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31일 수요일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기도들이 응답되지 않을 때 그것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고통이 좀체 사라지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아무것도 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종종 그 때 하나님은 이전보다 더욱 최고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 중 이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느니라.” 징계하는 사랑은 모든 믿음의 행위, 모든 기도, 모든 약속에 선행합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나에 대한 그분의 사랑일 수 있습니다. 나의 고집과 자존심을 버리도록 때리시는 그분의 부드러운 손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능력이 우리 안에 역사하도록 하는 것보다 우리 기도의 능력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파악해서 그분을 책처럼 읽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반대로 일이 벌어질 때 놀라거나 당황하기를 원치 않으므로 “그건 하나님일 리가 없어. 그분은 그렇게 일하시지 않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해 너무 분주하여 그분이 우리에게 역사하려고 하신다는 것을 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영광의 그릇으로 재창조하시려고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물을 변화시키기 위해 기도하느라 바빠서 기도가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허용할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와 믿음을 마치 한 그룹의 선택된 “대가들”이 그분으로부터 무언가 캐내기 위해 배우는 두 개의 비밀 도구로 우리 손안에 두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가 받으려는 것 보다 더욱 더 주시고자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왜 결코 자물쇠로 잠가둔적이 없는 것을 열려는 열쇠나 도구로 기도와 믿음을 사용할까요?

기도는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믿음은 그분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고 신성하게 성가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마치 “현명한 자가 상을 탈 것이라”고 하며 사람들에게 풀라고 내준 수수께끼들로 자신을 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기도와 믿음의 문제에 대해 혼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담하게도 하나님을 모든 소원을 이루어주는 우리의 개인 지니로 생각합니다. 믿음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그분을 몰아세우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벽에 밀어 붙여놓고 “주님, 당신은 당신의 약속을 돌이키실 수 없습니다. 나에게 올 몫을 원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말씀에 구속되어있습니다. 그렇게 하셔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말씀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외치느라 애쓰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도와 믿음의 진정한 의미를 놓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오로지 주시는 분으로, 우리는 받는 자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기도와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자가 되는 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무엇을 얻어내는 길로 사용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것들을 드리는 길로서 사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2010년 3월 30일 화요일

그리스도를 시험함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고전10:9).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주를 시험하다”는 무슨 뜻일까요? 간단히 말해서 주를 시험하는 것은 그분을 테스트해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과 같이 물을 때 마다 주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죄에 더욱 더 빠져 들어간다 해도 하나님은 나에게 자비를 베푸실까?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죄에 탐닉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킬까? 하나님이 자비하신 분인줄 알고 있으며 또 지금은 죄인을 정죄하지 않는 은혜의 시대이다. 내가 그분의 자녀인데 어떻게 나를 심판하실 수 있을까?”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악한 시험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면서 무심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은 죄의 결과를 직면하지 않으면서 얼마나 지옥 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요약하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서 이러한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죄에 대한 평결을 벗어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분명히 밝혀주신 진리를 거스를 때 마다 우리는 바울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고전10:12, 8).

당신이 하나님의 귀중한 은혜의 선물의 한도를 시험하고 있지 않은지 자문해 보십시오. 당신은 자신의 명백한 반역 앞에서 죄에 탐닉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시험하고 있는 중입니까? “나는 신약시대의 신자이다. 예수님의 피가 나를 덮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스스로 확신하고 있습니까?

계속해서 죄에 빠져 있다면 당신을 위한 예수님의 위대한 희생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현재 자의적으로 저지르는 죄는 세상의 눈앞 뿐 만 아니라 모든 하늘과 지옥 앞에서 그분을 공개적인 수치로 몰아넣습니다. (히 6:6 참조).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바울은 이모든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 벗어나는 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대한 지식과 경험이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2010년 3월 29일 월요일

우리는 지나치게 세속적입니다

요즈음에는 천국에 대한 이야기나 이 낡은 세상을 등진다는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셨습니까? 대신 우리는 더욱 많은 물질을 얻기 위해 우리 믿음을 사용하는 법에 대한 메시지들로 폭격을 맞고 있습니다. 어느 유명한 선생은 말했습니다. “다음에 올 부흥은 재정적 부흥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재정적으로 복을 퍼부어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메시지는 어느 것이나 부담스럽습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무시해 버리려고 하고 그에 대해 토론하는 사람들을 병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천국이 이러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죽음이라는 주제는 금기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대한 개념이 얼마나 위축되어버렸는지요! 그토록 많은 크리스천들이 죽음에 대한 생각에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세상과 그에 얽매인 모든 것을 버리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이해와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분은 와서 죽으라고, 우리 자신에 대해 기념비를 세우지 말고 죽으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억되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염려하지 말고 죽으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서전이나, 본부 건물이나 대학이나 신학교를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떡과 포도주 외에는 자신을 대대로 기념하기 위해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초대 크리스천들은 얼마나 달랐던 지요. 바울은 죽음에 대해 많이 말했습니다. 실은,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부활하는 것이 우리의 복된 소망이라고 신약에 언급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 죽음은 우리가 익숙해진 행복한 삶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내는 침입자로 간주 됩니다. 우리의 삶을 물질적인 것들로 몹시 어질러놓았기에 우리는 꼼짝달싹도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아름다운 집들, 사랑스러운 물건들, 매혹적인 연인들을 떠난다는 생각을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지금 죽는 것은 너무도 엄청난 손실일거야. 나는 주님을 사랑해, 하지만 내 집을 즐겨볼 시간이 필요해. 아내와 결혼했잖아. 소를 시험해 봐야만해. 시간이 더 필요해.”

믿음에 대한 가장 위대한 계시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실천에 옮길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브리서 11:13, 16).

