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30일 화요일

오직 가족을 위하여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창세기 43:30).

이것이, 비록 죄인일지라도 그를 향한, 우리 구세주의 마음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그의 앞에서 먹고 마시며 그의 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렸습니다(창세기 43:32). 이 말의 중요성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들은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채, 진정으로 그를 알지 못한 채, 사랑과 은혜의 계시를 받지 못한 채 요셉 앞에서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계시를 아직 받지 못한 채 주님의 존전에서 먹고 마시며 찬양하는 사람들 일 수 있습니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감정이 여전히 그들 마음가운데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노래하고 예배하며 찬양하고 집에 돌아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지 않으셨다. 내 기도는 응답받지 못한다. 하나님은 다른 크리스천들을 돌보시는 것처럼 나에게는 진정한 관심이 없으시다,”라는 동일한 거짓말로 되돌아가는 크리스천들의 경우입니다.

사랑에 대한 온전한 계시를 받기 전에 요셉의 형제들이 거쳐야할 마지막 한 단계가 남아있었습니다. 그러한 계시는 마음이 상하고 회개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7). 형제들은 아직 심령이 상하지 않았습니다(창세기 43:34).

이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했으나 요셉이 그들에게 그의 사랑을 나타내기 전에 그들의 비통함과 인간적인 자원의 막바지에 다다라 완전히 깨어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들을 마지막으로 시험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의 청지기에게 막내 동생 베냐민의 자루에 자기가 쓰는 은잔을 집어넣도록 명했습니다. 그 형제들이 성읍을 벗어나기도 전에 요셉의 사람들이 그들을 따라잡고 잔을 훔쳤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죄라고 확신했기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창세기 44:9).

그들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창세기 44:16). 그들은 서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자존심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낮아지고, 상하여 마침내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부르짖었습니다. “포기합니다! 항복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계시되었습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창세기 45:1).

세상은 이 같은 사랑의 계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제 무조건적인 사랑과 관용이라는 가족의 유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창세기 45:2)고 말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들을 수 있지만 오직 가족만이 그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가족만이 그러한 사랑과 긍휼 안에서 다루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겸손하고 심령이 상한 자안에 거하십니다. 그분은 그분의 가족가운데서 기뻐하십니다. 지난 모든 세월을 통틀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조차도. 당신을 향한 그분의 사랑 안에서 안식하십시오.

2010년 11월 29일 월요일

사랑의 계시

요셉의 형들은 하나님이 위기를 이용하여 그들에게 드러내 보여주시기 전까지는 그들이 얼마나 사랑을 받고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창세기 41:56, 42:1-3).

그들이 요셉을 노예로 파는 죄를 범한 지 20년이 흘렀고 이제 요셉은 애굽의 총리였습니다. 그는 기근에 대비하여 7년 동안 곡식을 저장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곡식을 사기위해 애굽으로 간다고 생각했으나 하나님은 더 크고 나은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사랑의 계시를 받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비, 용서, 회복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배우게 될 것이었습니다. 심판받아야 마땅했으나 그들은 순수한 은혜를 받게 될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그리스도의 모형임을 기억하면서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그분을 실망시킨 모든 사람에 대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입니다.

20년 동안의 죄와 속임으로 요셉의 형들은 요셉과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이 때쯤 그들은 요셉이 죽었다고 가정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의 궁정에 도착하여 요셉 앞에 왔을 때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요셉은 그들을 즉시 알아보았습니다(창세기 42:8). 형들은 요셉이 꿈꾸었던 것처럼 그에게 절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진노하고 복수심에 불탔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처럼 사랑했던 형들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연민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는 형들에게 쌀쌀하게 대하고 그들을 첩자로 몰았을까요(창세기 42:7)? 한 때 나는 요셉이 조금 복수한다고 생각했었으나 그의 동기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 교만한 사람들은 아직 은혜와 긍휼의 계시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먼저 그들은 자신들의 죄의 대단히 추악한 모습을 보고 그들의 죄와 수치를 직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오로지 긍휼만이 그들을 도울 수 있도록 자신들의 종착점에 도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메시지입니다 - 자신들의 종착점에 도달한 모든 사람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

하나님은 이 진리를 요셉에게 보여주셨고 요셉은 형들을 사흘 동안 옥에 가두었습니다.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죄에 대한 진실을 대면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의 악한 본성을 보여주기 위해 법을 집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효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창세기 42:21).

