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28일 토요일

우리는 아비의 집을 나오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by Claude Houde

한정된 연대적 지식으로 창세기 11장과 12장 말씀을 속독한다면, 그것은 미성숙한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운명의 손길을 아브라함의 아비에게 뻗치셨을 때 그가 죽었다고 오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철저한 족보의 분석으로 역사적 인물들의 수명과 나이를 연구한다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성경 해석가들은 아브라함이 적은 땅과 불모의 땅, 그의 아비가 만족스럽고 안락하게, 그리고 타협하고 살며 누렸던 땅을 떠나야만 했다고 동의합니다. 그는 자기 아비의 집에서 나와야만 했습니다. 거부할 줄 아는 믿음은 초자연적인 것을 받는 믿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적은 땅, 불모의 땅에서 죽지 않으리라는 결단과, “네 아비의 집을 떠나”(창세기 12:1 참조)라는 부르심에의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기서 지금 우리가 봉착하고 있는 문제들을 가지고 누군가의 조상을 경시하거나 지난 세대를 비난하려는 영적 자만심, 교만, 가식, 또는 업신여기는 태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구와 비교하라고 부르심 받지 않았으며, 대신 우리 육신의 부모를 믿음 안에서 존중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유산을 소중히 여기고 있고, 잘 간직하고 있으며, 우리 이전에 걸었던 많은 사람의 훌륭하며 진실된 증언을 기념합니다.

그러나 저는 초자연적인 것을 받고자 하는 갈망의 믿음은, 평상적인 것들과 우리 주위에 흔히 있는 것들, 또는 우리 이전에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열망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은 범속한 것과 최소가 요구되는 사고방식을 거부합니다. 당신 가족 내력의 성격과 한계, 또는 영적 배경이 무엇이든,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 아비의 집을 나오라고 당신을 부르십니다. 사울의 갑옷은 현대의 거인들을 무찌르기에 충분치 않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아비의 집을 나와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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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클라우드 어드(Claude Houde) 목사님은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s의 주된 강사입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New Life Church는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서 개신교 교회로서는 성공하기 힘든 캐나다의 보수적인 지역에서, 지금은 교인 수가 3,5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015년 2월 27일 금요일

순종은 귀하고도 값진 일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꼐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히브리서 11:24-27).

모세는 애굽의 모든 물질 - 금은보화, 말, 후궁 등의 호화스러운 사치품들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왕의 아들인 애굽의 왕자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의 아들이라는 칭함을 거절하였습니다. 그 결정으로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는 능욕이 애굽의 금은보화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모세의 온 마음은 이 세상의 물질이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향해있었습니다.

순종하는 것이 과연 값진 일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과연 이득이 있는 일일까요? 성경 속 인물인 솔로몬과 모세를 비교해보겠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ㄱ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도서 2:10-11). 솔로몬은 전도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2:17)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2:23).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4:2).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5:13).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7:26).

다시 모세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120살이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 그를 천국으로 부르실 때까지 그의 눈은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전혀 쇠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육신을 직접 취하셨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이신 간증은 다음의 기록된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신명기 34:10-11). 순종은 귀하고도 값진 일입니다!

2015년 2월 26일 목요일

불순종의 결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결국에 크리스천의 도덕성, 행실 뿐 아니라 성격까지 붕괴시킵니다.

모든 것은 명백한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으로부터의 노골적인 불순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불순종에 더하여 죄에대한 둔감성과 더불어 절반의 마음만으로 하는 회개 등은 솔로몬과 같은 완전한 타락의 최후를 맞이하게 될것입니다.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같이 좇지 아니하고 … 저가 또 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저희가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시고”(열왕기상 11:4-9). 이 말씀은 제 뼛속 깊이까지 소름을 돋게 만듭니다.

솔로몬은 진정으로 말씀에 둔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에게 그 어떤 영향력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을 정말로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이방 여인을 위하여 집을 하나 지어준 것으로 시작하여 끝에서는 거대한 하렘(harem)이 있었습니다. 바로의 딸도 솔로몬의 수천명의 첩 중 한명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진노하시고 침묵하시는 동안 솔로몬 또한 늙고 초췌해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고, 그에게는 더 이상 기쁨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상처입었고 그는 헛된 삶에 대한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높은 세금으로 건축된 이방신 성전들로 오염되었고, 왕은 어마어마한 궁전들과 정원들에 따분해하며 과음하였습니다. 솔로몬 왕의 마음은 우상숭배로 가득차버렸고, 하나님을 찾던 과거는 희미한 기억이 되어버렸습니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전도서 1:14).

성전을 건축하고 깊은 감동으로 기도하였던 그 솔로몬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꺠닫고 이 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살마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그리하시면 저희가 주께서 우리 열조에게 주신 땅에서 사는 동안에 항상 주를 경외하리이다”(열왕기상 8:38-40). 아직도 여러분의 우상에 매달려 있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의 작은 죄들에 대한 변명을 하고 불순종을 합리화시키고 계십니까? 지금 돌아서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격렬하고 겉잡을수 없는 부도덕과 배교의 불이 시작될 것입니다.

