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9일 금요일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이 어떤 위험에 처해있는지 자각하지 못합니다. 아마 이렇게 반발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도를 안한다고 해서 어때서? 그래도 보혈의 피로 씻기우고 용서 받고 천국에 가는 신자들인데. 믿음 생활이 약간 미적지근해진다고 위험할게 뭐가 있어?”

저는 하늘아버지께서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요구하는 이 바쁜시대를 이해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바쁜 일정에 휘말리게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생자 예수의 목숨과 바꾼 주님께 가는 통로를 거부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견고한 망대로 만드셨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든지 그에게 “달려가는” 사람만이 안전하게 피할 수 있습니다. (잠언 18장 10절 참조). 달려 들어가지 않으면 당신은 아직 문 밖에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스라엘인들이 서 있었던 그 곳에 서 있지만 하나님은 더 이상 그 문에서 사람들을 만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문 안에 있습니다: 죄의 용서, 필요한 때의 자비, 극복하는 능력.

아버지와 아들이 느꼈을 거부의 고통을 상상해보십시오. 저는 그들 사이에 이러한 대화가 오갔을 거라고 그려봅니다:

“아들아, 너는 매맞았고, 조롱 당했고, 못 박혔고 땅에 뭍혔다. 그것은 나에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 순간 나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너는 영원한 언약을 성취했다. 너는 너를 믿는 모든이에게 받아들여짐이 가능하게 했고 길을 열어주었다. 너 때문에, 마지막 때의 사람들이 나에게 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힘 안에서 강하게 자랄 수 있고 다른때가 아닌 지금 유혹하고 공격하는 사단에 대적하는 믿음을 키울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어디 있습니까? 월요일이 지나고 저희는 그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화요일이 되었지만 역시 없습니다. 수요일이 오고 그들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이 지나도 역시 그들을 보지 못합니다. 오직 주일에 교회에 있는 동안에만 그들이 저희에게 옵니다. 왜 저희에게 오지 않습니까? 자녀들이 저희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에덴동산에서 주님에게로부터 숨어버린 아담에게 하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장9절). 주님은 아담이 어디 있는지 늘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담에게 왜 교제를 거부했는지를 물어보셨고, 주님의 임재에서 숨는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셨습니다.

진실로 아버지께로 가는 통로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데교회와 같이 처해질 것입니다. 주님은 사도 요한에게 지시하십니다, “사데 교회의 지도자에게 이 편지를 써서 보내라; 일곱 영을 가진 이가 말한다 . . . 나는 네 행위를 알고 있다.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 죽은 거나 다름이 없다” (요한계시록 3장1절).

2015년 5월 28일 목요일

극복하는 삶으로 가는 길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때, 모든 사람들이 그분에게 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회당에서, 언덕에서 또 보트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기적과 이적을 행하시며 아픈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분은 연회에서 목소리를 높여 우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물이다. 나에게로 오라 그리고 내가 너의 목마른 영혼을 충족시켜 주겠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면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이 초대는 대부분 무시되어졌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향해 눈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가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마태복음 23장37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고 너희들에게 열려있다. 내가 너희에게 와서 치유받고 필요한 것을 받으라고 말해왔는데 너희는 오지 않는구나.”

사람들의 그분에 대한 거부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너희 집이 버림받아 황폐해질 것이다” (마태복음 23장38절). 예수님께서 쓰신 ‘황폐’라는 단어는 외로움, 메마름, 열매맺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너의 믿음생활, 너의 가정, 너의 영적인 걸음 모두 다 메마를 것이고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부모님이 하나님을 매일 찾지 않는다면 그들의 자녀들도 당연히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그들의 집은 세상적인 것, 영적인 메마름, 설명할 수 없는 외로움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결국에는 그 가정은 완전히 황폐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은혜의 때에 이러한 경고를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다’할 때까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덧붙이셨습니다(마태복음23장39절).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나는 너에게 네가 극복하는 삶을 사는데 필요한 모든 통로들을 주었다. 그런데 너는 나의 제의를 무시하는 구나. 안타깝지만 그 결정은 너의 삶과 가정에 황폐함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영원까지 나를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찾기 위해 주님 앞으로 마지막으로 왔던 때가 언제입니까? 어려움에 있고, 가정과 직장 건강에 문제가 있었던 때입니까? 절실한 도움이 필요할 때 주님을 찾는 것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썼습니다 ,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백성을 벌하셨으므로 그들이 고통가운데서 주께 기도하였습니다” (이사야 26장16절). 시편 기자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간구합니다. 내가 억울한 사정을 주 앞에 털어놓고 나의 모든 어려움을 주께 말합니다.” (시편 142편 1-2절).

2015년 5월 27일 수요일

그리스도의 영의 가장 큰 고통

그리스도의 영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일까요? 아마 그에게 갈 수 있는 완전하고 제한없는 통로를 받고도 나오지 않는 세대일 것입니다.

수세기에 걸쳐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축복의 날이 오기를 갈망하고 기다렸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통로는 모세가 간절히 바랬던 바로 그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이 볼 수 있었지만 누릴 수는 없었던 바로 그것이고, 다니엘이 주님께 하루에 3번 기도하면서도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이 통로가 우리의 때에 열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를 위해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선물의 권리를 가진 우리는 그 가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문이 우리를 위해 열렸는데도 우리는 몇일이고 몇주고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이 무슨 죄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사신 이 통로를 무시하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것은 그의 보혈을 경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나아오기만 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것을 다 가질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계속 그 값비싼 선물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 . .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붙듭시다;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10장 22-23절). 이 구절은 명확히 기도에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매일 자주 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오라. 나에게 다가오지 않으면 너의 믿음을 유지할 수 없다. 담대하게 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오지 않으면 너의 믿음은 흔들릴 것이다.”