우리 자신의 자원들이 모두 고갈되고 그분의 자비를 체험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 은혜는 모든 수치와 죄의식으로부터 구원합니다.

2010년 11월 26일 금요일

심령으로부터의 부르짖음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심령으로부터 나오는 부르짖음 -여느 부르짖음이 아니라 구원해 달라는 겸손한 부르짖음- 에 응답하여 나타난다고 믿습니다. 성경은 이 심령으로부터의 부르짖음에 대해 많이 언급합니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시편 18:6).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시편 106:43-44).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언제나 하늘로부터 오는 치유의 말씀으로 응답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겸손히 손을 내밀면 어느 누구도 지나치게 사악하거나 지나치게 소망이 없지 않습니다. 므낫세 왕이 그 본보기입니다. 성경은 그가 이스라엘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우며.....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여 섬기며.....또 자기의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일으켰으며”(열왕기하 21:2-6).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모든 나라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여호와께서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이르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역대하 33:9-10).

이토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악과 흑암에 사로잡힌 자가 소망이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만일 그가 자신을 낮추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고백하고 믿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므낫세는 결국 쇠사슬에 매여 외국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죄의 값에 대해 얼마나 생생하게 보여주는지요! 그러나 그의 환난가운데 그는 부르짖었고 하나님이 들으셨고, 용서하셨고 그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역대하 33:12-13).

“이방 신들과 여호와의 전의 우상을 제거하며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 산에와 예루살렘에 쌓은 모든 제단들을 다 성 밖에 던지고”(15절).

소망, 용서, 자비, 사랑과 회복의 말씀은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고 회개하며 온전해져서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고침 받지 못하고 회복되지 못할 만큼 형편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010년 11월 25일 목요일

일어나 걸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요한복음 5:8). 베데스다 못에 있던 앉은뱅이는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며 온 땅에 다니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흥분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 예수님에 대해 다른 이야기들도 들었을지 모르지만 그분을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질병에 얽어 매여 있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불행과 슬픔에 싸인 그에게 오셨고 자비를 베푸실 참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불쌍한 사람의 질병에 대해 마음이 움직이셨고 그에게 다만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에 따라 행동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이 곳을 떠나 걸어가라!”

후에, 이 사람을 고치시고 나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이 사람을 만나 말씀하실 것이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신뢰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는 의지 할 곳 없이 절망 가운데 연못가에 누워서 그가 지냈던 고통스러웠던 세월 중 가장 중대한 결정에 직면했습니다. 부활 소망에 대한 말씀이 그에게 다가왔고 그는 도전을 받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일어나 온전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연민에 빠져 그곳에 누워 홀로 죽을 것인가!

그 사람은 불신하여 움직이기를 거부하고 “안 될 거야. 왜 하나님이 이 많은 사람 가운데 나를 뽑아 고쳐주시겠나? 나는 이런 상태로 죽을 운명이야,”라고 생각하며 연못 옆에 계속 누워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뜻을 거슬러 그를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르짖음이 상달되었고 구원의 때가 이르렀음을 믿어야만 했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요한복음 5:19-20).

요약하면, 예수님은 의심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그가 고침받기를 원하시므로 내가 그를 고쳤다. 나는 오직 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한다.” 이 사람을 완벽하게 온전하도록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바라심이었습니다.

