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30일 목요일

자신의 한계에 도달 했습니까?

당신은 자신의 한계에 도달했습니까? 지치고, 낙심하고 포기하려고 합니까? 다음 질문들에 네, 아니오 라고만 답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겠다고 약속했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을 결코 떠나지 않고 세상 끝날 까지 당신과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분은 당신이 넘어지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당신을 아버지 보좌 앞에 흠 없이 나타내시겠다고 말씀 하셨습니까?
-그분은 지속적으로 당신의 필요를 공급해주시겠다고 말씀 하셨습니까? 그분은 당신이 복음을 전파하는데 필요한 모든 씨앗을 당신에게 약속하셨습니까?
-당신이 받는 것보다 그분은 더욱 기꺼이 주고자 하십니까? 세상에 있는 자 보다 당신 안에계신 그분이 더 위대하십니까?
-당신을 향한 그분의 생각은 선한 생각이십니까? 그분은 자신을 부지런히 구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입니까?
-그분은 당신을 위하여 영광 중에 거처를 마련하고 계십니까? 그분은 자신의 백성을 집으로 모아들이기 위해 구름가운데 오실 것입니까? 그분이 오실 때 당신을 그분과 함께 갈 것입니까?

이 모든 질문에 당신의 대답은 “절대적으로 그렇습니다,”이어야만 합니다.

이제 정리해보십시오. 스스로에게 질문하십시오.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에 신실하시다고 믿는가 아니면 내 신뢰는 흔들리는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1:2-7).

당신은 하나님의 지혜, 인생의 문제들을 푸는데 필요한 모든 지혜를 붙들 수 있습니다 - 만일 당신이 이 약속에 당신의 전 생애와 미래를 던지고 흔들림 없이 믿는다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지혜를....후하게 주십니다.

2010년 9월 29일 수요일

당신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하나님이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불만에 찬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 마음을 다하여는 “전심으로, 전력을 다해, 당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기록했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고후9:7). 사도는 이 연보하는 일을 두 가지에 적용했습니다. 곧, 우리의 금전적인 헌금에 관한 것과 우리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일에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가 예루살렘의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성도들을 위해 헌금을 걷게 해달라고 그에게 실제로 구걸하다시피 간청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마게도냐인들은 주님께 온전히 헌신했기에 그들이 가난한 중에도 드렸습니다!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8:5). 바울은 마게도냐인들이 금전 그 이상의 것을 드렸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에게 “여기 우리의 연보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봉사하기를 자원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들의 형제를 섬기는 데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8:3). 그들은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을 넘어 많은 기도와 함께 드렸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것이 오직 명령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드린다면 또는 “십일조는 신약의 개념인가 아니면 단지 구약의 개념인가?”하고 항상 궁금하다면, 당신의 마음 자세는 전혀 틀린 것입니다. 만약 목사님이 당신에게 요구했기 때문에 10%를 드린다면 그것도 틀린 것입니다. 이중 어느 것도 그 핵심, 즉 드린다는 것이 의미하는 중심점에 이르지 못합니다!

당신이 자신을 주님과 그분의 사역에 온전히 드리고자 한다면 즐거이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이 구절은 나를 아프게 찌릅니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도 종종 나의 삶과 사역에서 주님의 기쁨이 없이 일하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나는 너무 지쳤습니다. 어떻게 해 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 하나님, 당신이 오셔서 힘을 주셔야만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보편적인 인간의 부르짖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자신을 드리기 위해서는 그것이 즐거워하는 영으로부터 솟아나야만 합니다. 이것은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가능하도록 열려있습니다.

즐거이라는 말의 희랍어는 “들떠서 법석대는, 즐거운, 반가운” -가벼운 마음, 기꺼움, 반가움, 들뜬 마음으로 가득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해 네가 무슨 수고를 하든지, 중보하든지, 내 집에서 예배를 드리든지, 또는 네 은밀한 골방에서 나를 찾든지, 즐거이 하라! 기뻐하고 모든 일- 너의 금전, 너의 섬김, 너의 시간, 너의 삶에 관용하라!”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이 지루하고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까? 대체로 당신을 슬프고 지치게 만들어 버리는 그저 부담스러운 일입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짐에 대해 당신이 불평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붙들고 당신의 삶에서 그런 것들을 쫓아내 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의 자원을 인출하는 당신의 수표책은 믿음입니다! 그분은 말씀 하십니다. “나는 너를 위해 이미 예비해 놓았다. 내가 필요보다 더 많이 공급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필요가 네 인생에 무엇이 있겠느냐?”

2010년 9월 28일 화요일

모든 일에 넉넉함

왜 수많은 신자들이 더 이상 지속해 나갈 수 없을 것처럼 연약함, 절망과 허무한 느낌을 체험할까요? 그것은 그들이 성령께서 바울에게 주셨던 계시, 즉 믿음으로 청구하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이 마련해두신 모든 예비하심에 대한 계시를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바울의 풍요한 종에 대한 묘사, 즉 언제나, 모든 위기의 때에 필요한 모든 것, 그 이상을 소유한 자의 묘사에 들어맞는 사람입니까? 당신은 하늘 은행에서 인출함으로써 이것을 입증해보았습니까?

수년 간 나는 캐스린 쿨만과 사역했습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그녀의 모임에서 마음을 쏟아 설교했고 통상 하루가 끝날 무렵에는 기진맥진했습니다. 어느 날 밤 캐스린이 그웬과 내게말했습니다. “나가서 저녁을 먹읍시다.” 나는 그녀에게 “미안하지만 너무 피곤합니다. 모텔로 가서 잠을 자야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데이빗, 오늘 밤 성령의 기름 부으심 하에 설교했나요?” “당신이 알다시피 나는 기름부음을 받았어요. 제단이 꽉 찼잖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캐스린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뭔가 놓친 것이 있어요. 만약 당신이 성령의 능력 하에서 사역한다면 시작했을 때 보다 예배가 끝났을 때 더욱 강해져야만 합니다. 그분은 생기를 주시는 영이시기 때문이지요! 당신은 당신의 육을 초월할 수 있어요. 성령에 의해 그 자유를 청구할 수 있으니까요.” 그 이후로 나는 내 사역에서 그 진리를 입증했습니다.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여기서 넘치다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계속 증가하다, 시작 보다 끝에 더욱 많이 갖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투가 강렬해 질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증가 합니다! 연약함이 당신에게 임할 때 그분의 힘은 더욱 강하게 옵니다 - 당신이 그것을 믿는다면.

