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31일 목요일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우리 각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아주 즐거워하십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구원하심으로 실제로 복을 받고 계십니다.

우리 손자 손녀중 하나가 전화를 할 때 마다 내 아내 그웬에게서 나는 바로 이런 종류의 부모 된 즐거움을 봅니다. 사랑스런 어린 아이가 전화할 때 그녀는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환해집니다. 세상 어느 것도 그녀가 전화를 끊도록 만들지 못합니다. 만일 내가 대통령이 우리 집 문 앞에 왔다고 해도 그녀는 나를 쫓아버리고 통화를 계속할 것입니다.

내가 나의 자손들을 기뻐하는 것보다 하늘 아버지께서 나를 덜 기뻐하신다고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때때로 내 자녀들은 내가 가르쳤던 것과 반대로 행하여 나를 실망시켰습니다. 하지만 결코 한 번도 나는 그들을 사랑하기를 멈추거나 그들을 기뻐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만약 내가 불완전한 아버지로서 그토록 지속적인 사랑을 품고 있다면 우리 하늘 아버지는 얼마나 더욱 그의 자녀인 우리를 돌보시지 않겠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서서 외쳤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민14:8). 얼마나 간단하지만 강력한 선언인가요. 그들은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신다. 그분은 모든 거인들을 쳐부술 것이다.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해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애물을 쳐다보지 말아야한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한량없는 사랑에만 주목 하여야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읽습니다.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11:20).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15:8).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로다....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시18:17-19).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삶의 모든 상황들이 결국에는 우리를 위한 아버지의 사랑에 찬 뜻으로 밝혀지게 될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하는 팔에 기대어 광야로부터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2009년 12월 30일 수요일

가족 기도

“너희중에 두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 어떤 크리스천들은 이것을 “합심기도”라고 부릅니다. 당신이 같이 기도하는 헌신적인 형제나 자매가 있다면 당신은 크게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실제로, 내가 알고 있는 중에 가장 권능이 있는 중보기도자들은 대개 두 사람씩 혹은 세 사람씩 같이 활동했습니다.

이런 기도가 가장 강력하게 일어나는 곳이 우리들의 가정입니다. 내 아내 그웬과 나는 매일 같이 기도하는데 그것이 우리 가족을 지켜준다고 나는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자녀들의 성장기에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고 그들 중 하나라도 영적으로 길을 잃지 않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친구관계, 다른 친분들, 또 장래 배우자에 대해서 기도했고 요즈음은 손자 손녀들을 위해서 같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는 크리스천 가정들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간증할 수 있는 것은 우리 가족기도 덕분에 내가 오늘날 사역에 몸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매일, 내 형제와 내가 앞마당이나 길거리에서나 어디서 놀고 있든지 우리 어머니는 집 앞문을 여시고, “데이빗, 제리, 와니타, 룻, 기도할 시간이야,”라고 부르셨습니다. (내 동생 돈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동네 사람들 모두가 우리 가족기도 시간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그 부르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 시간 중에 무엇인가 확실히 일어났는데, 성령께서 우리 가족가운데 운행하시며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아마 당신은 가족 기도 모임을 갖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지 모릅니다. 비협조적인 배우자가 있거나 반항하는 자녀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누가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저 당신이 부엌 식탁에 와서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면 됩니다. 그것이 당신가정의 기도 시간이 될 것이고 가족 모두가 알게 될 것입니다.

어두움 정복하기

어두움을 정복하고 흩어 버리는 유일한 것, 그것은 빛입니다. 이사야가 선언했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9:2). 또한 요한도 말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빛은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나는 빛을 보았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이제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주님은 이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의기양양한 마귀를 보지 않고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이도록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의 능력은 지옥의 모든 권세를 능가합니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4:4).