2015년 2월 25일 수요일

하나님 반 쾌락 반 크리스천

솔로몬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 반 쾌락 반으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삶에 반절 밖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절반의 애통을 느꼈고, 절반만 회개하고, 자신의 절반만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거룩한 성소, 법궤 근처에 살고있는 그의 이방인 아내에 대하여 자신의 죄를 절반 정도를 꺠달은 듯 싶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방인 아내를 이사시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솔로몬이 바로의 딸을 데리고 다윗 성에서부터 저를 위하여 건축한 궁에 이르러 가로되 내 아내가 이스라엘 왕 다윗의 궁에 거하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궤가 이른 곳은 다 거룩함이니라 하였더라”(역대하 8:11).

사실 솔로몬은 이방인 아내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이 일을 처리를 해야할텐데… 하나님꼐 내가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드려야겠다.” 그런데 솔로몬은 아내를 애굽으로 다시 돌려 보냈을까요?

오늘날 교회에는 하나님 반 쾌락 반의 삶을 사는 크리스천들이 많습니다. 절반의 회개, 절반의 변화 등의 특징을 보입니다. 말씀을 듣고 작은 떨림을 느낍니다. 아직도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노골적인 죄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옳은 길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님꼐서 이미 알고 계십니다. 저는 주님을 무척 사랑합니다. 저는 조금씩 변하고 있고 더 나아지고 있습니다.” 자, 여러분! 잘하려고 하는 마음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고 완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도 그는 죄를 인식하였지만 큰 위험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셔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런 죄 속에서 살면서 솔로몬은 일년에 세번씩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의 임재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바로 저런 상태가 크리스천으로서는 가장 위험한 상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기도는 응답되고, 기쁨과 즐거움을 하나님 안에서 느낄 수 있지만 말씀의 권위가 없는 삶의 반복적인 불순종이 있습니다. 점점 자신의 수렁에 빠져드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솔로몬에게 강력하고 명백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순종하고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한단다.” 이 와중에도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고,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과 자비에 눈이 멀어 점점 말씀에 둔감해졌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축복을 받고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하나님꼐서 주시는 기쁨도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삶을 살았기에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야.” 결코 괜찮지 않습니다.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2015년 2월 24일 화요일

말씀에 무디고 둔감한

말씀이 뚫지 못한다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겠다고 고백하면서 행동은 그렇지 못할때를 의미합니다. 마음이 단단하여져서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고 변화가 없을때를 말합니다. 어떤이들은 “복음에 무디어진(둔감)”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성경 속 인물들을 생각할 때 가장 말씀에 둔감했던 인물로 누가 떠오르십니까? 강력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으면서도 삶과 행동에 전혀 영향받지 않은 인물입니다.

저는 사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사무엘상 15:3). 사울은 이 말씀을 불순종하고 오히려 이렇게 행동하였습니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사무엘상 15:9). 그리고는 사울은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컨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사무엘상 15:13). 사울은 남겨 둔 양들의 울음소리를 듣고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사무엘상 15:19).

사울의 마음이 단단하여지고 말씀에 무뎌져 보이지 않습니까? 아니라면 왜 사울은 복음을 전하는 선지자에게 철면피 거짓말을 할 수가 있었을까요?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꼐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사무엘상 15:20). 이미 엎질러진 물에, 피 묻은 손에 사울은 다른 이들을 탓하면서 자신의 죄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사무엘상 15:21). 사무엘은 사울이 문제의 근원을 파헤쳤습니다. 그는 사울이 이미 말씀에 무뎌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이미 전술사에게 믿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사무엘상 15:23). 말씀에 무디어진 사울은 끝내 점술사를 믿고 따라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2015년 2월 23일 월요일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by Gary Wilkerson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넘치게 받을 때에 성령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잠시 멈추고 너희의 마음을 돌아보겠니”

제가 속한 교회가 설립 3주년이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 설교를 하기 전에 많이 망설였습니다. 온 교인이 혼란스러워하며 저를 쳐다볼 모습을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교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 같았습니다. “잠깐.. 그러니깐 우리가 지금 잘하고 있어서 축복 받았지만 잠시 멈추어 돌아본 후에 다시 변화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내의 결함을 타박주는 남편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구원받았을때에 우리는 걸레 같은 자신의 모습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제 요점은,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실 때 나의 모습, 나의 마음을 돌아보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은 어떤 부분일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던 것을 내가 따르지 않은 부분이 있었는가?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내 삶의 요소는 어떤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끊임없이 이런 자문을 하게 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일하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승리를 함꼐 누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한 마음을 온전히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에 말씀하시고 계시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혹시 삶의 작은 부분을 내려놓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께서 무시하셨던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금 순종하라고 하십니까?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고 따르십시오. 삶의 작은 부분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여러분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볼 준비가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시고, 말씀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하여 기뻐하시며, 여러분을 통하여 일하시고 축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예레미야애가 3:40).