2010년 9월 27일 월요일

그분은 이미 예비해두셨습니다

하나님이 특정한 사역을 위해 우리를 부르실 때 그분은 우리가 그일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예비해두셨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이 구절은 단지 소망이 아닙니다 - 그것은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능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당신의 필요를 만족시키는데 관심이 있지 않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필요 보다 더욱 당신에게 주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풍성한의 의미입니다 - 계속 증가하는, 풍요를 넘는 공급하심!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3:20).

여기서 약속된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낙심하고 지쳐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어느 때나 어떤 상황에서나 당신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심으로써 당신을 활기차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들어라 모든 목자여! 내 집을 성실하게 돌보고 기도, 찬양과 중보로 수고하는 모든 자들아 들어라! 나는 너희에게 풍성한 힘, 소망, 기쁨, 평강, 안식, 재정, 격려, 지혜를 주기 원한다. 실은, 나는 너희가 언제나 필요한 모든 것보다 넘치도록 풍성하게 갖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가 주님의 것들에 가난한 영적 거지가 되기를 의도하지 않으십니다. 정반대로 풍요한 종은 하나님이 그를 위해 마련해 두신 모든 엄청난 예비하심에 대한 계시를 누리는 자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이 계시를 쫓아갑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9-10).

바꾸어 말하면, “우리 조상들은 하나님이 마련해두신 모든 엄청난 예비하심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할 수조차 없었다. 그들의 시각, 청각 또는 상상 속에도 결코 감지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도 이 일들에 대해 소경이 되어 우리의 것에 대해 알지 못하고 지낼 이유가 없다. 우리 눈이 봐야만 하고 우리 귀가 들어야만 하고 우리 마음과 정신 속에 들어와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예비하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계시해 주셨다!”

진정으로 성경은 우리가 이 계시를 위해 그분께 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이것을...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2-14절).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을 정말로 대면한 적이 없다고 나는 믿습니다. 우리는 여러 번 읽긴 했지만 다만 죽은 문자들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들을 붙잡고 이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 당신이 예비하신 것을 계시해 주십시오. 당신의 자원들에 대해 내 마음과 내 영을 열어 주십시오. 당신의 말씀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그것들을 청구할 수 있도록 나에게 기꺼이 주어진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고 합니다.”

2010년 9월 24일 금요일

풍요한 종!

최근 나는 많은 염려의 짐을 지고 아주 무거운 마음으로 기도 중에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분 앞에서 내 문제에 대해 탄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오 주님, 내 생애를 통틀어 이렇게 지친 적이 없습니다. 더 이상 지속해 나갈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그리고 나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지쳤기 때문에 눈물이 내게서 문자 그대로 터져 나왔습니다. 울면서 누워 나는 “내 눈물이 분명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령이 진정 오셔서 나에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어떻게 하실 것이라는 내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나는 동정, 격려, 이해를 원했습니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내게 주셨습니다만 그 방법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 많이 달랐습니다.

주님은 고린도후서 9장 6-11절로 가라고 내게 친절히 가르쳐 주셨고 그 구절 안에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나는 이 구절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성경을 덮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혼동됩니다. 여기에 나를 돕거나 격려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드디어, 성령께서 나의 속사람에게 강권적으로 그러나 사랑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데이빗, 이것은 네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것과 관련이 있다. 최근 너는 풍성하고 즐거운 마음 없이 나를 섬기고 있었다. 나를 섬기는 데 있어 네 기쁨과 행복이 어디 있느냐? 나의 말씀은 단지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해 연보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와 내 몸에 대한 사역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너를 뉴욕 시로 불렀고 도움이나 풍부한 자원 없이 너를 보내지 않았다. 네가 필요한 모든 것 - 힘, 안식, 권능, 능력, 기쁨과 성원이 네게 주어져 있다. 네가 슬픔과 과중한 짐에 짓눌려 일할 이유가 전혀 없다. 너는 모든 힘과 기쁨을 접할 수 있다!“

2010년 9월 23일 목요일

혼자 힘으로 일어나 싸우는 것을 배우십시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싸움을 싸우는 것을 배워야합니다. 당신의 구원을 위해 어떤 다른 사람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기도의 용사 친구가 있다면 전화를 걸어 “내 앞에 전투가 놓여있어요. 나를 위해 기도해 주겠어요? 당신이 하나님께 영향력이 있는 줄 알아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입니다만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용사가 되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마귀와 대항할 수 있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삿6:16).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너를 보냈다 -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을 무너뜨린 사람을 찾으려고 왔습니다. (삿6:28-30 참조). 기드온이 어디 있었습니까? 그는 숨어있었습니다 -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지 못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는지 의심하며. 기드온이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13절). 우리 중 많은 사람도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서서 싸우는 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하신다는 것이 당신에게 온전히 납득되는 순간. 그분이 당신에게 말씀하시고 당신이 알아야할 모든 것은 보여주실 것이라는 것이 납득되는 순간!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합니다. 기드온처럼 당신도 의심할지 모릅니다. “내가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나는 약하고 경험도 없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삿6:14). “무슨 힘이요?” 당신은 묻습니다. 기드온의 힘은 그에게 향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싸여 있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똑같은 말-“내가 너와 함께 한다”-이 당신의 힘입니다! 이 말씀이 진리라고 믿으며 그에 의지하여 행할 때 당신은 그 힘을 받을 것입니다!

