히브리서 1:9)

자신들의 죄를 내려 놓고 주님과 같이 동행하는 자들도 그것이 아직 불확실하여 몸부림 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위에 언급한 주님을 향한 그러한 다가감, 그러한 갈망이 있기에 그것들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며 마침내 그들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모습을 하신 예수님이 보통 사람의 옷차림을 하고 당신 옆에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상처 입으시고 패배한 크리스천, 우울해 보이며 죄책감과 정죄 그리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한 그분이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 때 당신은 그분이 예수님이신지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나요? 그분이 묻습니다.
당신은 아마도 “ 너무 많이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요.

“당신은 죄를 지었지요, 그렇죠?”
“ 아.. 네,”당신은 대답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는 죄를 고백하고 그것으로부터 돌아서는 모든 자들을 용서하신다는 것을 믿나요?”
“예 그렇치만……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는 제가 주님에게 상처를 드린 것 같아요, 그분을 정말 아프게 했을 거예요”
“만일 당신이 고백했다면 왜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지요?”
“저는 그것을 너무 많이 했거든요!”
“ 당신은 그분께서 499 번이라도, 당신이 고백하고 회개하면 용서 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나요?”
“네. 믿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죄를 미워합니까? 당신은 아직도 주님을 원하세요?
“네 그럼요!”
“그렇다면 당신은 어째서 마귀가 당신으로부터 십자가의 승리, 즉 어린양의 보혈의 능력을 도적질하게 놔두는 건가요? 왜 그분의 기쁨과 그분을 바라보는 것을 누리지 못하나요?”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안에서의 당신의 기쁨을 멈추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그분을 찬양할 권리, 주 안에서 노래하고 외치며 행복해 질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용서하시는 아버지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2013년 3월 11일 월요일

의를 추구함 by Gary Wilkerson

당신은 의를 추구했지만 실패 하셨습니까? “다시는 죄를 안 지을 거야”라고 말했지만 바로 그 다음 날 죄를 지을 뿐이었습니까? 당신은 “주님 무슨 일이 있어도 전 저의 마음에 열심을 불일 듯 할 거예요” 라고 기도했습니까? 그런데 결과는 그 마음이 금새 식어져서 당신의 옛 습관으로돌아가 버렸고요. 당신이 성공하지 못했을 때 당신은 더 열심히 노력 했습니까? 그리고는 계속 실패만 했습니까?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어느 순간에 당신은 이렇게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어찌해서 나를 도와주시지 않는걸까? 나는 의로워지고자 이토록 열심이 있는데 실패만 거듭하고 있을뿐이야” 우리가 성화 되야 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실 그분의 도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바울은 로마서 10장 2절에서“그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열성은 있으나 지식을 따라 된 것은 아니니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하는 것’만을 알 필요 가있다고 생각했지만 바울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아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우리는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뛰어넘는 의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믿는 대신에 우리의 공적에 의존하므로써 우리또한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그 기회를 쉽게 거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하는 노력에는 축복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오직 자신의 아들, 예수님의 일만을 축복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우리 대신 흘리신 그분의 보혈을 믿음으로 성화 되었습니다 즉 성결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것”을 거부하였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 나는 의롭게 살수 있어”라고 말하고 나서는 예수님께서 제공해주시는 의를 의지하지 않는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의 대신에 우리자신의 의에 대한 열심을 보여주는 네 가지 표적이 있습니다.
  • 우리는 우리가 실패할 때 화가 난다. -우리는 “나는 내가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믿어”라고 생각합니다 
  • 우리는 우리가 성공했을 때 자랑스럽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나는 전보다 더 영적이야”라고 말합니다 
  •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판단한다. - 우리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그 사람과 같지 않아요.”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 다른 사람들이 의롭게 살게 되면 질투가 난다. - 우리는 “ 왜 나는 다른 이들처럼 의롭게 되지 않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할 때 우리는 우리의 노력을 점점 더 합니다. 문제는 애초에 우리가 우리의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올바를 관계로 회복 된다는 것이 우리가 무엇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을 믿음으로 일어나는 일인 것입니다. 이것은 깨어지고 통회하는 심령, 즉 하나님의 능력 만이 우리를 바른 관계로 회복시킨다는 겸손한 인식을 필요로 합니다.