여러분도 한때는 예수님을 향해 열정이 타오르고, 늘 주님을 향한 귀중한 시간을 만들고 말씀을 구하고 주님안에 자신을 두었던 크리스챤들을 알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같은 크리스챤들이 겨우 기도에 대해 생각만 합니다. 아니면 단지 이렇게 말하기 위해 몇분 주님의 임재속으로 바삐 들어갑니다, “안녕하세요 주님. 오늘도 저를 인도해주세요. 사랑해요 예수님. 안녕히 계세요.” 그들의 구하는 마음은 사라졌습니다. 바쁨없이한때 즐기던 성찬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들에게 기도 생활을 방치한 것 아니냐고 물어볼 때 그들은 믿음 안에서 “쉬고있다”고 주장합니다.

말씀 드리지만, 기도가 없는 사람들은 곧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 통로의 선물을 져버리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다가가는 것을 거부할 수록, 믿음에서 더 멀어져가게 됩니다.

2015년 5월 26일 화요일

제한 없는 통로

갑작스럽지만 영광스러운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향하는 제한 없는 통로가 되셨습니다. 골고다 언덕의 피뭍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다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때 갑자기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고 땅이 흔들리며 바위가 갈라지고”(마태복음 27장50-51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말 그대로 예수님이 돌아가시던 그 순간에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 때 저희의 운명은 확정지어졌습니다. 주님께서 돌아가셨을때, 저희는 지성소로 갈 수 있는 완전하고 제한이 없는 통로를 받은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떳떳하게 지성소에 들어갈 수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0장19절).

이 물질적인 휘장의 찢어짐은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난 일을 대변합니다. 마침내, 우리는 세대에 걸쳐 즐길 수 없었던 것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다윗 조차도 가질 수 없었던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은 더 이상 우리에게 닫혀있지 않았고 제한없는 출입이 가능해졌습니다.

더구나, 그의 죽으심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손으로 지어진 성전이 아닌 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대제사장의 역할을 맡으셨습니다. 중보의 향기와 함께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셔서 거룩한 보좌에서 보혈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능력과 권력과 영광으로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 영적인 공동체로 받아들여지는 언약의 권리를 확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을 초대하시는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통로를 열어놓았다. 너는 이제 믿음으로 내 안에 거함으로써 받아들여졌다. 그러니 담대히 보좌로 나오라. 내가 너를 이제 너의 아버지이기도 한 나의 아버지의 임재 속으로 데려갈 것이다. 너는 아버지에게 밤낮으로 제한없이 나아갈 수 있다”.

2015년 5월 25일 월요일

성전을 청소하는 것 by Gary Wilkerson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희생은 늘 충분합니다. 그의 구원, 용서, 정화의 능력과 승리는 가장 독실한 신자에서부터 가장 무자비한 죄인에게까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합니다.

아주 어린 소년이었을 때부터 저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선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영접했을때, 저를 향한 구원의 사역이 한번에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결국에 저는 제 매일의 삶에 그리스도의 구원 뿐 아니라 그의 정화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타월과 대야를 가지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이 상징적인 행동을 보고 당혹해하면서 묻습니다. “주님, 그러면 제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어 주십시오.” (요 13:9) 예수님께서는 실질적으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베드로야, 너는 나의 보혈로 구원이 될 것이다. 하지만 네가 아직 더러운 세상에 살고 있고, 이 세상을 걸어가면서 네 발은 더렵혀 질 것이다. 너는 너의 마음을 씻는 것만큼 네 발을 씼는데 내가 필요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단번에 정의롭게 하심으로서 우리를 새 피조물로 만들어 주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어둡고 악한 세상의 진흙탕을 걸어가기때문에 세상의 분노, 욕망이나 무자비함에 물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저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삶이 나를 기쁘게 하려면, 이런 것들을 너에게서 매일 제거해야한다.”

주님의 거룩함안에서 걸으려면, 우리의 삶 가운데 예수님께서 내쫓고 싶어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21장 12-13절에서 돈바꿔주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셨을때,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극복해야할 냉담함을 제거하고 계셨습니다. 수년간 존재해 왔던 돈을 바꾸는 관행이 그를 화나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작 먼 거리를 여행해서 예루살렘에 와야했던 신실한 신자에게는 그 돈 바꾸는 관행이 편리했었습니다. 예수님을 화나게 한 것은 장사에 신경을 쓰면서 사람들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기도의 성전이 장사하는 곳으로 바뀌어졌던 것입니다.

2015년 5월 23일 토요일

스게와의 일곱 아들 by Claude Houde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사도행전 19:13~18)