2010년 3월 26일 금요일

생명은 껍질 안에 있지 않습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육신은 껍질에 불과하며 생명은 껍질 안에 있지 않습니다. 이 껍질은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성장해 가며 더욱 성숙해 가는 생명력을 감싸고 있는 임시 가두리입니다. 육신은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일시적인 보호자 역할을 하는 껍질입니다. 껍질은 그것이 감싸고 있는 영생과 비교하면 모조품 입니다.

모든 진정한 크리스천에게는 영생이 불어넣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 안에 씨앗으로 심겨져 있으며 지속적으로 성숙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더욱 성장하고 더욱 팽창하는 발달 과정을 거치고 있으며 새로운 생명의 형태가 되기 위해 마침내 껍질을 깨고 나와야만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생명은 껍질에 압력을 가하여 부활 생명이 성숙하는 바로 그 순간 껍질이 깨어집니다. 인공적인 경계들이 깨어지고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영혼이 그 감옥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주님을 찬양할지로다!

죽음은 다만 깨지기 쉬운 껍질이 부셔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껍질이 그 기능을 완수했다고 결정하시는 정확히 그 순간에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낡고 부패한 몸들을 도로 그들이 나온 곳 흙으로 버려야만 합니다. 어느 누가 조각난 껍질의 파편을 주워서 갓 태어난 병아리를 억지로 원상태로 돌려보낼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어느 누가 작고한 사랑하는 이에게 그리스도 자신의 형상대로 조성된 그의 새롭고 영광스러운 몸을 포기하고 그가 떨쳐버린 부패해가는 껍질로 돌아오라고 요구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바울이 그것을 말했습니다.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립보서 1:21). 이러한 말은 우리 현대 영적 어휘들로 보면 절대적으로 생소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토록 삶을 숭배하는 자들이 되었기에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하여 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바람이 거의 없습니다.

바울은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빌 1:23)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개종자들을 교훈하기 위하여 “껍질 안에 머무는”것, 또는 그 자신의 표현대로 “육신으로 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병적이었던 걸까요? 그가 죽음에 대해 불건전한 집착을 갖고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복 주신 삶을 존중하는 마음이 부족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삶을 최대한으로 살았습니다. 그에게 삶은 선물이었고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 유용하게 썼습니다. 그는 “사망의 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고 이제 “육신으로 사는 것 보다 세상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2010년 3월 25일 목요일

십계명

대부분 미국인들은 미국의 대법원이 정부 법원 건물에 십계명을 전시할 수 없다고 판결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언론은 이 지표적인 결정을 속속들이 보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판결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법원은 법을 집행하는 곳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도덕법으로서 결코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습니다. 중력의 법칙처럼 고정된 것입니다. 당신이 그 법에 도전한다면 그것은 마치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그 법에 영향을 받는 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있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값을 치러야만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십계명은 사회가 자멸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고안해 놓으신 영원한 법입니다. 헌데, 놀랍게도 이 시간 모래 분사회사들이 이 십계명들을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법원 대리석이나 콘크리트에나 새겨진 곳 어디에서든지 갈아내 버리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변할 수 없는 법은 본래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돌에 새겨졌습니다. 이제 인간의 법에 의해 돌에서 지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이 뭐 중요합니까? 우리는 더 이상 율법아래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왜 문제가 돼야 합니까?” 우리는 유대 랍비들이 정해놓은 613개의 추가 계명을 의미하는 유대 율법아래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크리스천은 십계명으로 집약되는 하나님의 도덕법의 권위 아래 있습니다.

나는 우리 목전에서 모래 분사기가 그분의 율법을 지워버리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실지 생각해봅니다. 어떤 믿는 자들은 “십계명을 전시해 놓을 필요는 없어요. 정말 필요한 것은 우리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지요,”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실 때 하나님의 의도는 그 계명을 눈에 잘 뜨이는 곳에 두는 것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잇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6:6-9).

2010년 3월 24일 수요일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합니다

믿음은 아는 것에 대해 행하는 것입니다.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한 지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나안을 거주지로 주시겠다는 복된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도 만약 그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남아있었더라면 전혀 무의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히 11:27, 29) 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지경으로 행진하여 화살로 일제 사격을 한 번 가하고 모든 적의 군대들이 죽어 쓰러지기를 기대한 것은 아닙니다. 땅은 그들의 것이었으나 그들은 한 번에 병사 하나씩 무찔러가며 차지해야만 했습니다.

이것과 내가 죄의 속박으로부터 승리를 얻은 것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모두 일체가 상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죄의 지배하에 있던 당신을 해방시켰다고 선포하심으로써 죄의 노예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만 당신은 행동으로 옮기는 단계까지 그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네, 나는 그리스도가 죄를 용서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분이 주님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분이 내 삶에서 죄의 권세를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당신은 들은 것에 대해 머릿속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이고, 믿음은 그 이상의 것입니다. 믿음은 자유에 대한 약속에 의거하여 나가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믿음으로 이세상의 악한 권세를 이깁니다. 진정한 믿음만이 유혹의 권세에 대해 당신이 자신 있게 대항하도록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절제는 오로지 믿음으로 해방되었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질 때에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한일서 5:3-4).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베드로 전서 5:8-11).

2010년 3월 23일 화요일

블링크 세대

많은 크리스천들이 성경을 자신들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살아계시고 계시된 말씀이라고 믿으며 정규적으로 읽습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세대들에 대해 읽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구절이 수시로 반복되어 나오는 것을 읽습니다. 그럼에도 바로 이 많은 크리스천들은 마치 하나님이 오늘날에는 그분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믿는 자들의 한 세대가 모두 기도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지도 않고 온전히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중 다수는 그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결정해버리고 그 후에 하나님께 승인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들은 힘차게 몰아붙이고 나서 단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의 뜻이 아니면, 저를 멈춰주십시오.”