요한계시록에서 우리는 무저갱이 엄청난 능력을 가진 황충과 전갈을 토해내는 것을 읽습니다. 그리고 용, 짐승들, 뿔 달린 짐승들, 그 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적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존재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릅니다. 실은, 우리는 알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적그리스도나 짐승의 표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고 계십니다. 바울은 성령의 권능이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성령이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렇다면, 환란의 시기에 성령은 우리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실까요? 그분의 능력은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짐을 지는 분으로 받아들일 때만 발휘됩니다. 성령은 우리의 염려와 근심을 감당하는 바로 이 일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짐을 그분에게 넘겨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분을 받아들였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은 영광가운데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여기 계시고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을 포함해서, 우리 삶의 모든 상황을 주관해 주시기 위해 안타깝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절망하며, 의문을 품으며, 불안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며 계속 두려움가운데 산다면 성령을 우리의 위로자, 돕는자, 안내자, 구원자, 그리고 우리의 능력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짐을 성령께 던져버린 크리스천이 세상에 증인이 됩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처럼, 믿는 자들은 주위를 둘러싼 엄청난 문제들을 보고 있지만 그는 주님의 기쁨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그를 안위하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인도하실 것을 신뢰합니다. 그리하여 어두움에 둘러 싸여 있으면서도 기쁨을 구현하기에 길 잃은 세상에 대해 강력한 간증거리를 갖게 됩니다. 그의 삶은 세상에게 “이 사람은 빛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009년 12월 29일 화요일

은밀한 골방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

과거에 나는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필요 때문에 “골방 기도”를 차 안이나, 버스 속, 또는 직장의 휴식 시간 동안이든지 어디서나 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어느 정도 이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에는 한층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희랍어로 이 구절에 나오는 “골방”은 “사적인 방, 비밀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그들의 문화에는 집 깊숙한 안쪽에 창고 정도로 사용되었던 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바로 이 은밀한 골방에 혼자 들어가서 문을 닫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교회에서나 다른 기도의 동역자와는 할 수 없는 그런 기도로 몰입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적인 장소로 가서 기도하심으로 이 본을 보이셨습니다. 성경은 계속 반복하여 예수님이 기도하시기 위해 “따로 가셨다”고 말씀합니다. 아무도 그분보다 더 바쁜 삶을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느라 자신의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경에서 듣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마14:23).

우리 모두는 은밀하고 특별한 장소에서 홀로 기도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변명거리가 있습니다. 그런 사적인 장소가 없다거나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경건한 청교도 작가인 토마스 만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은밀히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외의 모든 것, 즉, 먹고, 마시고 아이들과 지내고, 할 시간은 있으면서 다른 모든 것을 지탱해주는 것을 위한 시간은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적인 장소가 없다고 합니다. 한데 주님은 산을, 베드로는 지붕 위를, 선지자들은 광야를 찾아내었습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따로 호젓이 있을 장소를 찾아낼 것입니다.”

은밀한 곳에서 기도하기로 마음먹는 것의 중요성을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원칙으로 준수하거나 굴레로 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것입니다. 그분은 앞으로 다가올 일을 보시고 우리가 엄청난 자원과 매일 매일 충전이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이 모든 것은 그분과 함께하는 은밀한 곳에 있습니다.

2009년 12월 28일 월요일

주님과 함께 앉음

바울에 의하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영적 죽음으로부터 일으켜져 예수님과 함께 천상의 장소에 앉혀졌다고 합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5-6).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앉혀진 이 천상의 장소는 어디입니까? 그곳은 다름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보좌 실, 즉, 전능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은혜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두 구절 뒤에 어떻게 우리가 이 경이로운 곳으로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읽게 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이 보좌 실은 모든 권능과 주권이 있는 자리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모든 통치자들과 권능들을 다스리시고 인간사를 주관 하십니다. 바로 이곳 보좌 실에서 하나님은 사탄의 모든 행동을 감시하시고 인간의 모든 생각을 감찰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오른쪽에 앉아계십니다. 성경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요1:3) 그리고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골2:9) 말씀합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지혜, 평강, 모든 능력, 힘, 승리의 삶과 열매 맺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이 모든 부요에 접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것이 분명하듯이 우리도 그분과 함께 아버지께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영광의 보좌로 인도되신 것이 분명하듯이 우리도 그분과 함께 동일한 그 영광의 장소로 인도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이 거하시는 곳에 또한 우리도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믿는 자들의 특권입니다. 우리는 그가 거하시는 동일한 천상의 장소에 그와 함께 앉아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영적 축복을 이 보좌 실에서 내리신다고 말합니다. 그곳에서 모든 그리스도의 부요, 즉, 확고부동함, 능력, 안식, 날로 더욱 충만한 평강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1:3).