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요! 우리는 위 본문에서 현시대의 수많은 교회와 사역과 성도들의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스게와 아들들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십시오. 그들은 종교적 가문의 2세로 태어나, 종교적 배경과 의식 가운데서 자란 자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대제사장의 아들들로서 이미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율법을 알며 영적 전쟁에 대한 지식과 의미를 잘 배운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기도문이나 율법 구절들을 흉내 내어 외우는 앵무새에 불과했고, 하나님과의 진실한 교제와 사귐이 없었습니다. 의식과 규례를 다 외울지는 몰라도, 그들에게는 초자연적 영적 권위도, 아무런 승리도 없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었으며, 단지 보기 좋은 모조품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이 귀신은 쫓고 싶었지만, 은밀한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없었기에, 그 결과는 비참하고 위험하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당신은 자유와 권세, 그리고 승리의 기름부음을 갈망합니까? 당신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불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저와 함께 이렇게 부르짖으십시오! “주여, 제게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만약 당신이 원수 앞에 서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태복음 19:26) 라는 믿음으로 선포한다면, 당신은 그분의 구원 능력과 보호하심, 그리고 권능을 무제한으로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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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클라우드 어드(Claude Houde) 목사님은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세계 전역에 걸쳐 월드챌린지(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s의 주된 강사입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New Life Church는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서 개신교 교회로서는 성공하기 힘든 캐나다의 보수적인 지역에서, 지금은 교인 수가 3,5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015년 5월 22일 금요일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신약성서가 만들어 졌을 때,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미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할 것임을 예견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미지근하다가 차가워져 결국에는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그 어떤 양을 잃거나 놓치게 된 경우에 그를 찾아가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인류를 거룩한 물로 다시 살아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에스겔 47:8). 하나님의 치유의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파릇파릇한 식물이 이곳 저곳에서 자라나기 시작하여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당신을 찾고 계시며, 당신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실은, 오늘 바로 당신의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오래 지났는지 상관 없이 당신의 삶에서 사라지고 없어져버린 모든 것을 다시 복구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요엘 2:25).

하나님께서는 지금의 당신 안에서 거하시며 당신에게 하나님의 귀한 말씀과 비밀, 계시를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다. 먼저, 하나님을 등한시 여겼다는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보다 다른 일들을 우선시 여겼으며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듣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십시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에베소서 5:14).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나를 고치시옵소서. 나의 영혼을 깨우시고, 이 잠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흔들어 주시옵소서. 나는 변화하고 싶습니다. 주님, 주께서 내 안에서 일하셔야 하겠습니다. 새롭게 하시는 주님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예레미야 또한 하나님을 잊고 등한시 여겼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이방 신에게 절하고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예레미야 3:12-14, 22).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아들아, 나의 딸아, 내가 잠시 너희에게 화가 나서 공허함과 외로움을 느끼게 하였단다. 그러나 마귀가 파괴한 모든 것을 내가 너희에게 다시 복원해 줄 것이다.”

2015년 5월 21일 목요일

생명의 강

하나님의 말씀이 경고합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히브리서 2:3).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에 대한 대가는 엄청납니다.

에스겔서 4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강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이 강은 거룩하고 치유하는 물로 이루어져 사막까지도 흐르며, 만지는 모든 것에 생명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가 그 생명의 물 안에서 헤엄칠 수 있을 때까지 점점 확장되고 깊어집니다.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찌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에스겔 47:8-9).

이 생명의 강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시기부터 선포된 복음을 상징합니다. 오늘날, 수 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치유함을 얻고, 예수님의 진리는 자신들의 무감각과 태만을 직시하게 합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눈을 크게 뜨게 하셔서,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하나님을 매일 찾고, 그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거워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치유의 물에 헤엄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물로 하여금 당신을 지나치게 만들고 있습니까? 그 물이 닿지 않는 황무지는 어떻게 되는지 보십시오.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46:11).

당신은 예수님을 무시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불순종하며, 그의 말씀을 찾지 않고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적으로,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가졌던 함께 나눌 교제와 사랑에 대한 기대를 모두 저버린 것입니다.

에스겔이 말한 “소금 땅”이 된다는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의미는 완전한 황량함, 외로움, 공허감 등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사해를 생각해보십시오. 높은 염분 때문에 그 속과 주변에서나 어떤 물고기도 식물도 자라지 못합니다. 완전한 황량함 그 자체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고립되고 말라버린 수렁에 빠져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매일 하루가 공허하고 마르고 외롭습니까?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를 맺으며 자라나고 거룩한 강물로 치유 받고 있지만 당신은 그들이 가진 그 어떤 자원도 갖지 못하였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이름만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자, 그러나, 다시 시작하기에 너무 늦지 않은 시기입니다! 오늘이 당신의 첫날, 첫 시작입니다. 당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2015년 5월 20일 수요일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자

예수님께서 이 세상이 만들어 지기도 전에 우리를 인하여 기뻐하셨습니다. 그는 우리 안에 거하시어 우리를 그의 성전으로 만들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매일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과 대화할 시간을 갖기 원하셨고, 그리고 하나님께 우리의 짐을 내려놓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고 그의 의의 계시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기뻐하며, 그의 말씀과 계시로 인하여 우리가 요동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성전으로서 기대하시는 바를 명료하게 언급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그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 속에서, 평생 거하시길 원하시는데, 당신은 그와 더 가까워 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끝까지 무시하고 계십니까?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와 더 가까워 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달콤한 교제를 통하여 그의 마음을 당신과 나누고 싶어하십니다. 또 그는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은 놀라운 것들을 당신에게 보여주시고 싶어하시며, 성령의 열매가 당신의 삶 안에서 맺어지도록 토기장이처럼 당신의 삶을 빚어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연약함, 두려움 그리고 항상 불충분하다고 느껴지는 감정들 마저 제거해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으로부터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인하여 기뻐하여 주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아가서 2:3).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2:14).

당신과 이러한 기쁨의 교제를 하는 생각만으로도 예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기뻐하셨습니다. 그러한 교제를 즐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우리들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잊어버리기 일쑤입니다. 텔레비전을 보고, 쇼핑을 하고, 인터넷 서핑을 할 시간은 있어도 예수님과 교제할 시간은 없는 것입니까?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지겨워하는 마음을 가진 신부의 마음에 거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깊은 교제를 나누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거나, 함께 보낼 시간이 전혀 없는 사람의 마음에 왜 계속 계실까요?