우리는 지금 “블링크 세대”라 불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개념에 대해 쓴 베스트셀러 책 제목이 ‘블링크:생각하지않고 생각하는 힘’입니다. 이론인즉슨, “당신의 본능을 믿어라. 눈 깜짝할 사이에 내린 결정이 최상이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듣는 서두름을 부추기는 “블링크 언어”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100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입니다. 하루밤새 부자가 될 수 있어요. 이 기회는 잠시 뿐입니다. 당장이 기회를 잡으세요.” 이 모든 것 배후의 원동력은 “블링크, 블링크, 블링크!”입니다.

이 같은 사고방식이 교회를 오염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단지 “블링크 크리스천들”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블링크 목사님들”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는 당황한 소교구 사람들로부터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수십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우리 목사님이 교회성장 집회에 다녀오시고 나서 즉시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자로 모든 것이 변합니다.’ 하루 밤 사이에 우리가 인기있는 유행을 창조하는 교회가 되기로 결정해 버렸습니다. 이일에 대해서 기도해 보자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척 혼란스럽습니다.”

불과 수년전만해도 크리스천들의 경구는 이러했습니다. “그 일에 대해 기도했습니까? 그와 관련해서 주님의 뜻을 구해보셨나요? 당신 주위의 형제자매들이 기도하고 있습니까? 경건한 조언을 받으셨나요?” 당신이 이렇게 하는지 물어보고자 합니다. 지난 세월동안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당신이 진정으로 그 문제를 하나님께 들고 나가 성심껏 기도한 것이 몇 건이나 됩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내린 결정은 몇 건이나 됩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온전히 통제하기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재난으로부터 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내리는 “블링크 결정”의 종착역이 거의 대부분 바로 재난인 것입니다.

2010년 3월 22일 월요일

더 이상 노예가 아닙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노예해방선언으로 노예들을 “해방” 한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법적 문서는 노예제도는 사라졌고 노예들은 자유하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소식이 처음 남부 농장으로 퍼졌을때, 많은 노예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기 주인에게 노예가 되였고 자유의 대한 약속은 거짓말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많은 부도덕한 지주가 그들의 노예에게 그것은 단지 소문이라고 말하고 그들을 속박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그들의 전에 노예였던 사람들이 새로 발견한 자유로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며 그들에게 진실이 분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명씩 그들은 자기 짐을 내려 놓고 노예제도에서 떠나 새로운 삶을 향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아직 들어보지 않으셨거나 이것이 사실인지 믿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죄의 노예를 갈보리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당신은 이제는 마귀에게서 떠나실수 있습니다. 당신의 죄의 짐을 내려놓고 사단의 지배에서 떠나 자유의 새 생명으로 들어갈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링컨이 노예를 해방시켰을때, 노예의 “사안”은 종결되었습니다. 노예의 주인도 노예도 아닙니다. 노예들은 “노예제도는 종결된 사안”이라고 하며 자유스럽게 떠날수 있습니다.

지금도 노예는 본능이나 두려움 때문에 밭에 나가 다시 목화를 뽑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 그를 다시 노예로 만들수 없습니다. 그는 해방되었지만 그 자유를 실행해야 합니다. 선언서가 준수를 요구할수 없고 주인도 다시 그를 돌아오게 강요할수 없습니다. 그것은 노예의 의지의 문제 입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6:7-8)

그것은 바로 이런뜻 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이미 자유롭게 되었다 선포하셨으니 당신이 노예가 됨은 종결된 사안이며 이제 당신에게 해방된 새사람으로 살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옳바른 일을 하게 하실수 없고 사단이 당신을 잘못된 일을 하게 할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은 믿음으로 해방되었다 선포하셨으므로 당신은 자유로운 사람으로서의 할일을 해야 합니다.

2010년 3월 19일 금요일

하나님은 모든 믿는자들을 위한 비상시 계획이 있으십니다

이세상이 아무리 불안정해지더라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안심하고 기쁨이 넘칠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할 때 우리를 보호하실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 세계적인 기근이 일어났을 때 비상시 계획을 마련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는 요셉을 애굽으로 먼저 보내셨고 그를 총리로 진급시키되고 창고에 기근을 견디기에 충분한 곡식으로 채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백성을 창고에 걸어갈 수있을 만큼 가까운 곳으로 옮기셔서 그들을 극심한 기근 동안 내내 먹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위한 피할 길을 마련하지 않으셨습니까? 그의 나라가 경제 파탄으로 휘청거리고 심한 기근으로 식량이 바닥나고 악한 왕이 그의 목숨을 요구했을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위한 비상시 계획을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그를 잔잔한 개울가에 숨기시고 새를 통해 식량을 보내셨습니다. 이러한 생존 계획에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 곡식통도 포함되었습니다.

노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의 가족에게 아주 세밀한 생존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세계적인 홍수로 야기된 파멸된 죽음위에 떠있는 안전한 방주가 있었습니다.

롯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를 무너질 소돔에서부터 건지시기 위해 개인적으로 천사들을 보내셨습니다. 롯이 안전하게 도시를 나올 때까지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실수 없었습니다. 직장의 상실, 경제파탄, 정권의 실락보다 더한 일이였습니다. 그것은 롯의 사회의 전멸이였습니다. 그러나 롯은 무사히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비상시 계획에 대해서 반복해서 보여 주었습니다. 이 사도는 난파를 당하고 도둑에 쫒기고, 투옥되고 반역으로 비난받고 암살자들에게 모함을 당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위기로부터 피할 대책을 마련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영적 경주가 끝났다고 결정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마지막 계획처로 부르셨습니다. 그를 부활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체적으로 예비하신 생존 계획이 주어져 있습니다.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위기를 지나가도록 하실 것입니다.