당신이 기운이 빠지고 연약할 때는 하나님이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숱하게 허송세월 했을 때, 죄로 인해 당신의 몸과 영혼이 불구가 되었을 때, 당신이 형편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그리고 하나님이 아직도 나에게 관심이 있으실 이유가 있을까 의문이 들 때.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한 발작 앞으로 나와 “주님, 당신의 말씀만 의지하여 내가 일어나 걷겠습니다 - 당신과 함께!”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 죄와 의에 대한 모든 교리를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에 대해 심오하고 깊은 의미로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때가 되면 알게 됩니다. 당신이 순종의 첫걸음을 떼어 일어나 주님께로 돌이키면 모든 것이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한복음 7:17).

2010년 11월 23일 화요일

진정한 믿음의 기초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가 소진할 때는 우리가 계속 반복해서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부인할 때 외에는 없습니다.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오늘날 스스로 만들어낸 광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들은 기쁨도 없고 승리도 없습니다. 그들을 볼 때 당신은 하나님이 오래 전에 그들을 버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단지 그들을 스스로의 불평과 원망에 넘기셨을 뿐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여호수아와 갈렙은 언약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 까지 하나님의 전에서 푸른 나무들로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능력과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신의 문제들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당신도 또한 주님께 소중합니다. 당신도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의 전에서 푸른 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언약 말씀에 서 있으십시오.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시편 18:19).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기초입니다!

2010년 11월 22일 월요일

당신은 하나님의 보배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음란한 여인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잠언 6:26). 이 구절에서 말하는 음란한 여인은 사탄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께 소중한 사람들을 사냥합니다.

민수기 13장과 14장에서 성경은 이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해 줍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의 땅을 탐지하기 위해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40일 후에 이 정탐꾼들이 돌아와 그중의 열 명이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속에 세 가지 거짓말을 심어놓았습니다. (1) “그 땅에는 백성이 너무도 많고 그들은 우리 보다 너무 강하다.” (2) “성벽은 너무 높고 견고한 진은 난공불락이다.” (3) “그 땅에는 거인들이 있고 우리는 그들의 상대가 못된다. 우리는 의지할 곳 없다! 끝장이다!”

이 거짓말들은 단숨에 이스라엘의 마음을 빼앗았습니다. 성경은 이 백성이 밤새도록 절망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민수기 14:1). 2백만이 넘는 백성이 울며 통곡하며 슬퍼했습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연약함과 무능력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들의 불신의 통곡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귀는 오늘도 동일한 세 가지 거짓말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던집니다. “네 시련은 너무 여러 번 닥친다. 네 유혹은 너무 압도적이다. 너는 너무 약해서 다가오는 세력을 거역할 수 없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은 또한 오늘날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a special treasure] 되겠고”(출애굽기 19:5)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a peculiar, precious, special people] 삼으셨느니라”(신명기 14:2).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이 소중하다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주님께 이스라엘이 특별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소망에 차 있을 수 있던 열쇠입니다. 여호수아가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민수기 14:8). 다시 말하면,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므로 그 땅은 이미 우리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윗이 받았던 계시도 이와 동일합니다. “그가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인도해 내시고 나를 구원하셨도다.” 이처럼 오늘날 승리하는 모든 크리스천은 사랑이 풍성하신 그들의 천부에 대해 이와 같은 계시를 받습니다. “우리는 패할 수 없다! 우리의 모든 대적은 우리의 먹이다. 우리가 주님께 소중하기 때문이다.”

2010년 11월 19일 금요일

당신의 천부께 당신은 특별합니다!

나는 우리 아이 중 하나가 십대였을 때 나에게 와서 고백한 말을 듣고 느꼈던 고통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아빠, 나는 한 번도 아빠를 기쁘게 해드린 적이 없다고 느껴요. 아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것 같아요. 이제껏 아빠를 실망만 시켜 드린 것 같아요. 아빠는 내게 정말로 실망하셨을 거예요.”

