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30일 화요일

시험과 연단

누가 이 고통과 어둠 가운데 있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바로 시험과 연단을 지나온 소수의 군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불로 연단 받고 정금같은 믿음을 사모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제가 수년 동안 사역을 하면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동일한 패턴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후, 광야로 데려가 시험을 겪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의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만을 의지할 사람들을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삶도 동일했습니다. 침례를 받으신 후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눅 4:1~2)

다니엘도 이와 같은 시험을 겪었습니다. 다니엘을 시기하던 총리와 고관들이 왕을 설득시켜 30일 동안 기도를 못 하게 하는 금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상했듯 다니엘은 법을 어기고 하루에 세 번씩 여전히 기도를 합니다. 이에 평소 다니엘을 친애하던 다리오 왕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사자 굴에 던져 넣습니다.

다니엘은 금령을 어기는 대가가 죽음인 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고 하나님께서 시험 가운데서 그를 지키실 거라 믿었습니다.

다리오 왕은 초조하게 다니엘을 지켜봤습니다. 또한, 다니엘을 구하려 여러 방법을 시도했고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덪져지는 순간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다니엘 6:16)” 라고 외칩니다.

당신이 예수가 나의 주요, 구원자요, 치료자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외치면 세상 사람들은 당신을 주시해서 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을 자랑하는 자를 지켜보며 마귀 또한 당신의 믿음이 무너지길 기대하며 집중합니다.

시편 기자가 말하길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시 31:19). 여기서 말하는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한 큰 은혜가 무엇입니까? 바로 어떤 시험도 무너뜨릴 수 없는 영광스러운 믿음의 간증입니다.

다니엘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굶주린 사자의 입을 닫아버리셨습니다. (다니엘 6:22)

2015년 6월 29일 월요일

글쓴이 게리 윌커슨 by Gary Wilkerson

우리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을 때 그 순간 필요하고 부족한 것들에만 집중합니다. “지금 이것만 있었다면. 지금 이것만 고칠 수 있으면…” 하지만 예수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에 집중하지 말고 우리의 공급자에게 집중하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마태복음 6:25~27)

구약에서 아사 왕은 불가능한 상황에 부닥쳐 있을 때, 그의 문제가 아닌 그의 공급자에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의 나라가 샐 수 없는 적군으로 둘러싸여 있을 때 아사 왕은 기도하기를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역대하 14:9~12)

에수께서는 이런 상황 가운데 감사하는 것을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굶주린 청중들을 앞에서 주님은 몇 개의 떡과 생선을 두고 감사하며 기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요한복음 6:11)

예수께서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기 전에도 이미 감사로 기도 하셨고 항상 그에 따르는 이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요한복음 6:12~14)

여러분의 상황은 여러분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립보서 4:19)

지금 당장 필요한 것에만 집중하며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시선을 들어 하나님의 선하심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당신의 부족함에 대해서 불평하는 대신 하나님께 감사 하십시오. 만약 더이상 그러할 힘도 없다면 주변의 믿음의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평안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인생 가운데 그분의 능력을 증거하실 것입니다. 믿으십시오. 그리고 주 안에서 안식하십시오!

2015년 6월 27일 토요일

제단을 쌓는 일 by Claude Houde

다시 아브라함을 만나보겠습니다. 그가 저희에게 주는 메세지가 있습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다시 쌓고 재건하는 법에 대해 가르쳐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약속들에 답하기 위해 아브라함은 특별하고도 아주 놀라운 일을 합니다- 여호와께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 12:1-2).

그 제단은 간증이며 공적으로 나타내는 약속이고 서약이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 제단은 제 믿음의 표현입니다. 저는 이 제단을 보는 모든 사람이 제가 주님께 속해있다는 것을 선포하는데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주님을 믿으며 제 믿음은 그분의 약속들에 거합니다.”라고 말하는듯 합니다.

이러한 “주님께 제단을 쌓는” 것은 아브라함 시대의 히브리와 유대 문화에서 보면 아주 강렬하고, 진지하고 또 법적 구속력이 있는 개념입니다. 사실, “제단을 만드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과 진실한 것을 의미합니다. 진심과 전념을 다 해 주님 앞에서 진실하고, 또 모든 마음을 다해 주님 앞에서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이 글을 읽는 분들이 하나님께 향하는 위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헌신적인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자랑하거나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진심으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기를 원하고, 순종하기를 원하고, 그분의 뜻과 말씀에 진실하기를 원합니다. 헌신하는데 거짓이 없으며 진정을 다 합니다.

여러분은 믿음, 기도, 예배, 관용, 용서 그리고 성화의 제단을 주님 앞에서 쌓았습니다. 여러분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 1:6)라고 하는 믿음 안에서 살아있습니다. 이 땅에서 이룰 수 있는 포상이나 직업적으로의 성공, 출세를 넘어 여러분은 매일 이렇게 여러분을 반기시며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마 25:21).