2010년 3월 18일 목요일

거룩함을 따르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명확하게 말합니다.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여기 간단명료한 진리가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부여하신 거룩함이 없이는 -이는 그분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헌신된 삶을 영위함으로써 우리가 경의를 표하는 귀한 선물입니다-우리 중 어느 누구도 주님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천국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현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우리의 매일의 삶, 우리 가족, 우리의 관계들, 우리의 간증과 사역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크리스천 집회에 참석했든지, 설교 테이프를 들었든지, 성경공부에 참석했든지 간에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암적인 죄를 품고 있다면, 만일 주님이 우리 죄에 대해 우리와 쟁론하실 것이 있다면, 우리의 어떤 노력도 경건한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와 정반대로 우리 죄는 더욱 전염성이 강해져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을 오염시킬 것입니다.

물론 이 문제는 모든 육체의 정욕을 넘어 영적 타락에 까지 이릅니다. 바울은 다음 구절에서 그와 같은 파괴적인 죄에 대해 묘사합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고전10:10).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당신이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 정욕을 성령께서 다루시도록 내어드리지 않겠습니까? 그 대신 하나님이 당신에게 마련해주신 탈출구를 구하고 신뢰하지 않겠습니까? 이 마지막 때에, 나는 당신에게 거룩한 두려움과 신뢰를 기르라고 촉구합니다. 이것은 당신의 주위에서 아무리 사악함이 소란스럽게 밀려들지라도 당신을 성결하게 지켜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함 가운데서 행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이 거룩함 속에 그분의 지속적인 임재의 약속이 있습니다.

이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넘어지지 않도록 보호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단지 그분의 말씀을 믿는다면 죄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 경건한 두려움에 대해 그분을 믿으십시오.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지키실 것입니다. 당신은 의지나, 약속이나, 다른 어떠한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죽음으로 몰고 가는 죄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라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

2010년 3월 17일 수요일

십자가는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부인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주님은 절대 “너희가 몸을 구부려 내가 너에게 십자가를 얹게 해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징집병일 모으는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의 군대는 자원봉사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지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지않고도 믿는자일수 있지만 제자가 될수는 없습니다.

저는 많은 믿는자들이 십자가의 길은 거부하는것을 봅니다. 그 대신 번창과 물질소득, 명예와 성공의평안한 삶을 택합니다. 저는 그 많은자들이 천국에 갈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것몸은 구원받겠지만 예수를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슬픔을 거절했으므로 십자가를 지어 고난의 참예하는 성도들과 달리 주를 영원이 알고 기뻐할 능력이 없을것입니다.

당신은 부인하는것을 배울 때까지 십자가를 지어야합니다. 무엇을 부인합니까? 끊입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예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금욕, 곧 물질이나 불의한 것의 거절을 강조하면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자기 수련을 배우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뜻은 우리의 힘으로 스스로 십자가를 질수 있다는것 부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의 노력으로 거룩한 제자가 될수있다는 모든 생각을 버릴때까지 십자가를 지지말라”는 것입니다.

수만명들의 그리스도인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자기부인에 대하여 자랑합니다. 그들은 술 마시지 않고, 담배 피지 않고 욕이나 간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두 굉장한 자기수련의 예입니다. 그러나 백년이 지나도 그들은 이것이 본인의 의지력외에 무언가 다른 요인 때문에 성취되었다고 결코 인정하지 않을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부인을 행하지만 자신을 부인한적이 없습니다. 어떤면에서는 우리는 모두 그렀습니다. 우리는 간혹 “솟구치는” 신성함을 정결함과 함께 체험합니다. 선한일은 보통 선한 감정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행과 좋은 습관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예수께서는 실제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너희가 먼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진리의 순간을 직면할 준비를 해라. 너희의 아집, 독선, 자족, 자위를 모두 부인하기를 배우게될 위기 상황을 체험할 준비를 해라. 너희가 오직 너희의 힘으로 할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인정할때 참된 제자로 나를 따를 수있다. 너의 의지력으로 죄를 이겨낼 수없다. 너의 유혹을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길수 없다. 너의 지혜로 일을 해결할 수없다.

예수를 사랑함은 당신을 무릎꿇게 하나 십자가는 당신의 얼굴이 땅게 닿게 할것입니다.

2010년 3월 16일 화요일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은 작고 보잘것없는 한 민족을 택하셔서 열방들을 교육하는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그분은 한 민족을 일으켜 자신의 선함을 이방에 드러내는 살아있는 본보기로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그러한 증거를 삼기위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그들 스스로는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는 장소들로 이끌어가셨습니다. 그분 자신만이 유일한 생명의 원천이요 그들의 모든 필요를 돌보아 주실 수 있는 광야에 이스라엘을 고립시키셨습니다.