이보다 더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 말은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했기에 우리 아이가 이렇게 느꼈는지 스스로 자문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마음 속 깊이 고통을 느끼며 나는 눈물이 글썽한 아이를 껴안았습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나는 이 아이에게 내 사랑을 보여주었는데. 계속 반복해서 말해 주었고 행동으로 보여주었는데. 다른 아이들은 모두 나의 사랑 속에서 안전하게 느끼는데. 이 아이는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전혀 쓸데없는 불행과 죄책감을 지니고 살았단 말인가?”

나는 사랑하는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게 항상 특별하단다. 너는 내 눈동자와 같거든. 네 생각을 하면 나의 전체가 밝아진단다. 물론 때로 네가 어리석은 일을 하기도 했지만 네 형제들도 그랬단다. 너는 용서받았지. 너는 정말로 미안해했고 나는 결코 한 번도 너를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단다. 너는 내게 오직 기쁨이란다. 너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지. 너는 늘 내 마음을 기쁘게 한단다.”

많은 크리스천들과 그들의 천부의 관계가 바로 이렇습니다. 마귀가 이 믿는 자들이 자신들이 단지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그분을 결코 기쁘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도리어 그분의 진노가 항상 자신들을 따라다니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얼마나 비참하게 인생을 사는 길인지요. 자신의 자녀가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실 때 하나님은 얼마나 고통스러우실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이 태어난 날부터, 당신은 당신의 천부께 특별합니다.

2010년 11월 18일 목요일

당신은 하나님께 귀한 존재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에베소서 2:8-9).

당신이 500년을 산다고 해도 당신의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큼 충분치 않을 것입니다. 자신을 정결케 하려고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당신의 육은 하나님께 용납되지 않습니다. 육은 개선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육적인 것은 십자가에서 처리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그분이 당신을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해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오, 하나님이 신실한 목사님들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며 그분 말씀에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장로님들이 그분께 소중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고난과 시험, 시련을 견뎌내고 승리했으니까요. 하지만 나처럼 문제투성이 실패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소중할 수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기복이 심한 내 삶 때문에 그분은 내게 넌더리가 나실 게 분명합니다. 나는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분이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지만 틀림없이 내게 실망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경이로운 예언을 꼭 이해해 보십시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이사야 43:1).
이 말씀은 오로지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과 불신으로 인해 강도당하고, 약탈당하고 덫에 걸리고 감옥에 던져진 백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시점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너희의 모든 실패 후에, 내가 이 소망의 메시지를 들고 너희에게 왔다. 왜냐하면 너희가 내 것이기 때문이다.

2010년 11월 17일 수요일

하나님은 당신을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세 명의 히브리 소년이 불타는 용광로에 던져졌을 때 네 번째 사람이 그들과 함께 그곳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들은 불에 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옷이나 머리카락에서 연기 냄새도 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구원이 바로 당신이 영적인 계곡을 지나가고 있을 때 하나님이 당신에게 가져다주기 원하시는 구원인 것입니다.

당신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동기는 무엇일까요? 당신이 하나님께 유화적인 제스처를 썼기 때문일까요? 기도시간을 늘렸습니까? 성경 읽는 데 더 시간을 보냈습니까? 이 모두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참된 계시를 받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이사야 43:4-5).

이사야 43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제 불과 홍수를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염려하지 말아라. 너희가 이 모든 것을 통과할 동안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 너를 구원해 낼 것이다. 오직 너희가 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의 이름을 안다. 너희는 내 마음의 기쁨이다.”

2010년 11월 16일 화요일

하나님의 순전한 긍휼

이사야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크나큰 기쁨에 대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예언했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이사야 43:1-2).

이사야는 문자 그대로의 홍수나 불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겪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포로로 잡혀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홍수는 시련을, 불꽃은 유혹을, 물은 시험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을 파멸시키고 압도당하도록 하려는 사탄의 시도들입니다.