자, 침통한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경고를 주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무시하는 사람에게 거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반박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무시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몇 주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당신의 삶과 행동이 예수님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을 보여주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예수님보다 당신의 가족과 직업 그리고 개인적인 욕구가 먼저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2015년 5월 19일 화요일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는 것

I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듣고자 하였고, 그의 말씀으로 인하여 기뻐하였습니다.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시편 119:16).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119:24).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을 스스로 즐거워하며”(119:47).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119:77).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잠언 8:34). 그리고 시편의 저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내게 의의 문을 열찌어다 내가 들어 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시편 118:19).
저는 이 구절에서 나온, “의의 문”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누가복음 13:24)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잠언에서 말한 문 곁에서,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의를 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온전한 동행을 하고자 마음 먹은 사람입니다. 그는 거룩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들뜨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안에 진리로 채우길 원합니다. 책을 읽고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는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께서 의의 문을 열어주시기를 인내로 기다려야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영은 이렇게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을 매일 아침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속삭이십니다. “환영한다. 나의 친구.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것을 보여주겠다.”

“문 곁에 서서 기다린다”라는 뜻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요동하는 모든 크리스천들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구절은 이사야서 6장에 나옵니다. 선지자는 성전의 문지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며 기다렸습니다.

이사야가 성전의 문 앞에 서있을 때, 세라빔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그와 동시에 온 하늘이 그들의 찬양소리로 울렸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오는, 매우 크고 명료한 엄청난 목소리를 들었고 그 목소리는 온 세상을 요동치게 하였습니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이사야 6:4). 이사야는 “문 곁에 서서 기다린” 사람의 예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열심으로 구한 사람입니다.

2015년 5월 18일 월요일

사역의 시작 by Gary Wilkerson

요한복음 2장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는 모습은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한복음 2:13-17).

예수님께서 보이신 행동은 비교적 과격한 모습이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어떤 사역에 대한 계획을 공고할 때에 대형교회에 들어가서 상을 모두 엎고 사람들을 내쫓으시겠습니까?

이 사건은 유월절에 일어났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으로 제사를 드리고 양의 피를 집 문틀에 발랐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천사가 왔을 때, 양의 피의 흔적을 보고 그 집을 지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생활로부터 구원하신 사실에 대한 상징적인 의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우리를 죄의 저주에서 구원해 주실 하나님의 어린양, 희생물로 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한복음 1:29). 그리고는 그 이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희생함으로써 인류를 죄의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2015년 5월 16일 토요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by Nicky Cruz

다윗은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하심을 알았습니다. 장대한 자들조차 거인 골리앗의 모습만 보고도 떨었지만,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돌을 취해 물매를 던져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 창 하나 없이 맨주먹으로 사자와 곰을 대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모르는 한 어린 양치기 시골 소년을 막강한 용사이자 왕으로 만드셨습니다!

다윗처럼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은 왕은 전례에 없었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를 추앙했고 신하들은 그에게 무조건 순종했으며, 그의 아내들은 그의 모든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세상의 어느 누가 창조주로부터 그와 같은 축복과 호의, 그리고 은혜와 승인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모든 것도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 앞에서는 무색했습니다. 그는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분을 마음껏 예배했습니다. 그가 처리해야 할 많은 임무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께 드리는 노래와 시를 짓는 데에 많은 시간을 쏟았고 심령으로부터 그분께 노래하며, 연인들이 서로 사랑을 주고받듯 우주의 창조주를 사모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비해서는 세상의 모든 금은보화도 다윗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에게 임했던 능력의 비결이었고, 다윗이 그처럼 위대한 통치자이자 왕이 될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윗은 너무도 명백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뼈에 힘을 더해 주시고 그의 힘줄에 피를 공급해 주시며, 그의 마음에는 지혜를, 그의 가슴속에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주께서 또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내 발이 미끄러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내 원수를 뒤쫓아 멸하였사오며 그들을 무찌르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그들을 무찔러 전멸시켰더니 그들이 내 발 아래에 엎드러지고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나이다. 이는 주께서 내게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를 내게 굴복하게 하셨나이다.” (사무엘하 22: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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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니키 크루즈(Nicky Cruz)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전도사이자 저작가입니다. 그는 1958년 뉴욕에서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을 만난 후, 폭력과 범죄의 삶으로부터 예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그의 극적 전환에 대한 이야기는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의 저서 “The Cross and the Switchblade (십자가와 칼)”에서 처음 알려졌으며, 그 후에 발간된 그의 베스트셀러 자서전 “Run, Baby, Run (달려라 니키)”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2015년 5월 15일 금요일