그 황폐한 곳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생존에 대해 전혀 통제 할 수 없었습니다. 식량이나 물을 조달하는 것도 통제 불능이었습니다. 나침반도 없고 지도도 없었으므로 그들의 목적지를 설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먹고 마실 것입니까? 어느 방향으로 행진할 것입니까? 어느 곳에 도착할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그 모든 것을 하실 것입니다. 밤에는 빛을 발하며 어둠을 그들 앞에서 흩어버리는 기적의 구름으로 매일 그들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린 천사의 음식으로 그들을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개개의 모든 필요를 주님이 공급하시고 어느 대적도 그들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의 음성을 네게 듣게 하시며”(신4:36).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분이 인도하시는 그 말씀을 듣고 이렇게 증언할 것입니다. “모든 인류들 중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자가 누구인가?”(4:32-34참조)

고대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던 나라들은 나무나 은, 금으로 만든 우상들, 즉 다른 신들로 꽉 차있었습니다. 이 신들은 벙어리이고 듣지도 못하고 자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사랑하거나 인도하거나 보호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 나라들은 이스라엘에 눈을 돌리고 하나님이 보호하여 무서운 광야를 통과케 하신 이 특별한 민족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사랑하시고, 감정을 느끼시고, 기도에 응답하시고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여기 자기 백성의 모든 삶의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인도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훈련하실 백성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분의 권위에 복종하여 살고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삶의 모든 분야에서 전적으로 그분에게 통치권을 내어드리는 그러한 백성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백성이 세상에 대해 그분을 증거하게 될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한 백성에 대해 완전한 통치권을 원하시고 모든 경우에 그들의 완벽한 신뢰를 요구하실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의 갈 길을 아시고,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기적들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0년 3월 15일 월요일

당신의 십자가를 스스로 질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4) 그러나 예수님께서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으실수 없으셨고 당신도 그렇게 할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고문하는 자들에게 이끌리어 골고다를 향해 십자가를 지고 가셨는데, 이미 그 십자가를 오래지고 가시기에는 너무 쇠약하셨습니다. 그가 자신의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을때 그의 십자가는 다른 사람 어깨에 옮겨졌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얼마나 멀리 십자가를 지으셨는지 말하지 않지만 우리는 구레네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들고 못박힐 곳까지 지고가야 했다는 것을 압니다. (마27:32)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주님이 하실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하게 하시겠습니까? 예수께서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십자가는 나무로 만들어졌든 영적이든 십자가입니다. 단지 “주님의 십자가는 다르다. 우리의 십자가는 영적인것이다.”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를 스스로 지으실수 없었다는 것이 저에게는 큰 소망을 줍니다. 나의 짐으로 힘겨워서 바닥을 치고 나의 힘으로 나아갈수 없을때에, 그것이 나 혼자만 당하는것이 아닌것에 저는 격려를 받습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으라”고 하셨을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십자가를 기억하셨고 또 다른 사람이 대신 십자가를 지어야 했다는 것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곧 우리를 땅으로 쓰러트릴 십자가를 지으라고 하셨습니까? 그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고통, 무력함, 부담에 대해 다 알고 계십니다. 그는 우리의 힘으로 스스로 끝까지 지을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사실이며 우리가 모든 고통과 아픔을 새롭게 볼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스스로 지으시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무엄한 것 같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 한명도 주님을 따를때 자신들이 지어야할 십자가를 지을수 없다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서 좋은 제자가 되고 싶어하지만 그 십자가가 또 우리의 인간의 인내성 한계로 이끈다는 것을 잊어 버립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고의적으로 우리를 쇠약하고 무력하게 하며 포기까지 하게 만드는 십자가를 지으라고 하시겠습니까? 분명히 그랬습니다. 예수께서 경고하시기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그래서 그는 우리가 그 교훈을 얻을 때까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계속해서 애써보라고 요청하십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진토에 처박히게 할때까지는 우리는 우리의 힘이나 능력이나 되지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다는 교훈을 배울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는 뜻입니다.

2010년 3월 12일 금요일

하나님의 보배는 질그릇에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고무적인 구절중에 하나는 고린도후서 4장7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 다음 바울은 이 질그릇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죽임을 당하고,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절대로 버림을 당하거나 낙심하지 않으나 하나님께 쓰임받는 이들은 끊임없는 육체의 짐을 지으며 탄식하며 새로운 옷으로 덧입기를 사모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을 조소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잘하려고 하는 자기중심적인 노력에 비웃으십니다. 그는 절대 대단하고 강한자를 쓰지 않으시고, 이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십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6-29)

이것이 얼마나 나를 적절히 표현하는지요! 미련한것, 멸시 받는것, 천한것, 문벌이 별로 좋지 않은것, 지혜가 많지 않은 것.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계획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비밀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약한자일때 부르셨습니다. 아무것도 아닌것을 통해 모든것을 가능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는 그의 가장 귀한 보배를 우리의 질 그릇에 담으셨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날베스, 과거의 마우마우에 깡패의 리더가 무릎을 꿇고 예수를 주로 영접하는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적인 표면적 체험이 아니였습니다. 그는 정말 진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깡패가 되고 살인방조 혐의자로 감옥에서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포기하셨나요? 한순간도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그 이스라엘 날베스는 오래 참으시는 구세주의 사랑과 용서함을 받아드려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실패하셨습니까? 당신을 쉽게 둘러쌓는 죄가 있습니까? 은밀한 죄로부터 승리하지 못하는 비겁한자라고 느끼십니까? 그러나 그 약함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사모함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갈망하며 사랑하고 그에게 다가가십니까? 그 사모함과 갈망함이 당신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그것이 당신을 하나님을 실망시킨 자들과의 차이점입니다. 그것이 당신을 분리시킵니다. 그 갈망을 계속 되살려야 합니다. 계속 의로움에 대하여 목말라야 합니다. 당신의 약함을 절대 정당화 시키지 마십시요. 그것에 항복하지 마십시요. 그리고 나의 삶의 하나라고 인정하지 마십시요.

2010년 3월 11일 목요일

삶을 통하여 하신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그분의 전으로 불러 모으는지, 어떻게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구원하시는지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분은 삶을 통하여 하십니다. 주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밝히는 빛의 증언을 통해 자신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종들이 올바른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가정에서, 동네에서, 도시에서, 직장에서 빛을 발합니다. 이러한 생명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결국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본으로서 비난받을 여지없이 올바로 사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이러한 종들은 정직하고 이기심이 없고 자신 안에 조금도 어두운 부분이 없이 일을 처리합니다. 예수님께 온전히 헌신된 삶을 살며 항시 남을 섬길 태세가 되어있습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종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바울이 묘사한 이런 성도야 말로 칭찬받을 만 합니다.