이사야의 말은 이스라엘을 위한 순전한 긍휼의 메시지였습니다. 이 백성은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과 미련 때문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심령이 상한 예언자를 보내주셔서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에게 너희들이 그분께 속하였다고 말하기 원하신다.”

지금 당신은 소용돌이치는 물 가운데 있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을 소멸시키려고 위협하는 시련과 유혹에 압도당하는 듯 느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예에서도 보듯이 주님은 언제나 물결을 잠잠케 해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항상 홍수를 막아주시지는 않으며 항상 불을 꺼주지는 않으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약속하십니다. “나는 네가 끝까지 통과할 때까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이 시련과 상황이 너를 파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너를 소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해 나아가라. 내가 네 옆에 함께 있고 너는 끝까지 통과해 저편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

2010년 11월 15일 월요일

모든 구원의 열쇠

성령께서 다윗에게 모든 구원의 열쇠에 대한 계시를 주셨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원수에게서, 나의 모든 슬픔과 그리고 지옥의 권세로부터 구원해주신 이유는 내가 그분께 소중하기 때문이로다. 나의 하나님은 나를 기뻐하시는 도다!”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시편 18:19). 당신은 구원이 필요합니까? 정욕과 유혹과 시련으로부터? 정신적, 영적 또는 육체적 문제로부터? 당신이 승리할 수 있는 열쇠는 위 구절에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기뻐하십니다! 그분께 당신은 소중합니다!

아가서에서 주님은 자신의 신부에 대해 말씀합니다.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아가서 7:6). 이 구절에 쓰인 세 개의 히브리 단어는 유사한 뜻을 갖고 있습니다: 아름다운(fair)-귀한(precious); 화창한(pleasant)-즐거움(pleasure); 즐거움(delight). 이 단어들은 예수님이 그분의 신부를 바라보며 떠오르는 생각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분은 신부를 바라보며 말씀합니다. “너는 참으로 아름답고, 다정하며 즐거움을 주는구나. 사랑아 너는 내게 소중하구나.”

이번에는 신부가 자랑합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아가서 7:10). 이것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그가 나를 기쁨으로 뒤쫓는구나. 내가 그에게 너무도 소중하기에 나를 따르는구나.

이와 같은 생각들은 시편 전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편147:11).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편149:4).

2010년 11월 12일 금요일

멧비둘기

내가 고군분투할 때 하나님은 다윗 왕의 비밀스런 소망을 나에게 보여주심으로 나를 지켜주셨습니다. 다윗은 애통하며, 불평하며 왜 하나님이 자신에게 진노하셨는지 의아해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품에서 손을 빼내시어 원수를 멸”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시편 74:11 참조).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원수가 지배하는 듯이 보였고 절망 가운데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원히 잊지 마소서”(시편 74:19).

다윗처럼, 우리도 자신들이 작은 멧비둘기처럼 악한 자의 올가미와 함정에 둘러싸여 있다고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가장 혹독한 시련의 시기에 나 자신을 그분의 사랑스런 새로 여기며 악한 자의 올가미로부터 나를 지켜주시겠다는 그분의 약속 위에 안식하는 것이 나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멧비둘기처럼 우리는 사랑하는 우리 구세주의 임재를 갈망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비둘기의 형체, 즉 그분의 성령으로 나에게 자신의 끊임없는 사랑과 지속적인 보호를 계시해 주시면서 임하시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토록 위대하고 위엄 있는 하나님이 나의 필요에 상관하시기 위해 멧비둘기로 자신을 낮추시겠다니 이 어찌 말로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그분이 비둘기로 내려오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여,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까? 가정에 괴로운 일이 있습니까? 고통스럽습니까? 이 모든 일이 너무 심각하여 때로 혼란스럽습니까?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주님의 작은 멧비둘기이며 그분은 절대로 당신을 악한 자에게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원수의 모든 올가미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며 당신이 곤핍할 때 그분이 당신에게 얼마나 헌신적인지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사랑을 당신에게 속삭이며, 말씀하시며 비둘기로서 항상 당신 곁에 계십니다.