2015년 2월 21일 토요일

하나님은 절대 저를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by Nicky Cruz

당신은 마지막으로 숨 쉴 때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그분을 위해 훌륭한 일들을 하기 원합니까?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한 영광스러운 미래를 계획해주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 스스로 그것을 하려는 노력을 멈추십시오. 당신 인생의 경로를 스스로 설정한 다음, 하나님께 그것을 축복해달라고 요구하지 마십시오. 대신 그분을 알아가기 위한 시간을 가지며 그분 임재에 거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자유롭게 그분을 경배하고, 당신의 깊은 영혼으로부터 그분을 찬양하며 사랑하십시오. 매우 작은 것일지라도 그분께 순종하세요. 기도하며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그분 창조의 영광에 경탄하십시오! 

오직 하나님께만 당신의 마음을 고정시키는 법을 배우세요. 그러면 그분이 주목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확신해도 되는 한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만을 위한 언약을 미리 준비해놓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미래를 위해 마련된 특별한 계획과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 스스로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느 것보다도 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만일 그분이 당신의 마음에 아직 그 언약을 주시지 않았다면, 당신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음을 그분이 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주시하며 당신과 그 비전을 나누기를 원하시고, 당신이 그것을 포용하도록 돕고 싶어 하십니다. 

제가 이십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을 때, 저는 제 장래에 대해 혼란스러웠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 인생을 위해 계획하신 것을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 그때 저는 단지 예수님과 사랑에 빠진 청년이었고, 그분 임재 안에서 그저 제 여생을 보내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그분이 저를 위해 언약을 준비해놓으셨음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제 삶을 위해 그처럼 엄청난 목적을 갖고 계실 줄은 더욱이나 몰랐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전도사가 되리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어렸고 미숙했습니다. 제가 청중 앞에서 설교를 할 수 있으리라고는 감히 생각도 못했습니다. 제 성경지식은 협소했으며 짧았습니다. 저는 사투리도 심했을뿐더러 예의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길거리 세상 물정에 익숙했고, 그것이 제가 아는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열정을 가지고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분이 내게 무엇을 요구하시든 순종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분의 언약을 조금씩, 하루하루, 달이면 달마다 포용해나갔습니다. 저는 신실함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절대 저를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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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니키 크루즈(Nicky Cruz)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전도사이자 저작가입니다. 그는 1958년 뉴욕에서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을 만난 후, 폭력과 범죄의 삶으로부터 예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그의 극적 전환에 대한 이야기는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의 저서 “The Cross and the Switchblade (십자가와 칼)”에서 처음 알려졌으며, 그 후에 발간된 그의 베스트셀러 자서전 “Run, Baby, Run (달려라 니키)”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2015년 2월 20일 금요일

그들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서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상심한 마음으로 애통해 했던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은 자들의 죄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리들처럼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에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범람하는 간음, 반역, 타협을 보고 비통해했으나 “하나님, 저 또한 죄인입니다.”라고 겸손히 기도했습니다. 그들 자신의 죄는 저 역겨운 죄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죄를 말합니다.

에스라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우리의 악한 행실과 큰 죄로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인하여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에스라 9:6, 13, 15)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10:1)

느헤미야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느헤미야 1:6-7)

다니엘 역시 하나님 백성의 죄를 자백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및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다니엘 9:5-6, 20)

이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으며 거룩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과 타협하거나 섞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그들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백성의 죄를 자백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저들의 길을 따라 저들처럼 마음을 결단하고, 금식과 기도, 눈물과 애통함으로 죄를 회개하며 주님을 찾는다면, 당신에게도 그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당신을 어루만질 것이며, 그분은 당신에게 말씀을 보내실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심장을 공유하며 그분의 영광스러운 임재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그곳에 거할 때, 우리가 얼마나 그분의 영광과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당신은 비로소 깨닫게 될 것입니다.

2015년 2월 19일 목요일

하나님 손에 의해 만지심 받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향한 대단한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 1:2-4)

남은 자들은 거룩한 성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비난과 무기력함이 그들을 덮었고, 모든 것은 여전히 황폐한 상태였습니다. 영적 진보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성 경은 느헤미야가 울고 슬퍼하며 “주야로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6절) 그것은 하나님께서 한밤중에 그를 일깨워 그의 영혼에 부담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니었고, 이 하나님의 사람은 스스로 부담을 짊어졌습니다! 그는 그것을 요구했습니다!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2절 참조)

그처럼 다니엘도 몇 시간이고 몇 날이고 몇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초자연적 부담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도 다니엘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겸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부지런히 공부하고 명철을 얻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진실된 부담을 추구하며 양육시켰습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다니엘 9:3)

이 얼마나 강렬한 애통과 울음인지요! 다니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에 나 다니엘이 세 이레 동안을 슬퍼하며, 세 이레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다니엘 10:2-3, 8) 하나님의 손이 다니엘을 어루만졌을 때 이러한 말씀이 보좌로부터 내려왔습니다.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12절) 히브리어로 “겸비하다”라는 단어는 순복의 상태로 들어가기 위해 육신을 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노라!”

2015년 2월 18일 수요일

열정의 영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시려 할 때, 그분은 백성들에게 열정의 영을 부어주십니다. 우리는 더이상 영적으로 게을러지거나 태만해지고, 무관심하며 안이해지면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깊고 진지하게 여기며,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움과 열정으로 타올라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며 그분 말씀 앞에 떠는 자들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이러한 남은 자들은 거룩한 선지자들의 말을 들으며 믿어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요동하거나 식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날이 갈수록 하나님을 향해 더욱 진지해져야만 합니다.