이러한 빛에 대해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최근, 뉴욕에 소재한 어느 회사의 CEO가 우리 교회에 전화를 했습니다. 닐 목사님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CEO는 닐 목사님에게 우리 교회의 교인으로 자기 회사에 근무하는 두 여인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 두 여인은 다른 직원들과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예의바르고 미소를 띠고 남을 도우며 결코 불평이나 험담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무언가 다릅니다. 그 다른 점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당신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그들 직장에 놓아두신 하늘의 촛대입니다. 그들이 비추는 빛이 온 직장을 밝힙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들 안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직장의 보스가 이세상의 것을 초월한 그 무언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 CEO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부흥회 초청장에 응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작성한 자료 패키지를 읽어 본적이 있을까요? 아니오, 쓰레기통에 모두 버리고 다시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진정한 빛, 즉 그리스도안에 감추어진 생명으로부터 탄생하여 겸손한 두 여인의 매일의 삶으로 드러난 빛에 반응을 보였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할 때에 만 우리 지역사회에 빛을 비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능력 있게 메시지를 전파하려면 전하는 그 메시지대로 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빛은 삶의 사소한 일들을 통하여 비친다는 것입니다.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가뭄의 계절

저는 수천명에게 설교를 하지만 매우 메마르게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함에서 아주 먼것을 느끼는것입니다. 이런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 읽기를 갈망하지 않습니다. 그런 메마른 기간에는 말씀읽기를 주로 의무적으로 하게 됩니다. 메마르고 비었을 때는 나의 믿음이 온전하고 예수님에 대한 나의 사랑이 강할찌라도 기도하려는 충동을 크게 느끼지 못합니다.

교회에 앉아있는데 주위의 사람들은 은혜를 받으나 본인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적이 있으십니까? 그들은 울며 기도하며 엄청난 감정으로 예배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전혀 감동을 받지 못합니다. 이때 당신은 본인의 영적생활에 무엇이 잘못되었나 회의가 들기 시작합니다.

저는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은 신앙생활에서 그러한 영적 가뭄을 종종 체험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고립됨을 겪으셨습니다. 그때 주께서 이렇게 부르짖으셨습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런 영적 가뭄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있습니까?

1. 기도의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한두시간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메마름과 공허함을 가장 빨리 떨쳐버리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은밀한 골방에서의 이 만남을 미루면 죄책감이 생기게 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를 하나님 임재하시는 곳으로 인도해야 할 것을 알지만 우리는 많은 것으로 스스로를 바쁘게 합니다. 시간은 지나고 하나님을 배제시킵니다. 우리는 여러 “생각하는 기도”를 하나님 계신 곳으로 던져 보냅니다. 그러나 문닫고 은밀한 골방에서 아버지께 홀로 기도하는 것과 바꿀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의 은혜의 보좌앞으로 담대히 나오십시요. 죄를 짖고 실수를 했을찌라도. 경건한 슬픔을 가지고 회개하는자는 즉시 용서하십니다.

2. 나는 조금의 고통을 더이상 두려워 하지말아야 한다.

예수의 부활전에 잠시동안의 고통이 앞섰습니다. 우리는 죽습니다. 우리는 고생 합니다. 고통과 슬픔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받거나, 항거하거나 상처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통없는 구제를 원합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개입을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행하시옵소서. 저는 약하고 언제나 그럴것입니다. 저는 제 식대로 행하는 동안 초 자연적인 구제를 기다릴 것이니 모든것 주님께서 행하십시요.”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할것은 항상 고통은 최후의 승리전에 있는 잠간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베후5:10)

2010년 3월 9일 화요일

탕자와 그의 아버지

나는 탕자가 (눅15 참조) 그의 아버지께 돌아온 것은 그와 그 아버지사이에 지나간 역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이 젊은이는 자신의 아버지의 성품을 알고 있었고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그의 아버지가 분노하고 앙심을 품으며 그 아들을 구타하고 그가 탕진해 버린 돈을 일전까지 남김없이 갚게 할 사람이었다면 그가 왜 그런 아버지께 돌아왔겠습니까?

탕자는 만약 그가 돌아가면 자신의 죄에 대해 비판을 받거나 비난을 당하지 않을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안다. 아버지는 내 죄를 내 앞에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나를 다시 받아주실 것이다.” 이러한 역사가 있다면, 언제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얼마나 인자한 축복으로 앞서 나아갔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이 젊은이는 아버지께 집으로 돌아오는 노중에서 되뇌었던 충심에 찬 참회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얼굴을 마주하자 충분히 고백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달려와 껴안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것이 너무 기뻐서 “아들아 사랑한다. 집으로 와 원래대로 회복되어라,”하며 쉴 새 없이 여기 저기 입 맞추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고백을 마치기도 전에 이렇게 하였습니다. 아들이 말을 꺼내기는 했으나 아버지가 그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의 죄가 이미 다 사해졌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다만 하인에게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내 아들에게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라. 축하 잔치를 준비해라. 내 아들이 집에 돌아왔으니 모두 즐기자.”

이 아버지에게 죄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유일한 문제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아들이 참회의 말을 입 밖에 내기도 전에 자신이 용납된 것을 알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강조하시는 점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모든 죄보다 크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롬2:4)

2010년 3월 8일 월요일

예수님과 풍랑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파선할 것같은 배에 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주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거친 바다에 까닥거리는 코르크 마개같이 움직일 배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소규모의 타이타닉과 같은 경험으로 휩쓸릴수 있다는것을 예수님은 항시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마14:22)

예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그는 산위에서 바다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견뎌야할 시험을 통과하도록 기도를 하고 계셨던것입니다. 배여행, 풍랑, 파도의 흔들림, 바람, 모든것이 아버지가 계획하신 시험의 한부분 이었습니다. 그들은 곧 가장 놀라운 것을 배울것이였습니다. 그것은 풍랑에서도 예수를 알아보는것입니다.