2013년 3월 8일 금요일

주님께 최선을 드리세요

구약시대 사람들은 흠이 있거나 눈이 멀었거나 다리 저는 양을 가지고는 제단으로 나아 갈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최고 좋은 것들만 주님께 가져가야 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시간을 가지고 주님께 기도로 나아가시는지요? 당신이 말끔히 깨어있을 때입니까? 아니면, 그날에 해야할 많은 일들로 인해 마음이 잔뜩 부담스러운 채로 아침에 거룩한 기도를 하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아니면 분주한 하루 일과를 마친후의 지치고 피곤한 몸을 그분의 임재안으로 끌고 들어가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은 여러분의 입술이 있는 곳에 있어야만 합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내가 받으리니, 내 집은 모든 백성을 위한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 (이사야 56:7).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번제물을 가지고 오는 자들은 “주에게 연합하여 그를 섬기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6절) 자들 입니다.

하나님 제단에 받아들여질수 있는 제물은, 다리를 저는 것으로도 아니요, 성의 없이 졸리운 눈을 가지고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드려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사로잡혀서 “하나님, 당신을 알기위해 오늘도 나아갑니다. 당신을 더 많이 원합니다!” 라고 끊임없이 외치는 심령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제물을 가지고 오는 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내가 나의 거룩한 산으로 데려가 나의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7절). 그분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거룩과 기쁨과 능력의 성소로 데리고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증언들을 지키고 온 마음으로 그분을 찾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시편 119:2).

당신이 기도의 습관을 세우고 모든 걸림돌들을 제거하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온 마음으로 그분을 찾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만일 네가 거기서 주 네 하나님을 찾으면, 곧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면 만나리라” (신명기 4:29).

2013년 3월 7일 목요일

기도의 골방

예레미야가 예언하기를, 기도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것을 거부하는 모든 목자는 실패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목자들이 우둔하게 되어 주를 찾지 아니하였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형통하지 못하며 그들의 양 떼가 다 흩어지리로다” (예레미야 10:21).

예레미야가 묘사했던 그 모습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서 볼 수 있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많은 목자들이 게을러지고 태만해졌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부르심을 오직 급료를 받기 위한 직업으로 여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내기 위해 기도로 나아가는 대신, 자신들 육신의 팔에만 의존합니다. 그들은 양들을 잘 보살피고 먹이는 데 필요한 모든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양들은 흩어져버리고 있습니다.

한때 교회들을 강하게 묶고 있었던 단합이 지금은 깨지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가 살던 시대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장막이 노략을 당하고 내 줄들이 다 끊어졌으며 내 자녀들이 나를 떠나갔으니, 내 장막을 펼치고 내 휘장을 칠 자가 다시는 없도다” (10:20). 그가 말하고 있는 ‘줄’은 사람들을 연합시켰던 하나님의 구속력을 상징하는데 그것이 아예 없어졌음을 말합니다. 양들은 흩어져버렸고 제사장들은 아주 불결했기에 감히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거룩한 것들 가까이에 갈 수 없었습니다. 어떤 제사장도 거룩한 휘장을 만질 자격이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찾는 분들에게 말씀 드리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기도의 골방이 있으신지요? ‘골방’이 있다는 의미는 단순히, 언제 어디서나 문을 닫고 들어가서는 그분을 찾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소중한 시간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음을 뜻합니다 (마태복음 6:6 참고).

“기도 골방”은 “기도 습관”을 뜻하기도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매일 실행하고 계시는지요? “실행하다”라는 의미는, “나는 하나님과 교제해야만 해. 나는 내 아버지와 오늘 대화해야만 해!”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자신을 스스로 훈련하는 것을 뜻합니다.

때로는 제 골방이 차 안에 홀로 있을 때이기도 합니다. 종종 집에서 공부할 때이기도 하고요, 또는 뉴욕 시내 거리이기도 합니다. 몇 주전에는 그것이 플로리다 해변이었는데, 그곳에서 저는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며 몇 시간을 걸었습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기도는 그분과만의 시간, 즉,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위선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골방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거룩해 보이기 위해 기도하는 자들 사이에 명확한 구분을 지으셨습니다.

2013년 3월 6일 수요일

당신이 그분을 찾으신다면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마태복음 6:6).