기쁨의 영을 유지하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통곡을 들으셨고 그들에게 자비를 보여주심으로서, 그들의 애가를 웃음소리로 바꾸셨고, 그들로 하여금 소리치며 즐거워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분은 또 한차례의 모임을 소집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기쁨을 유지시켜야 하려면, 그리고 그 기쁨을 다시 잃어버리지 않게 하려면, 하나님께서는 더 깊은 우물을 파셔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어떤 부분은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있었습니다. 한편 주님은 온 백성으로 하여금 이 시기를 기뻐하도록 허용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안전하다는 것을 백성들이 알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수용과 기쁨의 시간 동안, 그분은 그들이 세상과 더욱 분리되는 것에 동의하기를 그들 모두에게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쁨에 넘치는 영혼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무척 기쁘게 했다. 너희는 내 말을 존중했으며 너희 죄를 회개했고, 내 자비에 즐거워했으며 내게 순종하기로 약속했다. 이제는 너희가 내 사랑으로 행해야 할 때가 되었다. 나는 너희가 너희 마음과 가정 속으로 침투했던 세속적 영향력들로부터 너희 자신을 온전히 구별시키고, 그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기를 원한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생활을 할 때, 그들은 이교도들과 친숙해졌고 점점 그들의 언어와 관습을 수용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이교도 아내를 맞았고, 이스라엘 여인들은 지참금을 주고 이교도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성별되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의 일부로 허용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점차 구별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더욱 천국의 심령으로 변화되지 않고 우리 주위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같아진다면, 우리는 우리 회개의 열매인 모든 기쁨을 점차 잃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에게 임한 큰 기쁨의 영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더욱 순종하기 위해 다시 모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느헤미야 9:2)

“다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우리 딸은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 아들을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10:29-30)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기쁨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처음에 그분의 기쁨을 얻었을 때와 똑같이 하면 됩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갈망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회개 가운데 계속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번째로는, 세속적 영향력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별시켜야 합니다.

2015년 5월 14일 목요일

회개의 물결

반나절 동안의 에스라의 말씀도 이스라엘 백성의 갈급함을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남은 반나절 동안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 에스라 외에 열일곱 장로들과 그룹을 지었습니다. “그들이 다 그 처소에 있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느헤미야 8:7-8)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해 애통해 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8:9) 그 장면을 그려보세요. 50,000명의 사람이 땅바닥에 흩어 앉아서 일제히 그들의 죄를 애통해 하는 모습을요. 하나님의 말씀은 망치와도 같이 그들의 자만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울음소리는 언덕을 넘어 수 마일까지 들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이라는 걸까요? 말씀이 너무도 날카로워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며, 울며 회개하게 하는 걸까요?

저도 그렇게 거룩한 모임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 우리 가족은 펜실베니아의 ‘생명수 캠프장’이라는 곳에서 열린 “캠프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이 엄청난 힘과 권능으로 전해졌기에, 모든 사람은 그분이 마치 한 시간 안에 오실 것처럼 느꼈습니다. 거룩한 두려움이 내려왔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얼굴을 묻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죄로 인한 비통함과 슬픔으로, 마치 자신들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 오라기 실에 매달려 있는 듯이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종일 전해졌고, 때로는 밤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까지도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애통해 하며 기도실 바닥에 누워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들려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때 저는 여덟 살이었고 주님께서는 그날 저를 설교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제 심령에 살아 움직였고, 저는 상심하고 애통해 하며 몇 시간 동안이나 성령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현실로 다가와 제 안에서 타올랐는데, 그때의 놀라운 체험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증언은 그분의 백성이 엎드려 강물과도 같은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분은 백성들 가운데에서 기쁨—순전하며 지속적인 기쁨이 솟아나기를 원하십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헤미야 8:10) 이 기쁨, 성서적 설교와 진실된 회개의 결과인 이 기쁨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참된 힘을 가져다주며 죄인들을 그분의 집으로 인도합니다.

대부분의 드리스도인들은 기쁨을 회개와 연관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회개는 예수님 안에서 모든 기쁨의 원천입니다. 회개 없이는 기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 회개하는 성도는 주님의 기쁨으로 넘칠 것입니다.

2015년 5월 13일 수요일

설교 감식가들

아마도 여러분은 “설교 감식가들”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 용어는 거의 200년 전부터 사용되었는데, 1800년대 중반에 런던에서 태동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저명한 설교가 스펄전(C.H. Spurgeon)이 런던의 메트로폴리탄 테버네클에서 매 주일 오천 명의 사람들에게 설교했습니다. 그때는 요셉 파커 (Joseph Parker)도 기름 부음 받은 메시지를 전했고, 다른 열정적 목회자들도 런던 전역에 걸쳐 심오하고 계시적이며 예언적인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때 부유한 런던 사람들 가운데 인기 있는 행사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마차를 타고 도시를 가로질러 이 교회 저 교회를 분주히 다니며 이 사역자들의 설교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의회에서는 월요일마다 어떤 설교자가 가장 훌륭한 말씀을 전했으며, 누가 가장 심오한 계시를 드러냈는지를 논의하기 위한 단독 회의가 열리곤 했습니다.

이렇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설교 감식가들”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들은 항상 어떤 새로운 영적 진리나 계시를 주장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매우 소수의 사람만이 그들이 들은 것을 실행했습니다.

한편, 예루살렘의 그 수문 성에서는 유창한 말씀도, 선동적 설교도 없었습니다. 제사장 에스라는 몇 시간 동안 계속 성경 말씀을 낭독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선 채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을 때, 그들의 갈망은 더욱 커졌습니다.

때로는 에스라가 자신이 읽고 있는 말씀에 너무도 감동되어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였더라.” (느헤미야 8:6) 하나님의 영광이 강력하게 내려왔고,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8:6) 말씀이 낭독될 때에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8:6)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비통과 회개로 자신들을 낮추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또 들었습니다.

이 모임에는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그 어떤 이야기도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곳에서는 설교단의 기교도, 극적 간증도 없었을뿐더러 아무런 음악도 없었습니다. 이 백성들에게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들을 귀만 있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오늘날도 그분의 백성 가운데 그렇게 움직이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저는 그분의 말씀을 갈망하는 교회는 어느 곳이든 막론하고 그분의 성령이 역사하심을 봅니다.