에스라의 열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침해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대적하는 그의 열정을 면밀히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과 섞이는 것에 대한 그의 처절한 증오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이에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떠는 자가 이 사로잡혔던 자의 죄로 인하여 다 내게로 모여 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에스라 9:3-4)

이 얼마나 놀라운 광경인가요? 에스라는 그의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사로잡혀 갔던 자들의 죄로 인하여” (4절) 극심하고 경건한 슬픔에 싸여 넋을 잃고 앉아있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에 떠는 자들이 하나둘씩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죄를 수치스러워하는 단 한 사람이 있었고, 그를 통해서 죄를 비통해하는 자들의 지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에스라 10:1)

지금 하나님 성도들의 전 가산은 세상과 친숙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 많은 분이 거룩과 세상과의 분리를 위해 부르짖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땅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비통한 마음을 느끼며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분과의 동행을 매우 진지하게 여겨야 할 때가 다가왔음을 잘 알고 계십니다.

2015년 2월 17일 화요일

성령의 얼굴 붉힘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6:13, 15)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끔찍한 일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죄를 감추기 위해, 그들은 피상적 평강과 안전의 장막 뒤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탐욕과 욕정이 그들의 마음을 장악했고, 그들은 거짓 슬픔으로 그들의 아픔을 위장했습니다. 그들의 온 삶은 거짓 눈물, 거짓 회개, 심지어는 거짓 치유 등, 피상적인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 사회 안에서와 자신들의 삶 속에서, 죄에 대한 그들의 수치심과 비통함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와 진노를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이제 죄는 “그저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이 죄를 지었을 때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다.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뿐더러 얼굴조차 붉히지 아니하였다!”

성령의 얼굴 붉힘은 단지 겸손으로 인한 얼굴 붉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처받고, 수치스러우며 망연자실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과 성결이 짓밟혀서 그분의 명성이 더렵혀진 감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타는 듯한 진리의 메시지를 잘 알았지만, 그것을 향해 등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반역했습니다!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 얼굴을 반석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 (예레미야 5:3) 그들은 매춘부들과 상관했으며 그들 이웃의 아내들을 추구하는 등의 간통죄를 범했습니다. 11절에서 예레미야는 그것이 주님을 대적하는 노골적 반역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의 모든 예언적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 백성들은 그들의 즐거운 길을 택하며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요,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2절) “심판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아니라”고 그들은 단정지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이 그들에게 전달된 그분 명령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것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버릴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마음이 너를 싫어하고...” (예레미야 6:8)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확고히 말하고 있노라! 내가 경고하노라! 그러나 듣는 자가 어디 있느냐?”

2015년 2월 16일 월요일

놀라운 믿음 by Gary Wilkerson

하나님께서 당신 삶에 곧 엄청난 일을 행하실 것을 당신은 감지합니까? 그분이 당신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특별한 것을 준비했다. 너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길을 나와 함께 걷게 될 것이다.” 이미 당신의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분의 오랜 약속이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될 것이라고 당신께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을 깜짝 놀라게 할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당신의 현 삶을 묘사한다면, 제가 성경 말씀의 권위로 당신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진단할 준비를 하십시오.

제가 “무모한 믿음”의 체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모한 믿음이란 모든 것이 얼마나 잘 되어가고 있다 하더라도 최상의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얼마나 큰일들을 꿈꾸며 행한다 하더라도, 항상 그분의 비전은 더욱 광대합니다.” 제가 짧은 기간 동안 목회했던 교회에서 주님께서 행하신 일은 제가 감히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거의 매주 많은 사람이 그들의 삶을 예수님께 드렸고, 단 한 주도 누군가 예수님께 그녀 또는 그의 삶을 드리지 않고 지나간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줄 때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왜 이런 일을 하나요?”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그분께 드리곤 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은 기적과도 같이 일어났습니다. 불과 몇년간의 짧은 기간 동안 우리 교회의 출석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새 성도들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을 쌓아가며 충실한 제자들로 성숙해져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헌신 되었으며 그분이 이끄는 곳은 어디든 갈수 있는 선교사들이 되는, 그들을 향한 우리의 궁극적 목표로 잘 양육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기대를 초월하시는 것 뿐만 아니라 그분의 기대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시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 교회 근교에는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수십만 명이 넘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도시의 다른 지역에 새 교회들을 세우도록 우리를 움직이셨는데, 그중 한 교회는 문제가 많은 지역에 세워졌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큰 일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무모한 것이 남아있는데, 그것은 제가 그보다도 더 큰 일들이 일어날 것을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1)

2015년 2월 14일 토요일

그분 사랑의 손길 by Jim Cymbala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신약시대 교회의 전체 모습은 아닙니다. 사도들은 옛 복음성가의 가사처럼, 단순히 그들의 자리를 지키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권능을 주시고 그들을 움직이셔서, 전체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기를 간청했습니다.