2009년 12월 25일 금요일

믿음의 회복

불가능한 일들에 직면한 모든 분들에게 드릴 특별한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의 회복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천부의 사랑에 대한 더욱 충만한 계시에 달려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호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he will rest in his love, KJV)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스바냐 3:17). 여기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사랑에 대한 영광스러운 계시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분이 우리에 대한 사랑 안에서 안식하시고 기뻐하신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rest"란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에 대해 일말의 의문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고정하시고, 또는 확립하시고 결코 제거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실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에 아주 만족하셔서 그에 대해 노래를 부르신다고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이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천상의 표현입니다. 존 오웬은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설했습니다. “하나님이 기쁨에 넘쳐 뛰신다.”

나아가, 바울은 천상의 질서에서 벗어난 모든 것, 즉, 불신과 혼동에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날 때 변화한다고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디도서 3:4).

바로 앞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3:3)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 우리의 믿음은 승리하는 믿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나타났다.”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다”고 말할 때 그는 “겹쳐 올려놓다”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 어근에서 나온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요약하면, 주님은 두려움과 의문에 가득 찬 불쌍하고 고생하는 우리 영혼들을 내려다보시고 다음과 같은 계시를 겹쳐 올려놓으셨습니다. “나의 사랑이 너를 구원할 것이다. 너에 대한 나의 사랑 안에서 안식하고 기뻐하라.”


나는 그분의 사랑이 나에게 나타났던 날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 것-모든 문제 꺼리, 모든 시련들을 우리 아버지의 사랑스런 보호아래 내려놓지 않는 한 어떤 믿음도 불가능한 일들에 대항하여 설 수 없습니다. 내 상황이 최악일 때 나는 단순한 믿음 안에서 안식해야만 합니다.

2009년 12월 24일 목요일

온전히 설복됨

아브라함의 믿음은 휘청거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이)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로마서 4:21)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이루어내실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의 주님은 공허에서 창조해내셨습니다. 창세기의 설명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으로 그분은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위해 무에서 기적을 창조하실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났을 -당신의 모든 계획과 궁리가 동났을 - 때가 바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 놓아야 때입니다. 때가 바로 당신이 다른 어느 곳에서 구원을 찾을 있다는 자신감을 모두 내려놓아야 때입니다. 그러고 나서 당신이 믿을 준비가 되기만 하면 당신은 하나님을 진흙이 필요한 토기장이가 아니라 무에서 역사하시는 창조주로 보게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의 물질이 아닌 것으로 하나님은 당신이 결코 생각해낼 없었던 방법과 수단을 통해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불가능한 일들에 직면하여 주님을 믿는 일을 그분은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실까요?


답을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이야기에서 찾아 있습니다. 사가랴에게 천사가 찾아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특별한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처럼 나이가 많았던 사가랴는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만으로는 불충분 했던 것입니다.


사가랴가 천사에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누가복은 1:18). 간단히 말해서, 사가랴는 불가능성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능하지 않다. 일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 나에게 증명해 보여야만 한다.” 이성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가랴의 의심은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보라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말이 이루어지리라”(1:20).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말씀하실 우리가 믿기를 기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 의탁 할지어다”(베드로전서 4:19 강조부분 저자임의 사용).