솔로몬은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아가서 5:12).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 교회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아가서 6:9)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입니다 - 그분의 비둘기- 한 마리 멧비둘기.

참새는 땅에 떨어지지만 멧비둘기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장중에서 그분의 사랑 안에 무사히 안전하게 보호받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우리의 모든 곤경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며 자신이 영원히 신실하심을 우리에게 증명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능력과 사랑 안에서 온전히 안식하고 신뢰하며 기뻐하면서 모든 것을 통과해 나올 것입니다.

2010년 11월 11일 목요일

갈렙

강력한, 불굴의 정신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갈렙은 주님께 밀착하는 타입의 사람이었습니다! 갈렙은 인생에서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모든 굴곡을 겪으면서도 주님과 계속 동행하였던 인물을 상징하는 여호수아와 분리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갈렙은 요단너머로 파송되었던 정탐꾼과 동행했었습니다. 그곳에서 성령이 그를 “죽음의 장소”인 헤브론으로 이끌어갔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곳에 매장되었고 이삭과 야곱 그리고 다른 족장들도 매장된 곳이며 훗날 그곳에서 다윗의 왕조가 시작될 것이었습니다. 경이에 싸여 갈렙은 신성한 산에 올라갔고 믿음이 그의 영혼에 밀려들어왔습니다. 그는 그 성스러운 곳을 소중히 여겨 그 후로부터 헤브론을 자신의 기업으로 받기 원했습니다.

갈렙에 대해서 “나를 온전히 따랐”(민수기 14:24)다고 말합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결코 동요하지 않았으며 85세에 이르러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여호수아 14:11).

노년에 갈렙은 가장 위대한 전투를 감행했습니다.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14:12).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14:13).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14:14).

이 메시지는 참으로 영광에 넘칩니다. 죄에 대하여 죽는 것, 과거 어느 순간 충만함을 경험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끝까지 성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동하지 않고 당신의 영적 능력과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년에라도 “주님을 온전히 좇기”위해서!

갈렙의 기업 헤브론은 연합한 집단이라는 의미입니다! 무엇과 연합했다는 말입니까? 죽음입니다! 요단에서 죄에 대해 죽은 것 뿐 만 아니라 죽음의 장소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연합한 자들과 사는 것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갈렙이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아에 대해 죽는 이 길을 내게 주소서!”라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바치기 위해 제단을 쌓았었고 이곳에서 갈렙과 그의 족속이 산 제물을 드리는 제단과 지속적으로 연합하여 살아갈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갈렙의 온전한 마음은 그의 자녀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불을 일으켰습니다. 이스라엘 족속 중 두 종족과 반 종족이 돌이켜 세상과 우상을 포용한 반면, 갈렙의 가족들은 주님 안에서 강하게 성장했습니다!

우리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바람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안식, 기쁨, 평강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힘을 다하여”(마가복음 12:30) 마지막까지 그분을 따라야 할 것을 요구합니다.

2010년 11월 10일 수요일

완주하기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누가복음 14:28-30).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공생애를 마무리하실 즈음, 추종자들에게 선한 의도만으로는 험난한 시기를 견뎌낼 수 없다는 것을 경고하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수의 추종자들이 경주를 마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최고로 비극적인 상황은 그리스도를 붙들고 성숙한 제자로 자라가려는 의도로 출발했으나 표류해 버려 그분에 대해 냉랭하고 무관심해지는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는 기초를 놓았으나 먼저 비용을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완공하지 못했습니다. 자원이 바닥나 그만큼 진행하다가 멈추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일깨워 우리가 모두 변화하는 존재인 것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가만히 정지 상태로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매일 변화되어 가든지 아니면 당신의 옛 육적인 길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대가를 치르고라도 그리스도를 붙들려고 결단한 사람들은, 즉,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며 그분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린도후서 3:18).