이때 제자들은 예수는 기적을 행하는분, 떡과 물고기를 기적적인 양식으로 변화시키는 분으로 보았습니다. 그를 죄인의 친구요 모든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온 분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는 모든것을 공급하시고 또한 물고기의 입에서 부터 가저온 돈으로 세금을 내게하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주를 영생의 말씀을 가지신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가 마귀의 일을 멸하실 능력이 있으심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가 기도하며, 용서하며, 묶고 푸는것을 가르친 선생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풍랑에서 알아보는것을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의 염려의 원인입니다. 우리는 기적과 치유의 예수님을 믿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죄사함을 주심을 믿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모든것을 공급하시며 언젠가 우리를 영광 가운데로 인도하실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갑작스런 풍락이 닥치고 모든것이 무너지는듯 할때 예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위해 풍랑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참으로 힘든일이 있을때 주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의심합니다.

이 풍랑을 통해서 제자들이 배워야 하는것은 단 한가지 였습니다. 간단한 이 한가지는 어떤 깊고 신비롭고 충격적인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주님은 우리가 삶에 있는 모든 풍랑에서 그를 주로 믿는것을 원하십니다. 가장 어두운 시험 가운데에서도 생기와 신뢰함을 잃지 않는것입니다.

2010년 3월 5일 금요일

“성령 안에서” 가라

당신은 “성령 안에서” 지구상 어느 나라에도 갈 수 있습니다. 당신이 무릎을 꿇고 있는 동안 아직 까지 손길이 미치지 않은 민족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당신의 은밀한 골방이 온 나라에 걸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는 본부가 될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의 예를 생각해 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악한 소돔을 놓고 기도했습니다. 주님이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창18:26).

아브라함은 이를 듣고 주님과 협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18:28) 아브라함은 이렇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주님, 그 오십 명의 믿는 자 중에서 마흔 다섯 명만 의인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직 그들만이 기도로 구하는 자들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을 구하는 올바른 사람이 단지 열 명만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께 기도하는 자가 열 명밖에 없다면 그 도시를 용서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18:32).

이 구절은 주님에 대해 시사해 주는 바가 있습니다. 그분은 의로운 자들을 한 무리만 찾을 수 있다면 기꺼이 사회 전체를 구원해주시는 분입니다. 자신들의 국가를 위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 문제에 대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 보다 한층 더 나아가십니다. 에스겔서 22장에서 하나님은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기도하는 단 한 명의 신자를 찾으시는 것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겔22:30).

에스겔이 예언할 당시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은 도처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며 세속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압제 하에 있었고 모든 면에서 곤핍하며 정욕으로 가득 차 피차 강탈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주님께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중보하기위해 무너진 데를 막아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단 한 명의 중보자만 찾았을 지라도 나라 전체를 구원해 주셨을 텐 데 말입니다.

당신이 직접 외국으로 나갈 수 없다면 중보기도로 지원하는 모임의 일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외국으로 나가기 위해 자신을 드린 사람들을 지원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 여행에 대하여 글을 쓸 때 자신을 돕는 자로서 디모데와 디도뿐만 아니라 자신을 공궤했던 루디아와 또 다른 귀한 여인들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이 사람들 모두가 전 세계를 복음화 하는데 일조했던 헌신된 종들입니다.

2010년 3월 4일 목요일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라

예수님이 자신의 때로부터 종말의 때까지 지켜보시면서 엄청난 문제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마9:37).

이 말씀을 읽으며 나는 궁금해졌습니다. “해결책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일꾼들을 길러내어 세상으로 보낼 수 있을까?” 바로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누군가가 이 일꾼들을 추수하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기도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9:38).

당신은 “전 세계에 걸쳐 문호가 닫히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사실 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눈에 어떤 나라들이 아무리 폐쇄적으로 보여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유럽에서 철의 장막과 아시아에서 죽의 장막을 찢어버리셨다면 그 무엇도 그분이 원하시는 곳에서 일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1980년대 우리 사역이 텍사스 주에 본부를 두고 있을 때 나는 1년 동안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누군가를 뉴욕으로 보내주실 것을 기도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누구를 선택하시든지 모금하고, 회의를 소집하고, 후원자들을 모으는 일 등을 돕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이 특정지역의 추수를 위해 일꾼을 보내달라고 청하는 동안 주님은 나의 마음에 부담을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강렬한 기도를 통해 선교사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안디옥에서 교회의 장로들이 추수를 위해 기도하던 중 일어났던 일 이었습니다(행13:2-6 참조). 바울의 첫 번째 선교 여행은 기도 모임의 산물이었던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얻은 직접적인 결과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안디옥의 경건한 사람들처럼 추수를 위해 기도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 성령께서 지상에서 주님께 쓰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그 마음 가운데 다급함을 느끼게 해주십니다. 그분은 도처에 있는 사람들을 감동시키시고 자신의 사역을 위해 구별해 두십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한 백부장이 죽어가는 하인을 고쳐주시기를 구하려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리스도가 그 백부장에게 대답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마8:13). 나는 추수를 위해 중보기도 하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할 때 성령께서 어떤 곳의, 그 누군가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어느 곳이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강력한 사실은, 우리의 기도가 일꾼들을 추수하는 곳으로 보내는데 쓰임 받는다는 것입니다.