2015년 5월 12일 화요일

하나님 말씀을 향한 갈급함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헤미야 8:10) 이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의 포로에서 막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백성들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지도력 아래서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전력을 다해 황폐한 성전과 나라를 재정립시키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재건된 성벽 안에서 특별 모임을 소집했습니다.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느헤미야 8:1) 거의 42,360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 모임에 참석했고, 그와 더불어 245명의 노래하는 자들을 포함해서 7,300명의 하인이 둘러섰으며, 전부 합해서 약 50,000명의 백성이 모였습니다.

맨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낭독되었습니다. 성경은, 백성이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 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8:1-2)

이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입되는 것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공통적 갈급함이 그들 가운데 이미 형성되어 있었고, 그들은 그분 말씀에 전적으로 순복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진리에 그들의 삶이 일치하게끔,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받기를 원했습니다.

놀랍게도, 에스라는 이 군중에게 대여섯 시간 동안, “새벽부터 오정까지…” (8:3)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뭇 백성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8:3) 이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광경인가요! 아마도 여러분은 이러한 현상을 미국의 그 어떤 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진정한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전심을 다 해 찾는 갈급함 없이는 절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상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싶어하는 열망이 소멸될 때 영적 죽음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의 기쁨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2015년 5월 11일 월요일

그분의 첫 표적 by Gary Wilkerson

성경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다.” (요한복음 2:6) 고 말합니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하인들은 그 큰 항아리들을 물로 채웠고, 그것은 기적적으로 너무도 근사하고 맛좋은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그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분 심판의 표적으로, 모세를 통해 물을 피로 바꾸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새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 이 기적의 사건을 통해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그 정결케하는 의식은 너희 심령의 가장 깊은 중심을 위한 것이 아닌, 오직 너희의 겉만을 깨끗게 할 것이다. 나의 정결케 하는 보혈은 너희 안에서 바로 그 일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것이었다.”

짧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새 언약을 드러내시면서 옛 방식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혼인 잔치의 주인은 예수님께서 기적으로 빚으신 새 포도주를 실제로 맛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경탄했습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요한복음 2:10)

그러나 그 사건으로 인해 단지 그 주인만 축복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을 포함해서,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은 이 놀라운 일로 인해 축복받았습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2:11) 만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분이 메시아라는 마지막 증거가 필요했었다면, 이 기적의 사건은 그것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그 사건은 제자들로 하여금 전심으로 그분을 따를수 있도록 그들에게 확신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이름 안에서 세상을 향한 우리 헌신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우리를 위해 부어졌고 그분 희생을 통해 우리 삶 속에 자유롭게 흐르는 그분 구원의 보혈을 세상은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 선물은 우리가 축복받은 만큼 세상을 축복하며, 결국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은 오직 주일 예배로만 그들의 헌신에 한계를 긋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데에 만족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분의 축복을 너무도 사모한 나머지 부흥회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며 “주여, 제게 부어주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들의 온 에너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붓는 대신, 그것을 받는 데에만 온 힘과 초점을 맞춥니다. 그것이 축복의 핵심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은 옳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지체로서 우리는 그것을 맛보는 것 이상의 일을 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부유한 축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키도록 명령받았습니다.

2015년 5월 9일 토요일

위대한 도전 by Jim Cymbala

유감스럽게도, 전심을 다 해 주님을 찾는다는 것이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방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10년 동안의 평안을 누린 후, 아사 왕은 특별한 이유 없이 막강한 구스 군대로부터 예상치 않은 침략을 당했습니다. 아사는 솔로몬의 증손자였으며 그의 경건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여생이 평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난관에 부닥칠 때를 대비해 마련된 견고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정확히 압니다.

“아사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데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더라.” (역대하 14:11)

아사의 믿음은 상자에서 방금 꺼낸, 상투적 케이크 가루가 아니었습니다. 그와 그의 백성은 지난 십 년 동안 하나님께 부르짖어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허둥지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일어나시도록 부르짖었고, 그분은 응답해주셨습니다. 구스 군단(이디오피아인)은 그들의 압도적 숫자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그랄 사면 모든 성읍 백성을 두렵게 하시니…” (14절) 결정적으로 패배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원리의 전형적 실례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제가 그 중요성에 대해 어떻게 더 강조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면, 그분은 우리를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찾는 일을 멈춘다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든 기회는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재능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 벽에 얼마나 많은 상패가 걸려있다 하더라도, 엄청난 예언의 말씀이 우리에게 선포되었다 할지라도, 아니 그 무엇이라도 소용없습니다.

아사 왕이 전투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 선지자가 그와 그의 군대를 멈추게 하고는, 방금 있었던 일을 다시금 확증시켜주었습니다.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역대하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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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짐 심발라(Jim Cymbala) 목사님은 뉴욕의 한 소외된 지역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건물에서 이십명도 채 못되는 성도들과 함께 브루클린 테버네클(Brooklyn Tabernacle)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브루클린 태생이며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 그리고 게리 윌커슨 목사님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5년 5월 8일 금요일

여호와 이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마음 먹고,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 삶의 모든 죄를 노출시켜 회개하며 삶을 내려 놓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십니다. “이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느혜미야 12:43). 참된 축복은 시험을 겪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기쁨을 포함합니다. 그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천국문을 여시고 우리에게 참된 기쁨으로 세례를 주십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조들을 황야에서 먹이시고 구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켜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비를 배풀어 주셨고, 성령으로 구름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만나와 물을 기적적으로 주셨고, 초자연적으로 그들의 옷과 신발이 닳지 않게 하셨습니다(느헤미야 9:19-21 참고).