2010년 9월 22일 수요일

당신의 두려움과 불신을 처리하십시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뿌리 깊은 죄는 여전히 불신이었고 그것은 온갖 종류의 두려움을 초래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죄의 뿌리를 드러내기 위해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선지자는 간단명료한 말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를 보아라. 일어나 싸우기를 무서워하여 숨어있는 겁쟁이 무리구나. 너희는 이미 포기했다. 하지만 너희에게는 하나님이 구원하신 역사가 있다! 그분은 너희 조상들이 그분을 신뢰했을 때 큰 승리를 주셨다. 그리고 너희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도 너희는 그분을 믿지 않는다!”(삿6:7-10 참조).

많은 크리스천들은 마귀가 자신들을 파멸시킬까봐 공포에 질려있습니다. 그들은 실수를 하거나 또는 자신들의 죄로 돌아가서 마귀가 제멋대로 할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옥 구덩이에서 나온 거짓말입니다. 성경은 당신이 이 삶을 살아나가며 공포에 질릴 필요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당신이 두려움을 붙들고 있을 때 그것은 전염됩니다. 당신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감염됩니다. 기드온이 군대를 집합했을 때,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군인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떠나 돌아가라....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삿 7:3).

하나님은 오늘 그분의 교회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묻습니다. “너는 왜 두려워하느냐? 내가 네 삶에 승리를 가져다줄 것을 신뢰하지 않고 죄를 짓느냐? 나는 너에게 대항하여 다가오는 모든 마귀의 권세를 무찌르겠다고 약속하였다!”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는 거대한 돌로 바알신상과 아세라 여신상을 세웠었습니다. 그의 논리는 이러했습니다. “바알이 미디안에게 우리를 이기는 힘을 주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들의 신을 섬기면 우리에게 힘을 줄 것이다.” 수마일 떨어진 주변에서 미디안 사람, 모압 사람들을 포함한 사람들이 그곳에 예배하러 왔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서 강력한 마귀의 견고한 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이 우상을 제거해버릴 때 까지 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헐고 찍어버려라!” 그래서 한 밤중에 기드온은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삿6:27)하였습니다. 그는 수소를 끌어다 밧줄을 사용하여 바알과 아세라를 헐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주었던 똑같은 메시지를 오늘날 그분의 교회에게 주고 계십니다. “나는 너를 도와주기 원한다. 하지만 네가 나를 신뢰하지 않으면 도울 수가 없다. 너는 두려움에 차 있다. 내가 구원을 이루기 전에 너는 이 견고한 진, 항상 빠지는 이 죄를 헐어버려야만 할 것이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히12:1). 우리는 두려움과 죄의 모든 견고한 진을 헐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기드온은 힘센 수소를 이용하여 마귀의 견고한 진을 헐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드온의 수소보다 훨씬 더 강력한 무기를 받았습니다(고후10:4-5 참조).

승리는 믿음으로 기도함으로 옵니다. 이것은 냉랭하고 공허한 기도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의 기도, 즉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을 믿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엡6:18).

2010년 9월 21일 화요일

일어나 싸우는 법

교회에서 영적 전쟁에 대해 말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들은 아직도 원수에 대항하여 싸우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마귀가 제멋대로 까부르는 자들입니다!

나는 크리스천이 당하는 모든 불운이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주의, 불순종, 게으름의 많은 부분을 마귀의 탓이라고 그릇된 비난을 합니다.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을 마귀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다룰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 세상에는 실제 마귀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는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계략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전능하신 분을 그분의 옥좌에서 끌어낼 수 없다면 그는 당신으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떼어내려 할 것입니다. 그는 예배자들을 불평하는 자와 신성모독 하는 자로 만들고자합니다.

사탄은 마음대로 당신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들 주위에 화염벽을 두르셨고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그 벽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사탄은 크리스천의 마음을 읽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귀가 엿듣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하기를 두려워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마귀가 그들의 모든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무소 불임하시며 전지 전능하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육과 마귀에 대항하여 일어나 강건하고 싸움을 하라고 명령합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 16:13).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엡6:10).

당신은 마귀에 의해 제압당하는 데 대해 - 저급하고, 우울하며, 기쁨이 없고, 허무하고 쫓기는 삶에 대해 진저리를 내야만 합니다.

사사기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삿6:1-2).

이스라엘 백성은 가장 형편없는 상태에 처했습니다. 그들은 어두운 동굴과 습한 웅덩이에서 굶주리고 겁에 질려 무력하게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일은 기드온으로부터 시작하여 전체 집단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어두운 동굴에 숨어있는 것에 염증이 나고 지쳤던 것입니다!

기드온이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얼마나 오래 이것을 견뎌야 하는가? 그들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우리 땅을 휩쓸고 있다. 아무도 일어나 무언가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우리 조상들을 위해 움직이셨던 하나님이 계시다고 들었다. 한데 지금 우리를 봐라- 우리는 헐벗었고 아무도 돕는 이가 없다. 지속적인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기드온 안에서 무언가 불끈 솟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듣고자 기다리시던 바로 그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지나치다. 우리는 강하고 승리하시는 하나님을 섬긴다. 왜 매일 매일 계속해서 이 학대를 당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당신이 온전히 역겨워할 때 까지 - 병들고 지쳐있는 것에 당신이 염증을 낼 때 까지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은 기드온이 했듯이 해야만 합니다. 주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우리는 이스라엘이 섬겼던 바로 그 하나님을 섬깁니다. 만약 그분이 우상 숭배에 빠져있던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면 진실함 가운데 부르짖는 당신의 음성을 들으실 것입니다.

2010년 9월 20일 월요일

불신의 기도

믿음의 기도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나는 이 기도에 상응하여 거울에 비친 형상, 즉 육에 기초한 기도가 있다고 믿습니다. 나는 이것을 불신의 기도라고 부릅니다.

당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주님이 “그만 기도해라 - 무릎을 펴고 일어나라”라고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분의 영이 당신에게 “그만 울고 눈을 닦아라. 왜 내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있느냐?”라고 명령하신 적이 있습니까?

주님은 바로 이 말들을 모세에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출14:15). 이 구절에 대한 히브리어 직역은 “너는 왜 내게 고함을 지르느냐? 내 귀에 들리는 이 시끄러운 간구는 다 무엇이냐?”입니다.