주님 앞에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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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클라우드 어드(Claude Houde) 목사님은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세계 전역에 걸쳐 월드챌린지(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s의 주된 강사입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New Life Church는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서 개신교 교회로서는 성공하기 힘든 캐나다의 보수적인 지역에서, 지금은 교인 수가 3,5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015년 6월 26일 금요일

하나님을 완전히 믿는 것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가 그저 삶 속에서 그의 선하심, 자비하심 그리고 영광 안에서 편안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하려고 구원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 개개인을 선택하신 구체적이고 영원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은 우리가 생각하는 축복과 계시에 한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인류를 향하여 아직도 돌아오도록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믿는 크리스천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기 위한 도구로 천사를 사용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택하신 족속 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연단하시어 사용하고자 하십니다(베드로전서 2:9 참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우리의 삶으로 완성시키고자 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이 우리의 삶을 보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고백하기를 기대하십니다. 믿지 않는 나라에, 어려운 시기에 돌을 맞고, 깊은 시험에 부러져있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기드온 시대에 믿음의 사람을 찾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 족속과의 전투에서 싸울 용사들을 모집하였고, 수천명의 이스라엘 용사가 모집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 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사사기 7:2-3).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두려운자가 있다면 즉시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거라. 나의 군대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원하였던 용사들을 돌려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22,000명의 의심하였던 용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기드온은 10,000명의 용사들로 추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군대가 너무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300명의 용사들을 전투에 내보내기 위하여 준비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계에 보낼 복음 전달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의심하는 백성을 보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종교적 단체 또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신학자들을 찾고 계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단체와 교육받은 사람들을 사용하시지 않는 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험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흔들리지 않는 백성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2015년 6월 25일 목요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는 것

우리가 지을 수 있는 죄 중에서 의심과 불신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입니다. 구약과 신약성서 모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불신이 하나님을 심히 슬프게 하고 아프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바로의 손으로부터 구원하신 이후에 일어난 이야기가 아주 적절한 예시입니다.

“우리가 열조와 함께 범죄하여 사특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주의 기사를 깨닫지 못하며 주의 많은 인자를 기억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시편 106:6-7).

시편 106편의 저자는 여기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저지른 악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홍해의 기적을 보고도 의심하고 믿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넌 이후에 승리로 인하여 기뻐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적을 행사하시고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민족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그 이후에 어려움을 겪은 다음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였습니다.

쉽게 말해, 시편 106편의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으실 수 있으십니까?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셔서 원수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놀라운 기적 이후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그렇게 화나게 할 수 있었습니까?”

“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매 저희를 인도하여 바다 지나기를 광야를 지남 같게 하사 저희를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속하셨고 저희 대적은 물이 덮으매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도다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시편 106:9-12).

이스라엘 민족들은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적합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적절한 장소에서 찬송을 하지 않았습니다. 승리를 거머쥔 이후에는 누구나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시금 어려움에 닥쳤을 때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2015년 6월 24일 수요일

진정한 영적 권위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력을 시각적이고 휘황찬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권위에 있어서는 결코 같은 의미로 볼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에게 영적 권위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베드로전서 3:4).

베드로가 사용한 온유함이라는 단어의 뜻은 상냥함, 온화함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안정함이라는 뜻은 확신 있고, 흔들리지 않는 의미를 갖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안에서 늘 평안한 마음을 뜻하는 것이며, 그러한 마음이 진정한 영적 권위를 갖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권력과 권위에 대한 세상의 철학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논리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더욱 강력하게 자기주장을 하라. 남을 위협하여서라도 권력을 쥐어 잡고, 상대방의 눈을 맞추고 보디랭귀지를 통하여 상대방을 내려보아라. 자신이 필요한 것을 항상 우선시하라.” 우리는 오늘날의 음악 앨범표지는 이러한 태도를 적나라하게 반영하였습니다. 밴드 멤버들은 노려보며 무서운 표정으로 위압감을 줍니다. 그리고 권위적인 포즈를 취합니다.

믿는 우리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야 합니다. 우리의 힘과 권위는 오직 단 한가지의 목적을 위해서만 추구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탄을 떠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가정에 대한 사탄의 공격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사람의 영적인 온유함과 안정감 없이는 진정한 영적인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시편 18:35).
여 기서 다윗이 말한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라는 의미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자비하고 관대할 수 있게 하셨다”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에게 보이신 온유함이 나로 하여금 온유하게 하였습니다.”

다윗이 이 구절에서 하고자 하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였습니다. 불륜을 저지르고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하여 심지어 살인까지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말로 다 표현 못할 자비와 용서를 보이셨습니다.