풍성한 자비 그리고 명료한 지시, 성령의 명령, 물리적 그리고 육체적 필요의 충족 등의 축복이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들리시나요? 제게는 그저 경이롭게 들리기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축복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자비로 그의 모든 자녀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이스라엘이 그랬듯이 하나님을 선택하기 보다는 황야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에게 반역하여 율법을 무시하였던 선조들을 기억하였습니다. “저희가 오히려 순종치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율법을 등 뒤에 두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크게 설만하게 행하였나이다. … 그러나 주께서 여러 해 동안 용서하시고 또 선지자로 말미암아 주의 신으로 저희를 경계하시되 저희가 듣지 아니하므로 열방 사람의 손에 붙이시고도”(느헤미야 9:26, 30).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함으로써 초래한 영적 죽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40년간 기쁨 없는 안식일을 보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40년 동안 지내왔던 장례식들이 있었습니다. 이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축복이 넘쳤고, 물질도 풍요로웠으며 필요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 미지근하며 죽어있었습니다.

여호와 이레-신실하게 백성들을 위하여 공급하시는 하나님께서 냉담해진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루하고 지겨워하여 결국에 그저 믿음 없이 종교적 행위만 반복적으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필요를 지속적으로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를 경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곳도 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2015년 5월 7일 목요일

참된 기쁨

하나님의 말씀이 나누어지는 곳에는 피할 수 없는 결과물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하였습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 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혜미야가 또 이르기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느혜미야 8:9-10).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민족들에 임하였고, 백성들은 그 다음 7일 동안 기쁨을 누리며 즐거워하였습니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느헤미야 8:12).

히브리어 mirth 라는 단어의 뜻은 “즐거움, 기쁨, 행복함”의 뜻을 가집니다. 이 말씀에서 나오는 mirth는 단순히 좋은 감정이 아니라, 내적 환희, 넘치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개개인에게 다른 의미를 가져다 줄 수 있겠지만, 이러한 기쁨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명백한 사실은, 이러한 풍성한 기쁨은 천국에서 비롯된 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죄악과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쁨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호세아 2:11).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 끊쳐 지게 하리니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예레미야 25:10-11).

때때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감추기 위해 거짓된 즐거움으로 덫 입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도 그런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노래와 춤으로 찬양하고, 큰 소리로 경배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그것인 참된 기쁨인지 거짓된 기쁨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서 노래하고 춤췄던 기록을 기억해보십시오. 여호수아가 백성들의 소리를 들었을 때 모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출애굽기 32:17). 그에게 모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나의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출애굽기 32:18). 모세가 하는 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 노래 소리는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지 않은 채 아직도 죄악에 사로잡힌 채 부르는 소리이다.” 금송아지는 이스라엘백성들의 우상이 되어 노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된 기쁨의 소리, 즉 곧 다가온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소리였습니다.

2015년 5월 6일 수요일

영혼을 채우는 참된 기쁨!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은 영혼을 만족시키는 참된 기쁨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크리스천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교회의 부흥이 기도만으로 가능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온 교회가 한 마음과 열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온전히 말씀 따라 삶을 운영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깨달아 회개하며 교만, 거짓과 편견을 내려놓지 않는 한 천국에서 오는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지시를 불순종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진정한 회개를 통해 가능합니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편 51:2-3, 7). 그리고 다윗은 잃었던 구원의 기쁨의 회복을 구하였습니다.

다시 요약하자면, 우리의 성전 안에 죄악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회개는 안 하면서 간음과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삶을 살고 있다면 성령님께서 어떻게 그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실로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거두어가셨습니다(사무엘상 2:22-36). 엘리는 쉽고 편한 삶, 쾌락에 중독되어 더 이상 말씀이 들리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후에 하나님께서는 “영광이 떠났다” 라는 의미의 단어인 “이가봇(Ichabod)”을 성전 문 위에 쓰셨습니다. 영광을 거두시는 것은 죄를 알고도 회개하지 않는 교회에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참된 기쁨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회개하지 않을 때에 개개인과 몸된 교회들에서 점점 소멸될 것입니다.

2015년 5월 5일 화요일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대저 내가 갈 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이사야서 44:3).

하나님께서 영혼의 갈급함을 풀어주는 말씀을 주셨습니까? 가뭄에 있던 당신의 영혼에 생명의 말씀과 성령으로 다시금 채워주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또 다른 약속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이사야서 44:3-4).

버드나무는 매우 크고 빠르게 자랍니다. 물가에서 자라나는 버드나무를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구절에서 하시는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너는 나의 선택 받은 자녀로, 나의 영으로 끊임없이 물을 줄 것이고, 내가 너를 크고 강하게 자라게 할 것이다.”

다음과 같이 이 구절을 반복해서 읽으며 여러분의 믿지 않는 자녀의 이름을 넣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당신의 자녀에게 자랄 수 있게 끊임없는 물을 부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자녀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수를 구하게 하시고,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하여 주옵소서.”

그때에 여러분의 자녀들은 이사야서 44장 5절에서처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지요.

그러나 이 약속들은 “나는 그리스도안에 속하였습니다”라고 말하는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약속을 구하고 갈급하여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기도를 하며 성령님의 능력과 임재를 구하는 자녀들이 누릴 수 있습니다.