하나님은 왜 모세에게 이 말을 하셨을까요? 여기 한 경건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인생의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에게 쫓기고 있었고 탈출구가 없었습니다. 대부분 크리스천들도 모세처럼 반응했을 것입니다. 그는 호젓한 언덕으로 올라가 홀로 주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그의 마음을 쏟아 부었습니다.

모세가 부르짖는 것을 하나님이 들었을 때, 그분은 그에게 “그만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대해서는 성경에 명백한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하나님은 아마, “모세야, 너는 내 앞에서 괴로워할 권리가 없다. 너의 부르짖음은 나의 신실함에 대한 모욕이다. 나는 이미 구원에 대해 나의 진지한 약속을 너에게 주었다. 그리고 어떻게 행해야 할지 상세히 가르쳐주었다. 이제 울음을 그쳐라,”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위기를 직면할 때 우리는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기도이다,”라고 스스로를 확신시키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행동하라고, 믿음으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때가 옵니다. 그런 때에 그분은 우리가 광야로 후퇴하여 기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불순종일 것이고 어떤 기도를 드려도 그것은 불신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불신의 기도는 하나님의 인자하심만을 고려합니다. 그분의 거룩한 심판의 준엄함을 무시합니다. 바울이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롬11:22). 사도는 여기서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한숨에 말합니다. 두 개를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사야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는 너희 손이 피에.....더러워졌으며”(사59:1-3).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사이에 달라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이사야가 지적하였듯이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거룩하고 공정하시기 때문에 여전히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분이 이스라엘에게 “너희 죄로 인해 너희 말을 들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시편 기자 다윗의 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도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시 66:17-20).

시편 기자의 말은 “나는 내 마음에 죄악을 보았고 그와 함께 거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나는 죄를 씻기 위해 주님께 나아갔다. 그러자 그분은 나의 기도를 들으셨다. 하지만 만약 내가 나의 죄를 붙들고 있었다면 하나님은 내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셨을 것이다.”

2010년 9월 17일 금요일

교제의 다른 면

주님의 영광가운데 동행한다는 것은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서로가 사랑을 주고받는 상호적인 애정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잠23:26)라고 말씀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전 마음과, 영혼과 뜻과 힘을 요구하는 전적이고, 분열되지 않은 사랑으로 그분께 돌려드리는 우리의 답례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확실한 말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을 벌어서 얻을 수 없다. 내가 너에게 주는 사랑은 공들여 얻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기록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0, 19).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안식과 즐거워함으로 특징지어 지듯이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다음의 두 가지 요소가 있어야만 합니다.

1. 다윗이 다음과 같이 기록했을 때 그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 안에서 안식하고 있음을 표현했습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73:25).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평안을 얻기 위해 다른 곳을 찾아보는 것을 완전히 멈춥니다. 도리어 그분 안에서 온전한 만족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인애가 생명보다 낫습니다!

2. 그러한 심령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 안에서 즐거워합니다. 주님에 대한 기쁨의 환희속에 노래하고 춤춥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때에 그의 영혼에 기쁨이 깃듭니다!

전 성경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구절 중 하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잠언은 그리스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언적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잠8:30-3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여기 언급된 인자들입니다! 지구의 기초를 놓을 때부터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과 연결된 믿는 자들의 연합체를 예견하셨습니다. 그때에도 아버지는 이 아들들 가운데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증언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즐거움이요, 그분 존재의 기쁨이었다. 이제 믿음 안에서 나에게로 돌아오는 모든 자가 또한 그분의 즐거움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보답으로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요한이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5:3).

그분의 계명들은 무엇 입니까? 예수님은 요약하여 두 가지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40). 첫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우리의 온 마음과 혼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그분 앞에서 빼돌려 남겨두어서는 안됩니다. 둘째는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개의 단순하고 무겁지 않은 계명들이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요약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만일 우리가 누구에 대해서든지 원망을 품고 있으면 하나님과 교제하거나 그분의 영광 가운데서 동행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모든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010년 9월 16일 목요일

교제의 삶

하나님의 자녀중의 많은 이들이 그분과 교제하는 삶에 대해 거의 또는 전혀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 크리스천들은 하늘 아버지에 대해 비감하고 왜곡된 개념을 갖고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자기 주인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한 달란트를 숨겨둔 종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기억합니다. 그 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내가 알았으므로”(마25:24).

마찬가지로,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반가와 사랑 안에서 기뻐하시며 노래 부르실 리가 없다. 때로 나는 비참할 만큼 그분을 실망시켜드렸고 그분의 이름에 먹칠을 하였다. 어떻게 그분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특히 지금 내가 직면하고 있는 이런 고투가운데?”

이것이 바로 왜 그토록 많은 수의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하늘 아버지께 가까이 다가가기를 원치 않는지 한 가지 큰 이유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어느 모로 그분을 실망시켰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분에 대해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소멸하는 불로 가득차고 그들을 심판하고 정죄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라는 것이 전부입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할 질문은 어떻게 우리에게 사랑의 편지를 쓰시고, 우리와 함께 있기를 갈망한다고 말씀하시고, 항상 우리를 감싸 안을 준비가 되어있으시고, 우리에 대해 오직 선한 생각만 하고 계시다고 말씀하시는 아버지께 우리가 가까이 다가기를 원치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이런 확신을 주십니다: 사탄은 네가 무용지물이라고 할 지 몰라도 나는 단언하건대 너는 나의 기쁨이란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명백히 주님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내가 내 죄의 길을 계속 간다면 그분이 나를 사랑하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그런 사고방식은 신성 모독에 근접한 것이다.”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사랑하시지만 그들의 죄는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분이 계속 죄를 짓는 자녀는 모두 책망하시지만 언제나 오래 참으면서 그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책망하신 후에 그분의 영이 죄에 대한 그분의 진노에 대한 감각을 우리에게 채워주십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은 채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말3:6). “아버지....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호11:9).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 마치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은 결코 가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은 뜨겁고 열정적이다가 미지근하거나 차갑기도 할 정도로 거의 매일 변합니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어느 날은 예수님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가 그 다음 날에는 그분을 버려두고 달아납니다.