다윗은 끔찍한 죄를 저지른 자신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온유하심과 사랑에 벅차올라 이런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매우 다정하시고 자비하셨습니다. 끔찍한 죄를 저질렀던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을 보고도 어떻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엄하고 나쁘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나로 하여금 온유하게 하였습니다.”

2015년 6월 23일 화요일

속사람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로마서 7:22).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린도후서 4:16).

그렇습니다. 바울이 기록한 것과 같이 우리 모두에게는 겉사람과 속사람이 있습니다. 겉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 앞에서 보이는 모습이고 속사람은 하나님께서만이 아시는 모습입니다. 속사람은 뚜렷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속사람을 끊임없이 더욱 강하여져 진정한 영적 권위를 얻을 수 있는 준비를 시키기 위하여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양면성을 우리에게 한 여인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화려한 옷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가장 최신 유행하는 머리모양을 갖추고 있습니다. 육신이 육신을 만족시키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지요.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베드로전서 3:3-4).

베드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교회에게 편지를 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육적인 기준으로 움직이는 교회였습니다. 내적인 깊은 거룩함이나 진정한 영적 권위는 전무하였습니다. 비극적이게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교회에 호의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실된 영광과는 무관한 휘황찬란하게 구성된 프로그램에 매료 당합니다.

여러분, 결코 오해하시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베드로는 크리스천 여성들에게 모두 화장을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영적 권위 안에서 성령의 영향을 받는 삶을 살고 싶다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하여 행동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가치있는 마음과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속사람에 집중하십시오.”

2015년 6월 22일 월요일

완전하신 하나님 by Gary Wilkerson

100여년 전에 프랑스의 발명가는 동영상이라는 혁신적인 발명을 하였습니다. 그는 사진을 연속적으로 정리해서 밝은 불빛 앞에서 빠르게 움직이면 실제로 움직이는 듯한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발명가는 특별한 행사로 영화를 초연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 고위층 관리들을 포함한 관객들은 기대에 가득 찬 채로 강당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역에 도착한 기차” 라는 50초 길이의 영화를 보였습니다. 짧은 영상이었지만 그것은 아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 영상에서는 기차가 카메라를 향하여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사람들이 그 영상을 보았을 때 공황상태에 빠지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영화를 보기 전 그 어떤 전후 사정을 모른 채 다가오는 기차의 영상을 보니 기차가 자신들을 치고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모두 착시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는 그저 영상일 뿐이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속임수가 바로 우리의 믿음을 도전하는 사탄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도전될 때, 우리가 갖고 있는 자원이 필요보다 턱없이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이 지나가는 기차에게 파괴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듭니다. 그럴 때에 마귀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그래 이제 끝났어. 너에게는 너무 과하고 힘든 일이야. 넌 하지 못할거야.” 그러나 ‘실제’로 사탄의 속임수는 겨우 표면적일 뿐이며 우리가 맞이하는 삶의 모든 어려움보다 예수님께서는 더 위대하십니다. 그리고 위대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주관자이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요한복음 6:10).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도망가기보다는 이렇게 앉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요한복음 6:5-6).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 속의 주관자이심을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앉게 하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삶 속에서 맞이할 그 어떤 상황보다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015년 6월 20일 토요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온전히 맡기는 것 by Nicky Cruz

\제 마음을 예수님께 드린 그 순간부터 저는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작은지 깨달았습니다. 세상에는 저보다 재능이 많고, 설교도 유창하게 잘하고, 신학적으로도 박식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완전히 주님의 선하심에 매진한 제 마음입니다. 종종 저는 주님을 너무 사랑하는 마음에 제 심장이 몸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이 느끼고는 합니다. 제 몸이 주님에 대한 제 경배의 마음을 담기에 부족하고, 제 어휘력으로는 제가 드릴 수 있는 예배의 깊이를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제 말로는 제 마음에서 느끼고 있는 사랑과 헌신을 공평하게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가끔은 주님에 대한 제 사랑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눈물이 날 때도 있습니다.

다윗의 시편들을 읽을 때마다 저는 친근감을 느낍니다. 그와 같이 유창하고 우아하게 하나님에 대한 저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수 있고, 그와 같이 하프연주도 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도 합니다. 이러한 재능을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마음을 저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이 겪었던 것을 알고, 춥고 어두운 곳에 홀로 앉아 외로움을 느끼며 편안한 날들을 그리워하는 그 기분을 충분히 압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하심과 은혜를 그리워하는 마음 말입니다.

이런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칭찬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 관해 얘기할 때 이보다 더 힘을 실어 얘기 하실 수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주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을 사랑하셨습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늘 일치했습니다. 그 둘은 가장 친밀하고 강력할 수 있는 한에서 하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외모나 행위, 힘 때문이 아니라 그의 마음, 사랑으로 충만한 영 때문에 일치하셨습니다.