자,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고, 기도하며, 성령의 임재를 구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모두 누리십시오. 그리고 갈급함으로 끊임없는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그리고 가족과 자녀들의 삶에도 하나님의 생명수가 흐르도록 기도하면 원수마귀가 떠나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15년 5월 4일 월요일

순종 by Gary Wilkerson

갈릴리 마을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발견하고 하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한복음 2:5). 다른 번역본에서는 이렇게도 표현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수많은 사람들은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여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합니다.그러나 단편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기도와 말씀의 훈련을 통하여 순종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때때로 말씀을 경히 여기는 태도를 보이곤 합니다.

몇 달 전 어느 크리스천 청년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는 제게 혼전 동거를 하는 어느 커플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그것은 안전한 환경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비교적 안전한 것 같습니다. 제가 그들과 함께 산다고 해서 하나님이 화내실 것 같진 않습니다.” 그는 결단력 있고 확신에 찬 모습이 아닌, 무언가 숨기려고 하는 불안한 사춘기 소년의 모습으로 제게 말하였습니다.

결국에 그 커플은 이별하였고, 그 청년은 동거하던 여자와 교제하기 시작하여 성적으로 문란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는 그를 판단하고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때에, 성령님이 주시는 평안과 안전 그리고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마리아가 결혼식에 있는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행하라”라고 말했듯이 여러분의 삶에도 적용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자 제단 앞에 달려가 성령님을 찾지만, 성령 충만을 누리는데 가장 단순한 방법은 그저 순종하는 것입니다.

2015년 5월 2일 토요일

주기도문 by Carter Conlon

누가복음 11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분이 가르쳐주신 것 중 기본적인 것들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아버지”—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친교할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 보좌 앞에 가서 우리의 간구를 드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줍니다.

“하늘에 계신”—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으며, 그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그분은 절대적이며 완전한 승리의 장소에 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패배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하나님의 이름과 명성은 신뢰받기에 합당합니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진리에 거슬리는 것은 절대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그분의 심장과 마음에 존재하는 것들은 땅에서도 그러해야만 합니다. 당신과 제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그분의 왕국이 영광과 권능으로 오는 것을 보고자 하며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보기 원하는, 증가하는 내면의 열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 기도 가운데에서 일어나야만 하는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더이상 우리 자신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기도의 능력이 발견되는 곳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우리가 그분께 간구하며 그분이 우리의 공급원이심을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매일의 필요를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여러분과 저는 용서 왕국의 대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은 필수적이며, 그렇지 않고는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용서 하심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우리가 이 땅의 삶을 통과하기에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인식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반드시 신뢰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핵심을 잘 모르고 있으며, 우리의 생각이 실제로는 우리 마음의 이끌림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각에는 그렇게 보인다 할지라도, 우리는 단순하게 우리의 경로가 옳은 길이라고 단정 짖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언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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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카터 칸론(Carter Conlon) 목사님은 Times Square Church의 창립 목사이신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의 초청으로 1994년에 Times Square Church의 부목사로 부임했으며, 그 후 2001년에 담임목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강인하며 열정적인 지도자로서,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5년 5월 1일 금요일

기도하는 부모들

우리는 어느 날 심판석 앞에 서서, 어떻게 우리들의 자녀를 양육했는지에 대해 주님께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변명하거나 누군가를 탓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을 점검하며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훈계로 키우고 있나? 우리는 그들이 사랑의 삶을 살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고 있나?”

제가 어린 시절 밖에서 놀고 있을 때면, 어머니가 우리 집 위층에서 저를 위해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습니다. 어머니의 본보기는 제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후에 저와 그웬이 저희 아이들을 키울 때, 우리는 그와 똑같이 하나님 말씀에 따라 아이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저희 아들들을 생명수 옆의 참나무처럼 만들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저희 딸들을 당신 궁전의 잘 단장된 돌처럼 만들어 주시옵소서. 모든 아이를 사악한 무리의 궤계로부터 지켜주시옵소서.” (이사야 61:3, 시편 144:12 참조)

모든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를 향한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목회에서도 그것을 자주 보는데, 많은 부모가 그들의 자녀를 주님께 봉헌하기 위해 앞으로 데리고 나옵니다. 저희 목회 사역자들은 그러한 어린아이들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구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기름 부음을 해주고, 그들을 불의 보호벽으로 감싸달라고 성령께 간구합니다.

그러나 저는 때때로 이렇게 자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보배로운 아이들의 어미나 아비가 가정의 영적 상태를 등한시 한 탓으로, 저들 중 몇 명의 아이들이 마약이나 범죄 등, 마귀의 올무에 걸려들게 될까? 그들의 부모가 자신들의 문제에 몰두한 나머지, 자녀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거나 마땅한 훈계를 주지 못한 이유로, 그들이 망가지면 어쩌나?”

아마도 당신은 다 키워놓은 자식들이 더이상 주님을 섬기지 않기 때문에 아파하는 부모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당신의 아이가 마약이나 술에 빠져있어서, 상심한 부모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한때 다정했던 아이가 지금은 비통하고 강퍅하며 헤매는 모습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 메시지는 당신을 비난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아무도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당신께 묻겠습니다. 당신의 아이들을 키울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자문해보십시오. “나는 내 가정을 지키는 참된 파수꾼이었나? 나는 내 아이들을 매일의 기도로 보호해주었나? 아니면 내가 너무 분주했었나? 내가 아이들로 하여금 나를 두려워하고 멀리하게 하지는 않았나?”

그 모든 것은 이제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당신이 할수 있는 것이 남아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당신 자녀의 구원을 위해 부지런히 기도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지난날에 놓쳤던 것들을 지금 만회할수 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수 있고, 당신의 소중한 자들을 기도로 씻길수 있으며, 그들을 십자가로 데려갈수 있는 성령의 도우심을 불러내릴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