당신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지 물어보아야만 하겠습니다. “내 하늘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신다! 그분은 내가 그분 보시기에 다정하고 사랑스럽다고 말씀하시고 나는 그분을 믿는다. 내가 무슨 일을 겪든지, 어떤 시험이나 시련을 겪게 되든지 그분이 나를 구해내실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분은 이 기간 동안 내내 내가 절대로 부서지도록 내버려두시지 않고 내 위를 감돌고 계실 것이다. 그분은 언제나 나에게 친절하고 부드러우실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교제가 시작되는 때 입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대해 확신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그분의 계시를 우리가 믿는다는 것을 그분께 보여드려야 할 것입니다. 요한은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

2010년 9월 15일 수요일

진정한 교제

많은 크리스천들이 주님과 친밀함에 대해 그리고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을 알고 그분과 교제 나누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속에 그분의 사랑, 은혜와 자비에 대한 온전한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두 가지로 구성되어있습니다:

1.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2. 보답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

당신이 얼마나 그분을 사랑하는지 주님께 아뢰며 매일 몇 시간 씩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제가 아닙니다. 당신이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인 적이 없다면 그분과 교제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당신에 대한 그분의 사랑 안에서 확신하지 않는 한 당신은 결코 주님과 친밀함을 나눌 수 없습니다.

내가 나의 주님께 나아올 때 나는 마음이 굳고, 사나우며 지나친 요구를 하는 아버지께 나아오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분은 얼굴에 분을 띄고 내 등에 막대기를 내리치고 싶어 나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분을 내가 실패하기를 기다려 “그것 봐”라고 말하기 위해 내 뒤를쫓아 다니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자신을 순결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나에게 계시하신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그분은 친절하고 마음이 부드러우시고 은혜와 자비가 충만하시며 나의 모든 염려와 짐들을 들어주고자 애쓰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분을 부를 때 결코 거부 하시지 않을 것을 나는 압니다.

그것이 내가 그분의 궁정에 찬양과 감사로 나아가는 이유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내가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나에 관련된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시 100 참조).

스바냐 선지자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놀라운 말씀을 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3:17).

이 구절은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에 대해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1.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 안에 안식하십니다.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he will rest in his love(KJV)}”의 히브리어 의미는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 그분은 잠잠하실 것이다”입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진정한 사랑을 발견했고 나는 완전히 만족한다. 아무런 불만이 없기에 다른 곳을 더 찾아 볼 필요가 없다. 이 관계에서 나는 완벽하게 충족감을 느끼며 내 사랑을 거둬들이지 않을 것이다. 내 사랑은 확정된 일이다!”
2.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지극히 기뻐하십니다. 스바냐가 증언합니다.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그의 말은, “너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지극히 커서 그분의 입술로 노래를 부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기뻐하다(rejoice)”는 “기쁨과 즐거움을 갖다”라는 의미입니다. 내적인 즐거움을 외부로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사랑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여기서 “기뻐하다”의 의미로 스바냐가 사용한 히브리어는 tripudiare 로서 “기쁨의 환희를 못이긴 사람처럼 펄쩍 뛰다”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하늘 아버지가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셔서 당신 생각만 해도 기쁨으로 펄쩍 뛰신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인간이 존재하기 전에,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셨다는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당신이 아담의 죄의 길에 빠져 그분의 원수가 되었을 때조차도 그분은 당신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2010년 9월 14일 화요일

전쟁에서 영리함

적대 세력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안에서 더욱 번성합니다. 거친 폭풍이 나무에 몰아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바람이 나무를 뿌리 채 뽑아 날려버리겠다고 위협합니다. 가지를 부러뜨리고 잎사귀를 날려 버립니다. 뿌리를 느슨하게 만들고 봉우리들이 바람에 날아갑니다. 그래서 폭풍이 지나간 후 소망이 없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나무 둥치 주위에 틈새를 벌려놓은 바로 그 폭풍이 뿌리가 더욱 깊이 박히게끔 도와주었습니다. 그 나무는 이제 영양분과 수분을 얻을 수 있는 새롭고 더 깊은 출처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죽은 가지가 깨끗이 정리되었습니다. 봉우리들이 날아가긴 했지만 다른 봉우리들이 더욱 풍성하게 자라날 것입니다. 실은 이제 나무가 더욱 튼튼해지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자라고 있습니다. 추수 때까지 기다려 보십시오. 더 많은 열매를 맺을 테니까요!

당신은 현재 폭풍가운데 있을지 모릅니다. 당신을 난폭하게 흔들며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어서 당신은 가라앉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이여, 두려워 마십시오. 이 태풍의 와중에서 당신은 영적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 안에 더욱 깊어지는 겸손, 죄에 대해 더욱 쓰라린 애통과 슬픔, 그분의 의에 대하여 더욱 심화된 굶주림을 계발하시는 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험이 풍부한 십자가 군병으로 만들고 계십니다 -전쟁의 흉터가 있는, 그러나 전쟁에서 영리하고 용감한- 때로 당신은 자신에 대해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그분은 주권적으로 행동하셔서 언제라도 당신의 고투에서 당신을 뽑아낼 수 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신 안에 그분을 향한 더 깊은 갈망을 조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3은 말합니다. “환난은 인내를........이루는(worketh, KJV) 줄 앎이로다” 이루다는 성취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고린도후서 4:17에서 읽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worketh, KJV) 함이니” 이 구절에서 이루다는 로마서 5:3의 이루다와 같은 것입니다.

2010년 9월 13일 월요일

영적 성장에 대해 모든 크리스천이 알아야 하는 것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살후1:3).

데살로니가 크리스천들에게 바울은 얼마나 대단한 칭찬을 하는지요! 그가 말하는 요점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나 서로를 사랑하는 것에서나 너희가 얼마나 성장하였는지 놀랍다. 내가 어디를 가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너희의 영적 성장에 대해 자랑한다. 너희로 인해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는지!”