아버지를 찾기 위해 골방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외형적인 골방 자체보다도 훨씬 큰 의미를 뜻합니다. 구약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두 부류로 구분하고 계신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바로, 그들의 비밀스러운 기도장소 에서 그분을 매일 찾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을 때, 모세는 진영 바깥에 기도 성막을 세웠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주를 찾는 자는 다 진영 밖에 있던 회중의 성막으로 나아갔으며” (출애굽기 33:7). 이스라엘에 우상숭배가 만연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분을 찾는 데에 시간을 드렸습니다. 이 주님을 찾는 남은자 (Remnant)들은, 사람들을 휩쓸고 있는 변절자로 그 자신들 또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진영 밖으로 나가 기도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수세기 후, 아사왕 시절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축복하시고 형통케 하셨으며 그들의 모든 적으로부터 평화를 누리게끔 하셨는지를 이해했습니다: “우리가 주 우리 하나님을 구하였으므로…그분께서 우리에게 사방에 안식을 주셨느니라, 하고 이에 그들이 건축하고 형통하니라” (역대기하 14:7).

아사왕 통치 중 어느 날 백만의 이디오피아 군대가 이스라엘을 치려고 전진해왔습니다. “아사가 주 자기 하나님께 부르짖어 이르되… 오 주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이에 주께서 아사 앞에서 이디오피아 사람들을 치시매… 이디오피아 사람들이 도망가니라…… 그들이 주 앞에서 멸망하였더라” (11-13절). 아사가 침략당했을 때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로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승리로 답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를 거둔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선지자 아사랴가 아사 왕에게 와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만일 주와 함께 하면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하시리라. 너희가 만일 그분을 구하면 그분을 만나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분을 버리면 그분께서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15:2). 달리 표현하면: “만일 너희가 모든 일에 하나님을 찾으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를 멈춘다면 그분도 너희를 버리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주님을 찾았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들이 고난을 당할때에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분을 구하고 그분을 만났느니라” (15:4). 이스라엘은 그들이 하나님을 구하며 기도했을 때 평강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언제나 그들을 구원하셨고 권면하시며 힘을 주셨습니다.

2013년 3월 5일 화요일

진정하십시오

제 가까운 친구가 제게 전화를 걸어 저에게 충격적인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저를 너무도 아프게 했고 저는 몹시 억울했습니다. 저는 전화를 무례히 끊지는 않았지만, 통화를 짧게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제가 심하게 상처받았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그 일은 저를 매우 화나게 하였습니다. 저는 심히 충격받았고 상처받았으며 짜증스러웠습니다. 분노, 치욕과 함께 비통함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고, 저는 이 문제를 두고 고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다시 제 공부를 하며 기도하려 시도했지만, 너무도 괴롭고 힘들어서 주님께 초점을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가까운 친구가 이유 없이 저를 무시했습니다. 마귀가 저를 화나게 하려는 것이 틀림없어요. 제가 그것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약 한 시간 가량 그러한 생각들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는 화가 절정에 달하게 되었고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주님, 저는 이 일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가 바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침착하며 작은 음성을 들었을 때입니다. “데이빗, 당장 그 화를 식히거라. 네가 깊이 상처받았기 때문에, 너는 지금 너 자신이 짜낸 상처와 분노와 증오의 도가니에서 들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니 절대로 계속해서는 안될 것이다.”

저는 오래전부터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는 듣는 쪽이 유익하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회개했고 그분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는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그토록 화나게 했을까? 그리고 왜 나는 속으로부터 계속 끓고 있었단 말인가? 이 친구와 화난 상태로 계속 있을 수 없어.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가까운 친구였고 내가 그를 용서할 것을 나 자신이 알고 있지. 그런데 내가 왜 이리 속상해하지?

갑자기 깨달음이 왔습니다. 내 안에서 끓고 있었던 것은 그 아픈 대화내용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쉽사리 화가 돋구어지도록 저 자신을 허용했기 때문에 제가 분노했던 겁니다. 저는 제가 정복했다고 여겼던 옛 습관으로 그토록 빨리 떨어져 버릴 수 있었던 저 자신에 대해 실망했으며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화를 식히는” 가장 빠른 길은 그리스도의 용서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주여, 주는 선하시고 기꺼이 용서하시며 주를 부르는 모든 자에게 긍휼을 풍성히 베푸시나이다” (시편 86:5).