우리의 창조주와 이보다 더 고귀하게 성찬 할 수 있겠습니까? 친밀함과 마음의 생각들을 나누는 것보다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저의 모두 주님께서 “저의 마음을 사랑한다”라고 말해주시기를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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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니키 크루즈(Nicky Cruz)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전도사이자 저작가입니다. 그는 1958년 뉴욕에서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을 만난 후, 폭력과 범죄의 삶으로부터 예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그의 극적 전환에 대한 이야기는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의 저서 “The Cross and the Switchblade (십자가와 칼)”에서 처음 알려졌으며, 그 후에 발간된 그의 베스트셀러 자서전 “Run, Baby, Run (달려라 니키)”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2015년 6월 19일 금요일

의의 공효

다윗은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시 23:4). 원수가 목전에서 무엇을 던지든지 다윗의 속사람은 흔들리지 않고, 마음에 동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에 온전히 거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를 알기 때문에 원수의 거짓말을 더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시기 때문에 사단의 말을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 어려움이 폭풍이 와도, 사단이 격분해도, 원수가 사방에서 몰려와도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죽음의 목전에서도 나의 마음은 평안하다주님께서는 나의 안위를 위해 일하신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와 정반대로 절망에 떠는 크리스챤은 아무런 권위가 없습니다. 그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셨을까?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라고 생각만 합니다. 모든 능력의 원천들을 몰수당했으므로 그들의 삶은 혼돈과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심는 것에 거을렀기 때문에, 위기의 순간에 말씀에 의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단을 두려움으로 떨게하는 의는 오직 공효의 의 뿐입니다.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사 32:17). 단순히 술을 마시지 않거나 약을 하지 않는다고 사단을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과 아닌 일이 적힌 책만 따르고 살 수 있겠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해주지 않습니다. 의의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그것에 삶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렇게 게 단한 것입니다.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고 이사야가 말 했을 때, 히브리어로 안전은 자신감을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약속의 믿음은 우리안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을 부여합니다. 심하게 유혹이 계속 올지라도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심을 압니다.

줄여말해 영적 권위는 이것입니다: 나는 주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주님의 말씀대로 모든 계명에 순종한다. 주님 말씀에 대한 믿음은 내 마음을 평안으로 이끈다. 사단은 더이상 내 목전에 어슬렁 댈 수 없다. "사단아, 주님이 너를 꾸짖으신다" 라고 말하기만 해도 사단은 도망갈 것이다.

2015년 6월 18일 목요일

영적 권위를 얻는 것

제자들이 사단에 대적하지 못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오직 기도와 금식으로 대적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께서 저희 속사람을 변화시킬 시간을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주님은 저희 마음이 온전히 주님께 맞춰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과 정기적인 성찬이 없이는 어떤 권위도 얻을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교회, 가정 그리고 힘들어하는 자녀들에게서 사단을 내쫓을 수 있기를 바랍니까? 자녀 앞에서 말다툼 하고 싸우고 흉보면서 어떻게 주님의 영적 능력이 전해지기를 기대합니까? 나가서 술 마시고, 자녀들이 약을 하는 것을 알았을 때 벌컥 화를 내면서 어떻게 권위가 세워지기를 원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라고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4:30). 이와 같이 말할 수 없다면 여러분은 능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단은 여러분의 가정을 걷잡을 수 없게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영적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열쇠를 이 글 속에서 알려줍니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벧전3:1). 여기 나오는 "말"라는 단어는 삶의 방식이나 행동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주님의 신부를 지칭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 아내의 모습에서 진정한 영적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여인은 성경에 쓰여 있기때문에 남편에게 순종합니다. 또, 주님의 말씀에 의해 다스려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숨겨진 속사람이 주님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런 아내들은 남편을 책망하거나 연설을 늘어놓거나 설교할 필요가 없다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아마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남편을 주님께 데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화한 말투와 주님과 동행하는 능력이 이미 증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의 남편은 성격이 불쾌하거나 오만할 수 있습니다. 부인으로서 아마 여러번 하고 싶은 말을 참아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에 대한 그녀의 순종 때문에 남편에 대한 영적 권위를 매일 매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전능한 능력이 그녀에게 더 부어져서 남편을 옥매고 있는 사단에 대항하는 권위가 부어지는 것입니다.

2015년 6월 17일 수요일

오늘을 위한 능력

사도 베드로는 저희와 똑같이 살과 피로 지어졌지만, 사단을 물리치는 영적 권위를 행사했습니다. 성전 문에 있는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라고 하였더니 그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날 종교 지도자들은 베드로의 능력을 알아보고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4:7).

성경 어디에서도 이 능력이 오늘날 저희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나는 여태껏 너희를 도와주었다. 이제는 너희 혼자서 하거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어떤 하나님이 백성을 광야에서 필요할 때 힘을 주시고 그 어느 세대보다도 더 하나님이 필요한 이 마지막 때에 모른 체 하시겠습니까?