이 짧은 구절에서 바울은 연합하여 사랑가운데 성장하는 신자들의 몸에 대해 놀라운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 자라고 (groweth exceedingly, KJV)"에서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는 ”다른 것들 위로, 넘어, 그 위로 자라다“라는 의미입니다. 개인적으로 또한 조직체로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믿음과 사랑은 다른 모든 교회를 능가했습니다.

명백하게, 데살로니가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까지 단지 그들의 믿음을 붙들고 있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배우고, 움직이고, 성장하고 있었고 그들의 삶이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그들은 아시아에서 모든 교회의 화제 거리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들었던 설교가 그들이 그리스도와 더욱더 깊이 동행하도록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의 육적인 야망을 녹이고 그리스도답지 않은 습관들을 뉘우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안의 성령께서 모든 문화적, 인종적인 장벽을 허물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교육을 받았든지, 못 받았든지, 누구든지 감싸 안는 법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서로 서로를 아껴주며 서로를 극진히 배려하였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마시고, 양식을 먹고 있다면 사는 동안 계속해서 영적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나는 우리 회중 모두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 알고 있듯이 “더욱 자라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믿습니다. 왜 그럴까요?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기름부음 받은 설교는 언제나 성장을 이룹니다. 또한 사도 베드로도 말씀의 순전한 젖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이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성령의 사역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는 성령께서 우리를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시키시며 항상 일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육을 죽이고 우리 속사람 안에서 순결의 열매를 맺게 하시며 지속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속에서 분노, 원한, 적의 그리고 모든 악한 것을 제거하기위해 일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서로를 향한 친절, 부드러움, 용서를 형성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언행이 우리 주님께 합당한 것이어야만 한다고 가르치시면서 그분은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성장 시켜 가십니다!

바울은 한층 더 우리를 촉구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고전11:28). 여기서 살피다로 쓰인 헬라어는 “면밀히 조사하다, 시험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고 있는지 네 자신을 시험해 보라.” 우리는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변하고 있는가? 더욱 사랑스럽고 마음이 온유해지고 있는가? 내 가족과 친구들을 경건하게 존중하며 대하는가? 나의 대화는 더욱 의로워지고 있는가?”

2010년 9월 10일 금요일

때로 우리는 성장하면서도 그 사실을 모릅니다

어떤 신자들은 자신들의 영적 성장에 대해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삶에서 확실한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성령께서 그들을 위해 원수를 물리치셨는지 당신에게 간증하고 당신은 그들과 함께 그들의 승리를 기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유형의 크리스천들은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사는 동안 영적인 진전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전심으로 주님을 구합니다. 그들 안에 영적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 안에 어떤 성장이 있는지 인식하지 못합니다. 나는 이런 신자 유형의 한 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의 가운데 행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내게 진전이 있는지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사실은 그리스도답지 않은 말이나 행동을 할 때 마다 종종 내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나는 오랫동안 크리스천이었다. 언제 쯤 배우게 될까?”하고 궁금해집니다.

데살로니가 크리스천들이 자신들에 대한 바울의 빛나는 평가를 들었을 때 매우 놀랐으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살후1:3 참조). 그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희가 지극히 잘 성장하고 있다고요? 바울사도가 농담하시는군요.”

하지만 바울은 영적 성장이 은밀하고 감추어진 것임을 알았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꽃이나 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게 자라는 것에 비유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호 14:5-6).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백합화에 가거라! 그들이 자라는 것을 보려고 애써 보아라. 하루해가 질 때 까지 아무것도 못 볼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알아두어라. 나는 내가 내리는 이슬로 매일아침 백합화에 물을 주고 있고 그것은 자라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영적 성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눈으로 감지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을 때, 끊지 못한 죄로 인해 전혀 고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간증 합니다. “내가 예수께 나오자마자 주님이 내게서 그 유혹을 제거해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자유롭습니다.” 이전의 마약 중독자들로서 이런 체험을 한 사람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크리스천들에게 있어 이야기는 전혀 다릅니다. 그들이 개종하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들이 미워하고 다시는 보기 원치 않았던 옛 부패성이 그들 안에 다시 풀려나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싸워 봐도 하나 남은 정욕이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낙담하게 됩니다. 그들의 영혼은 “언제까지 입니까, 주님? 언제 이 쇠사슬이 끊어집니까?”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마귀가 그들에게 와서 “너희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이런 상태 하에서 너는 절대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친구여, 용기를 내십시오. 내게 당신을 위한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당신의 고투 중에 당신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당신의 고투로 인해 훌쩍 훌쩍 성장하는지도 모릅니다.

안심하십시오. 당신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면 당신은 폭풍을 뚫고 나올 때 더욱 강해져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원수와 전투 중일 때 당신은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능력을 실습하고 동원하는 것입니다. 비록 당신이 나약하게 느껴진다 해도 그 은혜와 능력은 당신을 더 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첫째로, 당신의 기도가 더욱 급박해지고, 둘째, 당신의 모든 교만이 벗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폭풍은 실상 당신 삶의 모든 분야에서 당신이 “영적 경비”를 서게끔 만들어 줍니다.

2010년 9월 9일 목요일

그분의 사랑을 알고, 믿고, 계속 신뢰 하십시오

누구든지 시련이나 시험받지 않고 성령 안에서 순행할 때는 기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항상, 특히 우리가 시험 당할 때,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지 아주 간단하게 말해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 간단히 말해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한다는 말은 “기대하는 상태로 머물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매일 새롭게 되기를 우리가 기대하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항상 우리를 사랑하셨고 항상 우리를 사랑하실 것을 아는 지식 가운데 매일 매일 살아야 할 것입니다.

현실에서 대부분의 우리는 자신의 감정의 오르내림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에 들락날락합니다. 우리가 잘했을 때만 그분의 사랑 안에 안전하게 느낍니다. 그러나 시험에 들었을 때나 시련을 겪을 때 또는 그분을 실망시켰을 때는 그분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때 특히 그분의 사랑을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이런 성경 말씀들 가운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떤 시련에 직면했든지, 절대로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네가 능동적으로 나의 사랑을 신뢰하면 그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대로 네가 사는 것이다.”