새벽 세시까지 성경이 해석되며 교리가 논의되었던 너무도 많은 곳에서, 바로 그 교리의 영은 상실되어 있었습니다. 1700년대 초기에 윌리엄 로(William Law)라는 한 영국의 묵시 저술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당신이 성경의 어떤 장이라도 읽으면서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을 온전히 하나님의 영으로 돌이키게 하며 그분과의 온전한 연합으로, 그리고 그분을 향한 전적인 의존으로 당신을 인도하지 않는 한, 당신은 연약하고 공허하며 변화되지 않은 채로 남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단절의 고충을 겪고 있는지를 인식할 수 있는 길은, 외관이 더러운 사람들이나 우리와 달라 보이는 사람들, 또는 보편적 군중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교회가 단지 한 특정한 부류를 섬기기 위해 부름 받았다는 사상은 신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죄의 대가는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사면해주시고 치유해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10) 하나님의 영은 자비와 연민과 구제의 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그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주저합니다. 그들은 물고기를 잡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깨끗이 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어떤 사람이 금고리를 몸의 이상한 부위에 부착시켰다든지, 어떤 사람에게서 악취가 난다든지, 또는 그사람의 피부색이 다를 때, 그리스도인들은 주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그분의 손을 뻗치셨는지를 잠시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손을 뻗치다”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거룩하고 순수한 신성의 하나님께서, 더럽혀지고 사악하며 불경건한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나와 너무도 다르고 너무도 혐오스러워서, 내가 너희와 가까이하지 않는게 나을것 같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과 우리와의 차이가 그분 사랑의 손길을 끌어당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멀리 서서 문둥병자들에게 치유의 말씀을 던져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만지셨습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누가복음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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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짐 심발라(Jim Cymbala) 목사님은 뉴욕의 한 소외된 지역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건물에서 이십명도 채 못되는 성도들과 함께 브루클린 테버네클(Brooklyn Tabernacle)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브루클린 태생이며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 그리고 게리 윌커슨 목사님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5년 2월 13일 금요일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 4:4).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4:7).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4:10).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말씀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도 예수님처럼 말씀으로 시험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기록되었으되” –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누가복음 22:32). 여러분도 마귀에게 말하시면 됩니다. “나를 시험하고 내 믿음을 끌어내리려고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내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계신다!”

베드로의 믿음이 그의 교만 때문에 시험 당하고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셨기에 그의 믿음의 깊은 뿌리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탄이 승리의 함성을 외치는 때에, 마침 예수님께서는 신실한 친구를 잃은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의 눈을 보았을때에 그의 자만심은 모두 눈 녹듯이 녹아버렸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누가복음 22:61-62).

“심히 통곡하니라”의 그리스 원어적 의미는 살을 찌르는 듯한 지독한 슬픔을 말합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22:61). 저는 이 말씀을 보고 손을 높이 들고 유다의 언덕을 통곡하면서 오르는 베드로를 연상해보았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 주께서 옳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사탄이 제 믿음을 몰살시키려고 할 것이라 경고를 하셨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위해 죽는다고요? 저는 한 여자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하는 것에도 내 믿음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이제 어디로 가야합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 베드로는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나머지 말씀을 기억해 내었을 듯 싶습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누가복음 22:32). 베드로는 머릿속으로 자신의 죄를 되내이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워 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돌이킨 후에라고 말씀하셨지? 그렇다면 내가 아직도 하나님의 할 의무가 있다는 뜻 아닌가? 내가 저지른 죄가 있음에도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성령님의 능력에 힘입어 하늘 높이 손을 들고 하나님을 높이고 믿음으로 사역을 하였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내가 주님을 실망시켜 드렸지만 그는 나를 아직도 사랑하시고 나도 그를 아직도 사랑하노라. 주께서 약속하셨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께서 예언하셨다. 내가 돌이켜 다른 이들에게 힘을 더하여 주고 믿음을 굳건히 할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내 형제들과 자매들에게 다시한번 돌아가 그들을 섬길것이다!”

2015년 2월 12일 목요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였노니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누가복음 22:32). 예수님께서 보이신 이 놀라운 사랑을 보면서 저는 제가 낙망하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형제보다 친밀한 친구임이 분명합니다.(잠언 18:24 참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단점을 모두 보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였고,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의 모든 성격까지도 아셨음에도 그를 진실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였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친구로서 아끼셨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베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 나라에 꼭 필요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하였을 것 같습니다.

주여,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을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우리가 절망에 처하였거나 세상과 타협하고 재난으로 제발로 달려가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랑하셨기에 단호하게 경고해주셨듯이 담대하게 사랑의 언어로 주의를 줄 수 있게 하여주옵소서.

어려움에 처한 그들을 하나님께 내려놓고, 그들이 닥친 시험을 믿음을 굳건히 붙잡고 견뎌낼 수 있도록 중보해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설교를 하고 그를 판단하기 보다는 그저 단순하게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그리스어에서는 ‘너(you)’라는 말이 복수이기 때문에 그 뜻은 “너희 모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 그리고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9, 11, 15).