성경에 의하면 사단의 힘은 저희 날에 더 강해집니다: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너희에게 내려 갔음이라 하더라" (계 12:12). 왜 방어할 힘도 없는 약한 교회를 공격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겠습니까? 그의 백성은 하나님의 신성한 권능을 잃어버린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영적 권위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카리스마적인 집단에서 더 나타납니다.

기름 부어진 영적 권위로 목사님들이 신도들에게 안수해 주는 능력의 행사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수받은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 사단과의 싸움에 처절하게 지는 경우를 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어봤던 것처럼 그 사람도 “왜 나는 이런 귀신을 쫓지 못하는 것일까?”라고 질문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안수해준다고 초자연적인 힘을 그냥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선물이 아니며 살아가는 방식이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능력을 달라고 했다고 해서 갑자기 기적을 행사하는 능력자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신성한 권위를 베드로가 말한 이런 사람에게 맡기십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1 Peter 3:4).

2015년 6월 16일 화요일

적의 모든 능력을 넘어서

저는 오늘날의 교회가 영적 권위의 부재로 전면적인 위기에 처했다고 믿습니다. 저는 자녀들의 문제로 절망한 목사님이나 부모들의 전화를 꾸준히 받습니다. “제 아이가 약에 중독된 걸 알았는데 뭘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라고 애원합니다.

그 부모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상심에 빠져 진정한 도움을 줄 영적 권위자를 찾으려 필사적입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궁금합니다: 이분들의 집에는 영적인 권위가 어디에 있는가? 제 의견으로는 많은 부모가 그렇지 않은 데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집에서 누군가는 사단을 자녀에게서, 가정에서 쫓아낼 힘을 가져야만 합니다. 모든 고통받는 부모들에게 “자신부터 영적인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아이가 부모를 배제해도, 기도의 다락방에서 부모는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신성한 권위를 가지고 오셨지만, 저는 예수님이 아닙니다.”라고 항변하실 수 있겠지만, 사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영적 힘을 가진 사람으로서 사단을 대적하셨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사단과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그와 똑같이 사단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항상 예수님께 인간으로 접근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막1:24). 사단은 예수님을 이스라엘 특정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피와 살의 몸으로 태어나셨지만, 모든 악한 힘에 대적하는 완전한 영적 권위를 행사하셨습니다.

“사단을 물리칠 그런 능력이 있다면 좋을 텐데 나에게는 사단을 도망가게 할 그런 권위가 없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능력을 행사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마 10:1).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눅 10:19).

2015년 6월 15일 월요일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까 by Gary Wilkerson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그 행하시는 치유의 역사와 기적들이 많은 무리의 마음을 끌었었습니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 . .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요 6:3, 5).

성경학자들은 이 무리를 대략 만에서 만오천 명 가량으로 추정합니다. 이 많은 인파가 몰리는 광경은 아마도 제자들에게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제자들이 맞는 사람을 따르고 있다는 것과 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검증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군중들이 몰리면서 제자들은 불가능한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6:5). 꿈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느껴보기도 전에 현실에 맞닥뜨리게 된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상황에 맞닥뜨려진 적이 있습니까? 처음 가졌던 좋은 직장을 생각해보십시오. 꿈을 채워줄 첫발을 내디딘 것 같아서 너무 흥분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직장 상사가 생각했던 바와 다르고 직장동료들도 나를 꺼려하고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직장에 쏟아야 하는 시간은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고, 가족들과 보내야 할 귀중한 시간을 희생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어.” 라고 깨닫게 됩니다.

아마도 빌립이 그 순간에 이렇게 느꼈을 것입니다. 당황해서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6:7). 그것은 큰돈이었지만, 그 돈이 있었다고 할지언정 그 군중을 먹이기에는 부족햇습니다.

빌립의 대답을 읽으면서 이 구절이 눈에 띕니다: “부족하리이다.” 저희가 고난에 맞닥뜨려질 때 이 생각이 저희 머리에 얼마나 자주 듭니까? 얼마나 자주 이런 생각을 합니까?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재능도 없고 능력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아. 주님 안에서 내가 강하기는 한 걸까? 성령님으로 가득 차 있나? 주님, 제가 좌절로 가고 있나요?” 이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커다란 승리로 부르셨지만, 그날 빌립은 그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에게도 같은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동행하면서 놀라운 일이 있어나는 것을 믿도록 부르셨습니다. 저희 삶 가운데 믿음이 필요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저희에게 필요한 기적을 주실 주님을 믿습니까? 아니면 저희의 약함 때문에 좌절하고 있습니까? 여기서 주님의 시험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6:6).