2010년 3월 3일 수요일

하나님의 한없는 죄사함

친구여러분,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죄사하심을 절대 제한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오래참으심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되, “만일 [너의 형제가]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눅17:4)

이런것을 믿으실수 있습니까? 하루에 일곱번을 이사람은 내 앞에서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고 “잘못했다”고 합니다. 그리하면 나는 그를 계속해서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가 회개한다면 얼만큼 더 용서하시겠습니까?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마십시요. 어떻게 또는 왜 무조건 용서하시는지 묻지 마십시요. 그냥 받아들이십시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의 형제를 한두번 용서해주고 그에게 더이상 죄를 짖지말라고하라. 만약 또 죄를 지면 그와의 관계는 단절될 것이라고 해라. 그에게 상습적인 죄인이라고 말해라.” 오히려 예수께서는 무한정한, 무조건적인 용서함을 원하십니다.

죄사함은 하나님의 본질이십니다. 다윗은 말했습니다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시86:5) 하나님께서는 지금 당신에게 죄사함의 기쁨으로 가득채우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당신의 영혼의 모든 문과 창을 열어 성령으로 용서함이 가득하도록 하셔야합니다.

요한은 믿는 자로써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2:2)

요한에 의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죄를 짖지않는것” 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죄를 질 경향이 있지않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대는 자녀가 죄를 지면 어떻게 되나요?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2:1)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1:9)

친구여, 당신의 죄책감을 내려놓으십시요. 더이상 그짐을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의 문과 창을 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요. 하나님은 용서 하시고 또 용서하십니다. 그는 당신의 힘겨움이 승리가 되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주님께 간구하신다면, 즉 회개하신다면, 용서를 받으실 것입니다. 지금 곧 받아들이십시요.

2010년 3월 2일 화요일

죄책감의 위험

죄책감은 믿음을 파괴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원수는 그리스도인을 간음하는 자나 중독자나 창녀들로 만드는 데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인들을 불신자로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사용해 사람의 마음을 묶습니다.

사단은 죄책감으로 당신을 무너뜨려 결국 믿음을 저버리기를 원합니다. 그는 당신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시키기 원하며 누구도 우리에게 관심을 두지않는다는 생각을 하기 원합니다. 당신은 불행과 고통에 살것이며 항상 정욕에 노예가 될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를수 없고 당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내버려 졌으며 하나님이 당신의 필요와 감정에 상관 하지않으신다고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사단이 당신을 그 절망의 시점에 도달하게 할수있다면 불신으로 가득 채울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의 임무에 성공한 것입니다. 무신론으로 통하는 간단한 3가지 단계는 죄책감, 의심, 불신 입니다.

죄책감은 급속히 번지는 암과 같이 영혼의 활력을 갉아 먹습니다. 삶의 지배권을 잃게 하며 모든 영적 생활을 포기하거나 그만 두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육체적 고통과 병을 줍니다. 암과 같이 죄책감은 영적 생명이 없어질때까지 스스로를 증가시키며 하며 그 최종 결과는 나약함과 부끄럼과 실패입니다.

죄책감을 없애는 방법은 죄를 없애는 것인데, 그것이 단순하게 들리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 삶에 들어온 제삼자를 떨어뜨리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자들이 애를 쓰나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당신을 묶어 놓으려하는 것에서 단지 멀어지는것이 아닙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행동은 하나님앞에 당신이 실패한 바로 그 후에 하는 행동 입니다. 당신을 고소하는자의 거짓말을 믿고 절망으로 포기하겠습니까 아니면,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물결을 받아드리시겠습니까?

아직도 당신을 묶어놓는 것에서 자유함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용서구하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원하지만 은밀한 곳에서 여전히 합법적으로 당신의 것이 아닌것을 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신실한 기도를 들으시며 주의 온전한 뜻에 따라 우리가 행함을 원하도록 하실수 있습니다. 그의 뜻을 이루기를 당신이 원하도록 간구하십시요.

2010년 3월 1일 월요일

오늘 그분의 음성을 들을수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하던 한 사람에 의해 수백만이 구원에 이르렀습니다. 사울은 “소리 있어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그리고 그가 바울이 되었을때 그 음성을 계속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구주의 음성이 그에게 임하도록 했습니다.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또 소리가 있으되” (행10:9, 13)

한 사람이 한 음성에 순종함을 통해 모든 이방 민족과 고넬료가 하늘나라로 영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베드로와 같은 신약시대에 살고 있으며 우리 또한 하나님의 음성이 임하도록 해야합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하늘에서 부터 오는 이 음성 듣는것을 배우는 그리스도인을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실수 있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임하도록 기다리는 대신 상담자과 기독교인 심리학자에게 급히달려가 한 기간 또 다른 기간을 보내며, 하나님으로 부터 듣기 위해 책을 읽고 테이프를 듣습니다. 우리의 삶에 확실한 방향을 찾으며 목회자들이 무엇이 옳다 잘못됬다 말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따를 만한 인도자와 미래에 대한 도표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주님께 나아가며 주의 음성을 듣기를 아는 자는 드뭅니다. 많은 자들이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 것과 진실로 하나님과 접촉 하는것은 알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것에는 무지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마 11:15 참고)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다시한번 진동시키시기 원하십니다.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2:25-26)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나의 음성이 다시 들릴것이다. 듣는 자들은 이 땅을 흔들것이며 하늘과 땅이 옮겨질 것이다. 나의 음성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지막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께서 부르짖으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

“내 말 들리기를 나는 원한다. 문을 열어라. 너의 은밀한 골방에 나를 들어오게 하라. 나는 너와 말하며 너는 나에게 말하기 원하노라. 교제를 나누자. 바로 이것이 앞으로 이 세상에 올 유혹의 때로부터 너를 지키는 내 방법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