여러분께서 지금 무엇을 겪고 계시든지, 미래에 무엇을 겪어야 하든지, 예수님께 여러분의 온 마음을 드리고 예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면서 기억하십이오.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2015년 2월 11일 수요일

기쁨의 띠를 띠워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움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편 42:2-5). 낙망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 우울할까요? 왜 슬프고 낙담하는 것일까요? 왜 어쩔 줄 모르게 되어 결국에 슬픈 눈물을 짓게 되는 것일까요? 다윗은 사실 이러한 질문들의 대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시편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오직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 만이 나를 슬픔에서 건지실 수 있는 도움이십니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인내로 기다리는 모든이에게,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풋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시편 42:8).

하나님께서는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네게 명하신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너를 따르고 네게 미쳐서 필경 너를 멸하리니 …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신명기 28:45-47).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작은 상처에 또는 몇몇의 실수들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였던 놀라운 일들과 너희에게 준 축복을 모두 잊어버렸구나.”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절망을 기쁨으로 바꾸시고 즐거움으로 옷입혀 주실것입니다. 다만 여러분께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믿음을 드린다면 말입니다. “주께서는 나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셨으며 내게서 슬픔의 옷을 벗겨 주시고 기쁨의 띠를 띠워 주셨습니다.” (시편 30:11).

2015년 2월 10일 화요일

물가에 심기운 나무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편 46:4-5 ; 개역개정).

그렇습니다. 예수님(주님의 임재하심)께서 바로 그 강입니다. 당신의 모든 의심과 두려움을 주님의 발 앞에 내려놓고, “예수님, 저는 믿습니다. 오직 주님께 나의 소망이 있습니다” 라고 울부짖을 때에 성령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님의 강가의 둑에 심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 삶을 깊숙히 뿌리내리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앞으로 다가올 환난이 아직 남아있기 떄문입니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 하겠느냐”(예레미야 12:5).

오늘날 우리는 다가올 폭풍우에 비해서는 가벼운 소나기 정도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겪을 어려움에 비하면 그저 어린아이들의 장난 정도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비교적 끔찍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땅위에 곧이어 닥칠 괴로움에 비하면 지금은 아주 평화로운 시대인 것입니다.

믿는 우리의 우선순위는 우리 삶을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에 깊게 뿌리 내리는 것입니다. 오늘날을 견딜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얻고 있지 않는다면, 이 땅위를 덮을 장대한 어두움을 겪을 때 자신의 힘으로는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고린도후서 4:17)이라고 언급된 바와 같이, 저와 여러분은 지금 경한 환난으로 시험을 받아 도리어 하나님께로 더욱 더 가까이 가서, 비밀스런 생명의 근원지에 더욱 더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찌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입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예레미야 17:7-8)

2015년 2월 9일 월요일

파멸당하게 하는 것들 by Gary Wilkerson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승리를 거둔 적군에게서 전리품을 취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전리품을 취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인간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싸움을 물질적 이득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중심이 하나님께 향하고 물질에 향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너희는 전멸시켜서 바치는 희생제물에 손을 댔다가 스스로 파멸당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여라. 너희가 전멸시켜서 바치는 그 제물을 가지면, 이스라엘 진은 너희 때문에 전멸할 것이다.”(여호수아 6:18).

그러나 아간이라는 한 사람이 적진의 물건을 취하였습니다. “제가, 전리품 가운데에서 시날에서 만든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이 나가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이 나서 가졌습니다. 보십시오, 그 물건들을 저의 장막 안 땅 속에 감추어 두었는데, 은을 맨 밑에 두었습니다.”(여호수아 7:21). 사실, 우리가 보기에는 많은 물품들을 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쁜 외투와 한웅큼의 은과 금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가지가 바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내려놓지 못한 마음 속 그 한가지 때문에 하나님께서 개개인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일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자, 여러분의 마음 속에 성령님께서 일깨워 주셨던 내려놓아야 하는 어느 한부분에 대하여 무시하고 등한시 여기고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그 한가지가 삶에서 비교적 합리적인 부분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누기를 원하시는 우리의 저축예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는 가족과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멀게하는 직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간처럼 우리는 “중요하지 않은” 특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그 무언가에 매달려 있으면서 그 한가지가 우리 믿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마음 밭에 적합하지 않은 그 한가지를 빼내고 내가 너에게 주고 싶은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참 승리와 기쁨을 누리거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놀라운 일들을 하고자 하십니다. 이 세상에 참 사랑을 우리를 통하여 보이고자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시는 그 무엇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모두 작다고 또는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성령님의 말씀을 듣고도 등한시여기고 계시는 것입니까? 여러분, 성령님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온전한 마음을 드리십시요.

2015년 2월 7일 토요일

죄의 치명성 by Carter Conlon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나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고린도후서 12:14-15)

이것은 그의 심령과 삶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이었던 바울의 말입니다. 바울의 삶은 하나님의 모든 진정한 종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 헌신 되었습니다. 그가 폭풍과 홍수, 그리고 불 가운데서도 인간적 필요와 열망을 견뎌내며, 심지어는 삶의 소망을 잃어버릴 지경이 될 때까지 기꺼이 그의 여정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더 많은 사랑을 줄수록, 더 많은 사람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을까요?