2015년 6월 13일 토요일

자원하여 처한 위험 by Jim Cymbala

영적 세계에서는 우리가 자원하여 전쟁터 선두에서 싸우지 않는 이상 절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최대한의 잠재력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왕과 연합하여 그의 이름으로 그의 나라를 위해 싸우지 않는 한 우리는 어떠한 능력과 기름 부우심이 우리에게 가능한지 알 수 없다. 편한 곳에 앉아서 서로 성경을 논의하고, 현재 시대가 얼마나 타락했는지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관계없다. 그는 전쟁 가운데 우리를 만나신다. 우리가 싸워야 할 원수라는 대상이 있을 때 그는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역대상 11장 12~14절에 보면 엘르아살이란는 자가 다윗과 함께 블레셋을 상대로 전쟁에 나간다. “보리가 많이 난 밭이 있더라.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레서 도망하되” 라는 구절에서 보듯 적군은 엄청난 상대였다. 작은 접전이 아닌 더 강력한 적군을 상대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쟁이였다. 많은 이스라엘 군인들은 몰려오는 적군을 보고 도망치기까지 했다.

하지만 엘르아살은 달랐다. “그가 그 밭 가운데에 서서 그 밭을 보호하여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으니 여호와께서 큰 구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14절). 여기서 우린 인간과 하나님이 함께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홀로 일하시지 않으셨다. 블레셋을 하늘에서 내리는 번개로 무찌르지 않으셨다. 대신 그 날,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을 부어줄 만한 자를 그 보리밭 가운데서 찾으셨다. 다른 자들이 두려움 가운데 도망할 때 다윗과 엘르아살은 요동치 않고 서 있었던 것이다.

사무엘 하 23장 10절에 보면 우리는 엘르아살에 대해 더 자세히 알수 있다. “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엘르아살은 엄청난 용기와 열정으로 싸워 그손이 칼에 붙어 놓지 못할 정도였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한 용사인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쥐고 승리가 임할때 까지 절대 놓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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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짐 심발라(Jim Cymbala) 목사님은 뉴욕의 한 소외된 지역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건물에서 이십명도 채 못되는 성도들과 함께 브루클린 테버네클(Brooklyn Tabernacle)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브루클린 태생이며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 그리고 게리 윌커슨 목사님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월드챌린지(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5년 6월 9일 화요일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

하나님을 만나 변화 받는 과정은 매우 새롭고 특별한 일입니다. 우리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어쩔땐 감당치 못할 정도로 급작스럽습니다. 죄와 사망의 삶에서 그리스도 안의 생명으로 급히 옮겨지는 것은 매우 기이한 일입니다.

우리의 처음 신앙생활은 어린아이가 걸음을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아이의 첫걸음은 매우 감격스러운 순간입니다. 엄마와 아빠가 “넌 할 수 있어. 이리 오렴!” 이라고 외칩니다. 아이는 비틀거리며 한걸음 두 걸음 내딛습니다. 그럼 부모들은 곧바로 아이를 껴안고 칭찬합니다. 아이의 형과 누나들도 잘했다 격려합니다. 아이는 모든 사람의 집중을 받고 이는 매우 신이 나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곧 그 아이가 자라며 더이상 가족의 중심이 아닌 것을 느낍니다. 넘어지면 혼자 일어나야 하고 돌아다니며 온 집안을 엉망으로 만듭니다. 화분을 쓰러트리고 냄비들을 흩뜨려 놓고 옷들을 서랍에서 꺼냅니다. 그리고 혼나게 됩니다. 이제는 더이상 신나지만은 않습니다. 첫걸음 때는 그토록 친창과 격려를 해주었건만 이제는 모든게 달라졌습니다.

여러분의 영적 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당신이 어린아이였을 때는 하나님이 나에게만 특별히 관심을 쏟으시는 듯 했습니다. 쓰러질 때마다 당신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했듯 당신은 계속 아이로 남아있으면 안 됩니다. 어린아이가 차도로 나가면 안 된다고 배우듯 당신도 영적인 위험이 무엇인지 배워야 합니다. 당신이 넘어질 때마다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기어 다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으로 걷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엡 5:1~2)