2009년 12월 23일 수요일

불가능한 일들을 대면하여

"그가(아브라함)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같고 사라의 태가 즉은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로마서 4:19).

진정한 믿음의 진수를 구절에서 찾아볼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방금 약속하셨습니다.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아이를 낳을 있는 나이를 훨씬 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에 대해 주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을 아브라함은자기 몸이 죽은 같고...사라의 태가 죽은 같음을 고려하지 않았다 합니다.

정상적인 사고로는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러한 불가능성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족장은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어떻게 이행하실 것인지에 대해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따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님, 나는 뿌릴 씨앗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라의 태는 잉태를 못합니다. 아내는 자녀를 낳을 있는 기간이 지났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일을 이루실 것입니까, 주님?” 이런 질문들을 품기보다, 아브라함은 단순히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연단되고 정금보다 귀한 믿음을 만들어내는 일을 하실 , 그분은 우선 모든 인간적인 공급원에 대해 사형선고를 내리십니다. 이성적인 구원의 모든 방법을 무시하시며 모든 인간의 논리에 대해 문을 닫아버리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죽음의 자리에서 태어납니다. 모든 인간적인 가능성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곳은 사람이 만든 계획이 처음에는 번성하다가 죽어버리는 곳입니다. 그곳은 인간적인 희망들이 잠시 위안을 주다가 산산이 부서져 무력감만 더해주는 곳입니다.

당신은 죽음의 자리에 있습니까? 당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까? 당신은 충고를 듣기 위해 누군가에게 전화를 수도 없습니다. 당신이 기도할 당신의 간구는 땅에 떨어져 하늘이 마치 놋쇠와 같습니다.

당신께 선언하건데, 이것은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당신이 불가능에 대해 생각하는 ,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바라보는 , 당신의 상황을 빠져나오는 길을 찾으려고 고민하는 것을 멈추게 하기위해 역사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당신을 촉구하십니다. “사람에게서 도움을 찾으려는 것을 그쳐라. 상황이 얼마나 소망이 없는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것을 그쳐라. 이러한 것들은 믿음에 거침돌이니라.”

2009년 12월 22일 화요일

내가 너를 필요로 한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다른 지체와는 연결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는 교제를 나누지만 다른 신자들과는 교회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킵니다. 예수님의 몸 중에서 머리외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몸이 한 지체만으로 구성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머리에서 팔 하나만 자라나온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이 팔 다리도 없고 장기도 없이 머리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많은 지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더불어 있지 않고는 주님과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머리 뿐 만이 아니라 온 몸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필요뿐 아니라 서로에 대한 필요에 의해 함께 짜여있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 더러 내가 너를 쓸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고전12:21).


이 구절의 후반부를 주의해서 보십시오. 머리도 다른 지체에게 “내가 너를 쓸데가 없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바울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그 몸의 어떤 지체에게도 ‘나는 네가 쓸데가 없다,’ 라고 결코 말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되신 분이 기꺼이 자기 자신을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연결시키십니다. 더구나 그분께서는 우리가 다 중요하며 몸이 제대로 작용하는데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특별히 멍들고 상한 지체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힘주어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12:22).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고전12:23)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으면서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으며,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런 지체들이 무척 존귀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이 움직이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이 성경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심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스스로를 얼마나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는지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크리스천으로서 제 구실을 못한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필요로 한다. 너는 그 몸의 그저 중요한 일개의 지체가 아니다. 그 몸이 기능을 발휘하는데 네가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중요한 지체들로서, 신자들은 다른 신자들을 향한 사탄의 공격에 대적하여 스스로를 일깨워 진지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놀랍게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명령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믿는 사람이 고통가운데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물론 위로해주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경건한 사랑의 행위이기는 합니다만 그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믿는 사람 모두가 예수의 이름으로 사탄을 결박하여 바깥 어둠속으로 던져버려야만 합니다. 그것이 몸의 진정한 지체라는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