저는 그에 대한 답을 그 다음 장에서 발견할수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갈 터이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고린도후서 13:1-2)

그 당시 고린도 교회가 부도덕의 심연으로부터 빠져나오려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 도시 중심부에는 천명도 넘는 매춘부들이 있는 사원이 있었으며, 매춘은 그 사회에서 실제 우상숭배의 행위로 인정되었습니다. 명백히도 그곳에서는 그른 것이 옳은 것으로, 옳은 것이 그른 것으로 변환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도이자 목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죄의 심각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그른 것을 정당화시키는 올가미로 빠지는 자들의 위험성에 대해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조건의 딜레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죄라고 정의한 것을 우리가 더욱 행할수록,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이 되어,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결정하기 시작합니다. 만일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옳지 못한 것들을 계속 행하며,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사면해주신 죄들과 연합한다면, 그들은 십자가의 승리가 그들의 것이라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행하는 자들은 오직 거짓 환상을 지닌 채 도태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지식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진정한 영적 아비로서 관념과 삶의 옳은 길로 그들을 인도하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많은 사람이 그릇된 길을 선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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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카터 칸론(Carter Conlon) 목사님은 Times Square Church의 창립 목사이신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의 초청으로 1994년에 Times Square Church의 부목사로 부임했으며, 그 후 2001년에 담임목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강인하며 열정적인 지도자로서,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5년 2월 6일 금요일

생명의 강으로부터 생수를 길어내세요

왜 어떤 성도들은 그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영적 생명과 강건함의 빛을 발산하며, 평강과 기쁨으로 충만한 걸까요? 내게 있는 문제들이 그들에게는 없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들은 당신보다도 더 많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사실상 그들은 대부분의 사람보다도 더 많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강에 뿌리를 내리는 비밀을 배웠습니다. 당신이 만일 그 강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당신에게는 부흥도 필요 없고, 축복의 소나기도 필요 없으며, 특별한 부어주심도, 쇄도하는 갑작스러운 승리도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매시간 지속해서 흐르는 생명수를 누리기 때문에, 당신은 가뭄에서 축복으로, 낮음에서 높음으로, 부흥에서 냉전으로 항상 이동하지 않아도 됩니다. 영적 기근이 당신을 건드리지 못하며, 배교의 작열도 당신을 동요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생명의 강으로부터 생수를 빨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 부흥과 뿌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당장 뿌리를 선택할 것입니다. 부흥이 지나간 한참 후에라도, 저는 제 뿌리로 인해 여전히 생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뿌리는 제게 필요한 모든 것을 날마다 공급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은 성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강을 보았습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에스겔 47:12)

하나님은 이 선지자에게 그분의 거룩한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강을 보여주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그저 흐르는 물로 시작해서 그가 헤엄까지도 칠 수 있을 정도의 강물로 불어났습니다. 에스겔은 어떤 한 사람이 불어나는 생명의 강을 측량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에스겔 47:5) 잘 아시다시피 초대교회는 발목까지 찬 물을, 종교개혁은 허리까지 찬 물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 현세대는 물이 너무도 많이 차올라, 이제 우리는 그 물에서 헤엄까지 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강변에는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는 많은 나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무들은 누구일까요? 그들 모두는 바로 그분에게 신뢰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에스겔 47:9)

2015년 2월 5일 목요일

그분 생명의 강물 속으로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으리라.” (예레미야 17:8) 항상 소망 안에서 사는 비결, 즉 성령 안에서 기쁨과 평강으로 충만한 삶의 비밀이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지킬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기약하며, 변화되고자 하는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언약을 체험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 인해 더이상 상처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걸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온 기대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사람이 무엇을 말하든 무엇을 행하든 상관치 않습니다. 그의 눈은 오직 주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러한 자를 절대로 실족게 하거나 실망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친것 같으리라” (예레미야 17:8) 이 구절에서 사용된 “심기운”이라는 놀라운 단어의 실제적 의미는 “이식하다, 또는 옮겨심다”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건조하고 열매 맺지 못하며 말라붙은, 적막하며 보기 흉한 사막의 떨기나무를 뿌리째 뽑아, 레바논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생명의 강가에 그것을 이식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시편 46:4~5)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을 이렇게 칭송했습니다.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시편 65:9~10)

그분의 강물 깊숙이 당신의 뿌리를 내리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잎이 청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7:8) 당신은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을 것이며, 열매 맺는 일을 그치지 아니할 것입니다.

당신은 항상 지쳐 울며 외롭고 메말라 버림받은 것처럼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은 그분의 말씀 안에서 안식하며, 당신의 신뢰와 믿음을 단순히 그분께 드림으로서 이식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곧 그분 생명의 강물 속으로 깊숙이 뿌리를 내리게 될 것입니다.