2015년 6월 8일 월요일

하나님의 사랑에 매임 받아 by Gary Wilkerson

우리가 살고있는 문화는 우리에게 가장 최고의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문화는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을 대한는 태도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모든 복을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선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중심은 하나님의 영광이지 우리의 욕심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상들을 엎으시며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요2:1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이처럼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모든 것들을 성전에서 없애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심으로우리 안에 이러한 방해물들을 없애시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울 공간을만드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가 다시 한 번 기도와 믿음과 승리의 전으로 변하길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돈 바꾸는 사람들을 내쫓으실 때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7)” 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진실한 열정을 보았습니다. 예수의 행동이 냉혹해 보일 수 있었지만 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실제로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핑계로 자신의 미지근함을 정당화합니다. 하지만 은혜는 절대로 우리를 미지근한 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은혜받은 자는 열정으로 타오릅니다. 우리의 마음을 더욱 감찰하게 되고, 거룩한 생활을 하기 위해 노력하며 성령의 역사 하심을 갈급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은혜는 갚은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길 제자들이 예수의 행동을 보고 ‘기억하더라’ 라고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열심을 잊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돈 바꾸는 사람들을 내쫓으실 때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에 삼켜지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열심을 잃으셨습니까? 미지근한 신앙생활과 문화에 도취해 있습니까? 예수께서 당신의 마음 안에 상들을 엎으시도록 하십시오. 당신의 예배 가운데 주님만이 다스리게 하셔서 뜨거운 열정을 되찾으십시오 다시 한 번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이 당신을 삼키게 하십시오. 아멘!

2015년 6월 5일 금요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장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5:7).

당신은 매일 지루하고 중복되는 일들은 되풀이합니다. 예를 들면, 주중에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같은 아침식사를 하고, 같은 길을 이용하여 출근합니다. 또 점심식사는 매일 같은 식당으로 가고, 집으로 가는 길 같은 커피숍에 들르고, 운전하는 동안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습니다.

우리의 영적 삶도 똑같아 질 수 있습니다. 주일 아침에, 교회에 가서 매주 같은 자리에 앉습니다. 같은 찬송을 부르고 심지어 매주 같은 기도를 합니다. 우리는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매일 하던 것보다 더 하게 되지 않는 것 같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며,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지만 더 이상 다양성이 없다. 수년 동안 똑 같은 일을 반복해왔지만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것 같다.”

당신이 느끼는 감정이 당신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그러한 생각은 사실 당신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앗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끊임없는 반복적인 일상을 맞이합니다.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성장의 실제적인 증거는 우리가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의 일에, 매일을 매주를 매년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은혜 안에서 자라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더욱 많은 것을 또는 더욱 위대한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진정한 성장은 우리가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하며, 끊임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한다는 확신을 갖고 일하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우리는 원을 그리거나 선을 그리고, 글자를 크게 써나가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리고는 글자를 작게 그리고 더욱 가깝게 쓰는 방법을 배워 결국에 그 단어들을 모아 문장을 쓰기 시작합니다. 비록 당신이 같은 일을 장시간 반복해왔다고 할지라도 당신은 여태껏 글을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무의미한 반복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이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의 성취의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영적인 성장이 새롭고 특별한 일을 하는 것보다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반복적인 하루하루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치고, 상처받고, 고난을 받을 때 포기 없이 하나님을 찾는 다는 것은 많은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당신이 지금 영적으로 죽었다는 생각이 들거나, 믿음 안에서 더 이상 진전이 없다고 느껴질 때,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는 지금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2015년 6월 4일 목요일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

당신은 지금, 당신을 성숙하게 하기 위하여 당신의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육체적 성장에 비유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육체가 영양분을 공급 받듯, 영혼도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2장 19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그러한 성장은 머리로부터 비롯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안에서 거하면서 예수님을 믿을수록, 예수님의 생명이 당신의 영혼을 끊임없이 공급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명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심지어 잠잘 때에도 당신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원천이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삶에서 어떤 일을 겪고 있든 어떤 기분이든 상관없이, 매일 신선한 생명을 공급해 주실 것 입니다.

이스라엘민족이 광야에서 40년을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보내신 만나를 먹으면서 생명을 유지했습니다. 만나는 “천사의 음식”이라고 불리며, 이스라엘 민족에게 필요한 모든 영양소뿐 아니라 면역력을 증가시키는 역할 까지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유행하던 질병에 걸리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위 가나안과 블레셋 사람들이 역병으로 죽어갈 때, 이스라엘 민족들은 면역력이 있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우리의 만나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천국에서 우리에게 온 떡이며, 우리의 영적 면역력을 증가시킵니다. 육안으로는 우리의 몸의 면역력이 좋은 영양소로 인하여 강해지는 것을 볼 수 없듯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이 겉으로는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때 영적인 면역력이 더욱 강해질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때때로 죄에 유혹을 받을지라도, 예수님을 믿으며 성장한 이래로 세상의 유혹을 이겨낼 힘이 자라났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더러운 것들과 죄를 볼 때에 혐오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이 세상이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직장 동료들이 “금요일이니 파티를 하자”라고 소리칠 때,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주일까지 이틀밖에 안 남았구나.” 당신이 세상과 다른 이유는 바로 하나님 안에서 자라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5년 6월 3일 수요일

더욱 풍성히 하여라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의 교인들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삶을 살고 있다고 격려해주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마땅히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지 우리에게서 받았으니”(데살로니가전서 4:1). 그러고는 이러한 권고를 추가하였습니다. “너희가 행하는 대로 더욱 풍성히 하여라”(4:1).