예레미야 31장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름답게 묘사해 줍니다. 이스라엘은 타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비대해지고 번창했지만 온갖 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의 정욕이 시큼해져버렸습니다. 자신들의 관능적인 식욕을 채우는데 쾌락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곧 그들은 부르짖었습니다. “주님, 우리는 길을 잃었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돌이켜 주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의 회개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분의 사랑의 마음이 그들에게로 향하셨습니다. 그분은 교정하시는 채찍으로 그 백성을 징벌하셨고 이스라엘은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렘31:18-19).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20절).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3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당신이 알아야만 할 것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징벌하고 너에게 가혹한 진리의 말을 해야만 했다. 그때에도 너는 나에게 죄를 범하고 그리함으로써 내가 너에게 내려준 은혜와 자비를 경멸하였다. 너는 내 사랑에 등을 돌리고 나를 거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창자가 너에 대한 동정심으로 들끓었다. 나는 너의 고투 중에도 너를 기억하였고 너를 반드시 불쌍히 여길 것이다. 내가 기꺼이 너를 용서하고 회복시킬 것이다.”

2010년 9월 8일 수요일

영광 중에 동행하기

다가오는 시련의 시기를 지탱해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당신에게 높고 고상한 개념처럼 들려서 신학자들에게 맡겨두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주제는 모든 진실한 신자에게 아주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가치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을 붙듦으로써 우리는 승리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문을 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주님의 성품과 존재에 관한 계시입니다. 당신은 구약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를 일견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 이전에 주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는 말씀 외에는 자신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모세를 보냈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에 대해 더 알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분께 간청했습니다. “주님, 당신의 영광을 나에게 보여주십시오.”

하나님은 응답하셔서 모세를 데리고 바위틈에 세워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씀하기를 그분이 그분의 모든 영광 중에 자신을 모세에게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출 34:6-7 참조).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일에 있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은 인류에 대한 그분의 지극한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그분이 모세에게 나타내신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구절이 우리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가 이해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종종 그분의 위엄, 광채, 능력과 주권 또는 그분의 백성가운데 나타나심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의 결과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분이 우리가 자신에 대해 알기를 원하는 그 영광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그분의 자비를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그분께로 우리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영원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계시는 그것을 받는, 그리고 또 이해하기위해 기도하는 자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모세는 주님을 율법과 진노의 하나님으로 보았습니다. 주님의 임재 안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분께 탄원하고 부르짖고 간구하면서 그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과 대면한 관계의 기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처음으로 보게 되자 모세는 더 이상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예배로 나아갔습니다.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출 34:8). 그는 하나님이 단지 그를 두려워 떨게 만들었던 천둥, 번개, 귀를 찌르는 나팔소리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정반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셨고 그분의 성품은 인애와 자비였습니다!

성경이 여기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놀라운 진리를 아시겠습니까? 진정한 예배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보고 압도당한 마음에서 우러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분 자신, 그분의 선하심, 자비, 용서하시려고 준비하고 계심에 대한 계시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찬양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예배는 바로 이 그분에 대한 이러한 놀라운 진리에 기초를 두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계시를 받게 되면 우리의 예배는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분의 영광을 보는 것은 우리 삶의 방식을 변화시킵니다. 그분을 더욱 닮아가도록 “영광에서 영광으로” 우리를 변화 시키며 우리의 얼굴과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분의 사랑과 자비에 관한 새로운 계시 하나 하나가 초자연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2010년 9월 7일 화요일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요한에 의하면 하나님의 모든 사랑은 예수님 안에 거합니다. 그는 기록합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우리는 어떻게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얻었습니다.

헌데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우리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칩니까? 우리의 본보기로 그리스도를 쳐다보아야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에게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사랑이 예수님께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일3:16). 예수님 안에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열매가 여기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으로 내어놓으셨습니다. 이 구절의 후반절은 우리 자신의 삶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에 대해 말해줍니다.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또한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도록 인도합니다.

당신의 생명을 당신의 형제자매를 위해 진심으로 내어놓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요한은 외국 땅에서 순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기를 기증하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를 대신하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한분만이 그 희생을 하셨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형제에게 생명과 소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오직 한 유형의 크리스천은 죽은 자입니다. 그러한 종은 이 세상에 대해, 즉, 자신 전체, 자아 그리고 야망에 대해 죽었습니다.

이 “죽은” 크리스천은 성령께서 그의 영혼의 영적 재고를 인수하시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안의 부패와 불경건함을 꿰뚫어 봅니다. 그래서 자원하여 “주님, 저를 소멸해 주십시오. 전부 가져가십시오,”라고 울부짖으며 하나님의 제단으로 나아갑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되어야만 그의 형제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압니다.

2010년 9월 6일 월요일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

최근 나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 구절로 인도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20-21). 이 구절들을 읽으면서 나는 성령이 나에게 속삭이는 것을 들었습니다. “데이빗, 너는 아직 내 사랑의 충만과 기쁨 속에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다. 네 신학은 올바른 것이지만 너는 아직도 내 사랑가운데 머무르는 환희의 절정과 안식을 체험하지 못했다. 이제까지 너는 발목까지만 그 안에 담그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그 안에서 헤엄칠 만한 바다와 같은 내 사랑이 너를 위하여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진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때때로 나는 주님이 어떻게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내가 그분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쪽에서 나에 대한 그분의 사랑에 대한 지식과 확신 안에 머무르는데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는 부분적으로 우리가 거듭날 때 옵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그분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요한복음 3장16절을 인용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진리를 파악할 때 그것은 경이로운 순간입니다. 당신은 갑자기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길을 잃고, 무너져 내리고, 이방인이었을 때 나를 사랑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독생자를 나를 위해 희생하심으로 나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을 배운 크리스천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에 대해서는 무언가 알고 있지만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는 거의 구하지 않습니다. 사실인즉,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에게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성경 구절을 찾아내라고 하면 단지 몇 개만 지목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승리하는 삶의 비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냉랭해지고 게을러집니다. 사탄의 공격에 맞서는 그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성령의 계시를 통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확신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모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기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요17:24). 얼마나 놀라운 생각입니까! 그리스도는 창세전부터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이 주목할 만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21,23). 또한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26)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당신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내 지체로 이끌어 들이는 사람들을 사랑하실 것을 나는 압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함축된 의미는 아버지께서 영원이전에 예수님을 사랑하셨을 때 우리도 또한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영원한 마음속에서 인간이 아직 하나의 생각에 불과했을 때, 주님은 이미 우리의 신체조직을 세고 계셨고 우리의 구속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고 계셨을까요? 그분이 존재하신 후부터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성품이십니다. 그분은 죄인인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당신이 태중에 있을 때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에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당신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언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기를 멈추실까요? 자신의 독생자 사랑하기를 멈추실 때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멈추실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는 말씀합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2010년 9월 3일 금요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