2013년 3월 4일 월요일

진정한 의 by Gary Wilkerson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분을 향한 특별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지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즉,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육신의 정욕을 극복하며, 정결하고 흠 없이 주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께서는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이 선천적 갈망을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 심어놓으셨습니다. 다른 종교인들뿐만 아니라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옳은 일을 행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가능한 한 훌륭한 인간이 돼서 옳게 살고 싶어 합니다. 알다시피 일부 사람들은 그 열망으로부터 도망쳐서 그와 반대로 살지만, 그들은 여전히 옳게 살고자 하는 깊은 내면의 갈망을 의식합니다.

물론 우리는 모두 죄성으로 인해 이 갈망에 미치지 못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 세상의 영이, 의로움을 분별하는 마음을 어둡게 만들고 있고,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을 영예롭게 해 드리는 삶을 사는데 실패함으로써 낙심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의로움 이라는 단어 이면에는 옳게 살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옳은 동기와 감정들 그리고 옳은 행위로 살며 그분의 뜻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실로 의로워지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만 합니다. 의로움이란 옳은 행실일까요?

아닙니다.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도 옳은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옳은 일은 하지만 바리새인적 사상이 동기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겉 행실은 옳게 보이나 그들의 속은 “생명 없는 마른 뼈”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의로움이란 한 열망일까요, 아니면 의롭게 되고자 하는 의지일까요?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큰 열정을 갖고 의로워지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을 소유하는 데에는 실패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의를 ‘칭의(의롭다 여기심을 얻는 것)’와 ‘성화’ 두 단어로 묘사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이 둘 다를 우리의 삶에 필요로 합니다. 첫 번째의 ‘칭의’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바른 위치나 올바른 관계를 뜻합니다. 두 번째의 ‘성화’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과 계속되는 그분과의 관계를 뜻합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내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의롭게 만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롭다 여기심을 얻는 것은 무엇을 의롭게 만드는 것과 상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여기심을 얻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다루어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가 지불되어야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께서 우리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음을 압니다. 십자가에서의 그의 희생은 우리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의 불을 꺼버렸습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우리가 주님께 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분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위치에 있기 위해 필요한 모든 요구를 완전히 충족 시키신 것입니다.

2013년 3월 1일 금요일

확신하고 깨달음

우리는 율법에 의해 구원된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우리의 죄를 확신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의 깨달음이 있음이니라” (로마서 3:20)

율법은 “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죄가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3:19) 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선생이 되었으니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 3:24).

“율법은 거룩하며…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러나 선한 것이 나에게 사망이 되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다만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해 선한 그것으로 인하여 나에게 사망을 이루었으니 이는 계명에 의한 죄가 심히 죄 많게 하려는 것이라” (로마서 7:12-13).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나는 그것들이 죄라는 것을 알기 전에는 나의 죄를 진심으로 고백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그분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기 전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율법이 죄에 대한 나의 무감각함을 파괴시키면서 나를 강타 하였다. 내가 그분의 규례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았을 때 죄는 나에게 철저히 악한 것이 되었다.”

죄에 대한 깨달음은 당신으로 하여금, “ 주님 긍휼을 구합니다. 제 자신을 제가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의 율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저의 마음 가운데 죄를 보아 왔습니다!” 라고 울면서 당신을 그리스도의 팔을 향해 곧바로 달려가게 합니다.

믿음은 “죄를 깨달은, 회개하는 죄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 안으로 피하는 것”으로 정의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그의 죄를 깨달은 자만이 피난처를 위해 “그리스도께로 피할” 것입니다.

오순절 날에 베드로는 서서 군중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베드로는 율법의 번쩍이는 빛 아래로 그들을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는 그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 너희가 [그 분을]붙잡아 무법자들의 손을 통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사도행전 2:23).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철저히 죄를 깨달아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우리가 어찌 하여야 하리이까” (37절).

아담은 그의 “눈이 열린” 후에 (창세기 3:7) 은혜의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가 그의 비참한 상황과 그의 죄의 결과를 안 후에야 하나님은 그에게 자비와 소망의 메시지를 가져오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