더욱 풍성히 하라는 의미는 아주 많이 증가시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온전한 복음의 말씀아래에서 자라나 단단한 반석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은혜 안에서 믿음, 지식 그리고 사랑이 증가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도 유사한 말을 전하였습니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찌니라”(고린도후서 8:7).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영이 너희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으니, 모든 면에서 너희가 가진 것 – 시간, 재정 그리고 재능 등-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구절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된 모든 이들이 은혜 안에서 자라나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 교육자, 선지자 그리고 전도사들에게 재능을 주셔서 하나님의 교회가 자라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난 모든 믿는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아기로 남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자라나서 거짓된 것들에 휘둘리지 않으며 세상과 나눌 수 있는 굳건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삶에 끊임없는 증가와 풍성함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0).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 은혜 안에서 성장한 것에 대하여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요한계시록 2:19).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처음 시작하였을 때보다 더욱더 깊어졌으니, 내 생명으로 인하여 너희가 더 풍성하게 될 것이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언 4:18).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욥기 17:9).

2015년 6월 2일 화요일

믿음의 불씨를 다시 켜십시오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요한계시록 3:1).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이든 해줄 의향이 있는 선한 사람 일수도 있다. 이 세상과 교회 안에서나 좋은 평판과 명예를 갖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참 생명을 누리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네 삶 안에 사망의 요소가 침투하였다. 이 세상의 것으로 네가 더럽혀졌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나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3:4). 여기서 더럽혀졌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기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고를 주십니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3:2).

사데교회의 교인들은 경고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기다리거나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더욱 태만한 태도를 보였고, 하나님께 나아와 도움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옷이 더럽혀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더럽힘이란, 흰옷에 적나라하게 난 검은 자국, 즉 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마귀를 대적할 방어물이 없는 것이다. 기도에 대한 태만은 너희의 옷을 더럽히게 만들 것이다.”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3:4).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너희 안에 아직도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조금 남은 불씨처럼 남아있다. 하나님의 거하심을 잃고 싶지 않고, 황폐한 마음을 갖고 싶지 않아 한다. 그러므로 다시금 기도굴에 들어가 하나님을 찾아라. 너희의 마음을 부싯돌처럼 사용하여 불씨를 만들어, 믿음의 바람을 불어, 죽음에 사로잡히기 전에, 불씨가 죽기 전에 살리거라.”

님을 만나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인 기도를 절대로 무시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영생이 달려있는 사안입니다. 기도하며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하나님과 접촉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제공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필요를 충족시키시며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모두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015년 6월 1일 월요일

하나님의 성전 by Gary Wilkerson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성령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고린도전서 6:19 참고). 어떤 것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정을 빼앗아가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상을 엎으셨을 때(요한복음 2:13-17 참고), 예수님은 상인들의 장사판 만을 뒤엎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동물로 제사를 드려 하나님께 예배하는 종교적 관습에 안일한 사람들의 모습을 엎으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와 구원은 더 이상 양과 염소, 비둘기로 제사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죽음으로 완성될 것이다.”

성전에서 예수님께서 상을 엎으신 일화는 우리 세대를 반영하는 비유를 보여줍니다. 오늘날의 수많은 교회들은 다양한 활동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여러 프로그램 중에서는 해외 미션트립부터 전도행사, 작고 큰 교제 모임 등이 있습니다. 예배들은 밝고 반짝이는 조명과 강력한 음향효과가 더해져 강한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활발한 활동가운데서도 중심이 잊혀질 때가 많습니다. 그 중심은 바로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중심이 아닌 활동과 예배를 하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기 위해 노력을 할지라도 믿음 없이 겉으로만 하는 제사는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기여하는 바 없는 인간의 개인적인 노력일 뿐입니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의로워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중심이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그 교회는 죽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하도록 명령하신 의도는 그것이 죄악된 인류를 구원할 방법으로 의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에 왕들을 세우신 것처럼, 완벽하지 않은 방법이지만 조금 더 나은 것을 주시기 위하여 허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아브라함에게 보이셨습니다. 그 당시에 문화적으로 동물과 심지어 아이들까지도 희생함으로써 격노한 신들을 달래고 숭배하였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가 제사를 위한 제단을 쌓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망설임 없이 순종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의 반응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람들은 신에 대한 큰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신이 말하면 무조건 복종하였습니다. 불순종하였을 때는 그 대가로 기근과 역병을 겪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순종은 두려움에 비롯된 순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의 하나님이 이방신들과는 다른 만군의 여호와이심을 알았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방신들과는 다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칼을 들었던 순간 하나님께서 그를 막으셨습니다(창세기 22:11-12 참고). 그 이후 하나님께서는 수양을 제물로 준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더 이상 희생제물은 필요 없단다. 내가 너를 위한 대속제물을 준비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그러셨듯이 하나님께서도 상을 완전이 뒤엎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