오래전 하나님이 내 마음 가운데 롱아일랜드에 소년의 집을 시작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나는 진정으로 이 일 배후에 주님이 계심을 느꼈습니다. 헌데 그 집을 운영하는데 있어 주정부가 가혹하리만큼 엄격한 규정을 적용했기 때문에 단지 18개월 만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집을 운영하던 짦은 기간 동안 우리는 네 명의 소년을 받아들였습니다. 문을 닫고 난 후 그들과의 소식이 끊겼습니다. 나는 항상 이 시도가 이제까지 가장 실패작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30여 년간 나는 하나님이 왜 이 계획을 진행 시키셨는지 궁금했었습니다.

최근, 클리포드라는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데이빗 형제여, 나는 롱아일랜드에 있던 집으로 보내졌던 네 명의 소년 중 한사람입니다. 당신의 집 관리인들은 사랑과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교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우리를 데리고 장막 부흥회를 열고 있는 교회로 갔습니다. 나는 너무도 마음에 원한이 쌓였고 절망스러웠습니다. 그곳에서, 장막아래서, 성령이 내 마음을 끌어당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설교자가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 하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모든 세월동안의 고통, 혼란, 절망이 표면으로 떠올랐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35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나를 전도자로 부르시고 전임 사역자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동안 내내 감사하는 마음이 내 안에서 빚어지고 있었습니다. 돌보아 주셔서 감사하다고 당신께 전하고 싶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압니다.”

이 사람의 편지는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행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헛된 것이 없다는 것을 나에게 증명해 주었습니다. 그 소년의 집은 실패작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길 잃고 혼란에 빠진 유태인 소년 하나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2010년 9월 2일 목요일

사탄은 미묘한 계략을 사용합니다

“앗수르왕이....랍사게로 하여금 대군을 거느리고....예루살렘으로 가서 히스기야 왕을 치게 하매”(왕하 18:17). 앗수르사람들은 오늘날의 “번영 지침서”를 상징합니다. 마귀는 당신의 성벽을 둘러싸고 자신의 군대를 행진하게 할 것입니다. 그들은 능력 있고, 아름답고, 손대는 일마다 성공하는 듯 보입니다. 그들을 볼 때 당신은 마치 수감된 자처럼 벽에 가로막힌 듯 느낄 것입니다!

이 죄인의 첫 번째 계교는 주님을 완전히 신뢰하는 신자의 결단에 의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술취한 외교사절”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랍사게는 왕의 대사였습니다. 그는 거룩한 자를 조소하며 조롱했습니다(왕하 18:19-20 참조). 조소의 내용은 “하나님은 이 환난에서 너를 구해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침몰하고 있다! 너는 정말 난관에 봉착했고 네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탄은 한 번 더 비틀어 놓습니다. 이 모든 문제들 배후에 있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당신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앗수르의 사자는 “여호와께서 전에 내게 이르시기를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왕하 18:25)고 주장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복수하신다, 당신에게 진노하셨다고 당신을 설득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가장 교활한 거짓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당신을 버리고 환난과 애통에 처하도록 넘겨버렸다고 믿도록 만듭니다. 그는 당신의 모든 문제가 과거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의 결과라고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믿지 마십시오! 사탄은 당신을 파멸시키려는 자입니다.

우리 주님은 구원자시오, 요새이십니다. 이사야는 그분이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사61:3)고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성도여, 당신은 침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주님을 신뢰하기로 마음을 정하였기 때문에 단지 대적의 거짓말의 집중 사격을 받으며 공격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파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2010년 9월 1일 수요일

싸우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31-33).

에녹은 언젠가 예언했습니다.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유14). 성경은 우리가 주님에 대해 왕들과 제사장들이며 사탄의 군대와 싸우기 위해 나아가는 이 수만의 무리를 대표한단고 말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극심하게 미워하기 때문에 우리를 대적하여 전쟁을 벌입니다(계12:17 참조).

우리는 다가오는 것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불법의 홍수가 하나님의 백성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영적 전투를 치르며 우리 생애를 살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들기로 결단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 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4:4).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의 모든 권세를 이기고 승리할 것을 보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해 싸우는 하늘의 전 군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많은 성령의 투쟁력을 주셔서 우리 각 개인이 세상과 지옥의 무리를 향하여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 37-39)고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갈망하는 자들의 전투 함성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남녀 불문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제물이 되겠다고 결단하는 순간 지옥의 악한 계략의 목표물이 될 것입니다. 거룩한 믿음 안에서 행하고자 마음을 정한 사람들을 향해 대적하기 위해 지옥의 무리들이 풀어 놓아질 것입니다.

사탄은 자신의 기만 프로그램에 당신이 실제로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괴롭히고 방해물을 설치할 것입니다. 당신은 전쟁을 그만두고, 포기하고, 중도 하차하여 둔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방황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마귀에 계략에 대항하여 믿음 가운데 일어나 싸움을 계속 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사탄은 진정으로 주님을 의뢰하는 사람을 저지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