2015년 2월 4일 수요일

주님의 우물에서 길어내는 생수

이 미국땅에서 가장 놀라운 신비 중 하나는 뉴욕의 송수로입니다. 벽돌로 만들어진 이 수로는 전체가 지하로 되어있으며, 뉴욕주 북부로부터 먼 여정을 걸쳐 계속 흘러내려와 이 대도시에 엄청난 물을 공급합니다. 만일 이 수로가 차단되어 갑자기 도시로 흘러들어오는 물의 공급원이 끊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뉴욕시는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이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 17:6) 우리는 가스가 없이는 살 수 있으나 물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와 똑같은 일이 우리 삶에서도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희망을 잃으면 주님께로 달려가는 대신, 입을 꼭 다물고는 그들의 내면으로 몰입합니다. 그들은 마음속부터 움츠러들어 희망을 포기하고, 그들의 심령은 메말라 건조한 소금땅이 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제가 방금 묘사한 것처럼 압도적 절망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절망하는 이유는 너희가 나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의사들이나 친구들, 상담가들이나 약, 또는 제정 등 다른 것들로 향한다. 너희는 내 언약들로 인해 희망에 차 있는 대신, 메마름과 공허함, 그리고 외로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너희는 나의 우물로부터 생수를 길어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18장 13~1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이 지은 너무도 끔찍한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누가 이러한 일을 들었는가 열방 중에 물어보라.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반석을 떠나겠으며, 원방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하나님의 백성이 범한 이 “심히 가증한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눈이 녹을 때 흘러나오는 차고도 신선한 물처럼,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끊임없는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이 물은 언제나 사용할 수 있으며 절대 변하지 않는 능력의 물입니다. 그러나 많은 하나님의 백성은 마르고 공허하며 비참한 그들의 길을 고수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소외당했습니다. 우리는 환영받지 못한 채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버림받은 길로 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채 자포자기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는 샘물 곁에 낙담한 채로 앉아 이렇게 생각합니다. “주님은 내 인생에서 일하고 계시지 않아. 나는 그저 이를 악물고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할 거야.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어. 나는 그저 생존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해!”

2015년 2월 3일 화요일

주님 안에서의 평강과 기쁨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예레미야 17:5-8)

예레미야는 여기서 영적 삶에 대한 두 가지 불변의 법칙을 소개하는데, 하나는 생명과 소망으로 이끄는 것을 말하며, 또 하나는 죽음과 절망으로 이끄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안에서의 지속적 평강과 기쁨을 누리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왜 절망과 낙망에 빠져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당신이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을 실망하게 했을 때 당신이 실족한다든지, 혹은 다른 사람들의 행위가 당신의 하나님과의 동행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당신이 육신의 팔에 의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이 사람을 신뢰하면 분명 상처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누군가 당신을 실족게 하고 깊이 실망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예레미야 17:9)

당신이 경험하는 상처와 절망의 대부분은, 당신이 신뢰했던 사람에 의한 실망의 결과입니다. 한 아내가 이렇게 논박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내 남편이 변화된다면 저는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는 제게 참으로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는 저를 등한시하며,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는 제 사랑을 소멸시키고 있습니다.”

당신의 문제는 남편과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문제입니다. 예레미야는 당신이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에 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신이 행복과 소망의 진정한 공급원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당신은 주님을 등한시했고 그분의 생명수를 길어내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죽고 메말라 열매 없는 황폐한 사막의 떨기나무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행복과 소망을 위해 하나님 외에는 어떤 사람이나 그 어떤 것도 신뢰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당신의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것입니다.

2015년 2월 2일 월요일

전투를 위한 준비 by Gary Wilkerson

여호수아의 첫 여섯 장은 그들이 약속의 땅에 막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분 백성 가운데서 행하신 영광스러운 일들을 묘사합니다. 이스라엘은 사백 년간의 속박에서 벗어난 후, 사십 년동안 광야 살이를 해야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경계에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호수아는 얼른 청년들을 하나님께로 구별시켰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그 준비작업으로 “할례를 시행했다”고 기록했는데, 그것의 더 깊은 의미는 “그들을 준비시켰다”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 5:2-7 참조)

여호수아는 왜 이 일을 행했을까요? 그들이 막 요단 강을 건넜을 때, 그들은 결코 통과할 수 없을듯한 두터운 여리고 성벽을 맛딱뜨렸습니다. 인간적으로 볼때 이 적군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오합지졸의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최근 수년간 나의 놀라운 풍성함으로 너희를 축복했다. 그러나 아직 너희 일은 끝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이 전투를 준비했나요? 그들은 칼을 갈지 않았으며 그들의 병기를 정열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준비작업은 그들 마음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노래를 부르며 기도하고, 그분을 기대하면서 그 성곽을 돌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들로 하여금 마지막으로 나팔을 들어 한꺼번에 큰 소리로 불게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장대한 성벽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렸습니다.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는 그들의 원수들을 물리치며 엄청난 공적을 쌓았고, 더 큰 땅을 차지하며 전례 없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사실상 여호수아는 모세도 하지 못했던 일을 했습니다. 그는 31 왕들을 진멸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패배시켰던 왕들보다 열 배나 더 많은 숫자였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 삶에서 행하고 싶어하시는 일들의 표상이라고 믿습니다. 그분은 열 배의 결실을 가져오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성령을 놀랍게 부어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 모든 것을 기꺼이 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믿어주기를 원하십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분은 우리가 무모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여호수아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