경주를 마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지혜에 자라가고 이 세상과 쾌락에서 점점 더 멀어지며 일층 더 하늘의 마음이 되어갑니다. 그들의 영적감각이 고도로 훈련되어 하나님의 것과 육의 것에 대한 분별력이 계속 증가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리스도에 허기를 느낍니다. 세상에 속한 부속물들을 끊어버리고 그분의 영광가운데 그분과 함께 있기를 더욱 간절히 갈망합니다. 그들에게 죽는 것은 유익이고 최고의 상은 영원히 그분 옆에 있기 위해 그분의 임재로 불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하는 것은 하늘나라가 아니라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그분과 함께 있기를 열망하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그분께 있을 것을 확신하십시오. 그 교회는 이 세상과 온전히 동떨어져 있고 그분과 완전히 연합되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썩어질 것으로부터 썩지 않는 상태로 이전하는 것은 다만 그분의 임재로 들어가는 마지막 사랑의 한걸음이 될 것입니다!

크리스천 경주에서 당신은 어쩌면 넘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어나 다시 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지치고 다리를 다쳐 트랙에 누워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약해진 무릎을 들어 올리시고 완주하도록 초자연적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은혜로 당신은 경주를 마칠 것이고 주님이 결승선에 서서 “잘 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2010년 11월 9일 화요일

우리의 유일한 양식!

우리가 먹는 음식이 바로 우리라는 말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살이 우리의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한복음 6:53).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60절). 유대인들은 그러한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했습니다(66절).

이 주님을 먹는다는 것을 단지 성찬 식탁으로 전락시키는 사람은 주님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의 만찬은 다만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죽음을 통해서 그분이 우리의 생명의 원천이 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매일, 그분을 먹고 마시기 위해 나아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더 많이 먹을수록 더욱 영적인 삶이 우리 안에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식탁에 와서 먹고 강해지라는 공개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믿음의 기도 가운데 그분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양을 먹이지 않으면 뼈가 앙상해지고 약해져서 쉽사리 원수의 먹이가 됩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 땅에서 주님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된 남녀종들로 구성된 남은 자 사역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을 따라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이르기를 구하는 사람들을 양육하기 위하여 성령께서 그들에게 기름 부으셨습니다. 그들의 숫자는 적지만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생명의 원천이 없습니다. 그들은 빈번하게 주님의 임재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생명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수에 대항하기 위해 그분의 모든 자녀를 강하게 만드는 방법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이 힘은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떡을 먹는 것으로부터 옵니다. 우리의 영적 건강과 힘이 이것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들을 주의 깊게 들어보십시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한복음 6:57). 예수님은 아버지와 그토록 친밀하게 연합하여 있었고 오직 그분의 뜻을 행하기로 헌신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씀들이 바로 그분의 음식과 음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따로 떨어져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낸 결과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듣고 봄으로써 매일 지탱해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젠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4:32, 34). 더 나아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요한복음 6:27).

우리는 이 힘의 비밀을 감히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조차도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먹음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주님과 따로 떨어져 그분의 임재가운데 양질의 시간을 보내십시오. 그분은 당신의 굶주린 영혼을 먹이기 원하시고 이 위험한 시기를 통과하도록 당신을 인도하기 원하십니다. 당신이 전심으로 그분을 구할 때 하나님은 항상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2010년 11월 8일 월요일

온 집안 식구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심!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사도행전 10:44, 46). 이것은 고넬료 집안에 관한 말씀입니다.

온 집안 식구들에게 임하여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천상으로 들어 올린 사적인 오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기적적인 일입니다! 모든 친척들과 어린아이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여 드리는 찬양은 가슴 벅찬 감동입니다. 이 모두가 한 사람이 기도 응답이 올 때 까지 하나님을 구하기로 작정한 결과입니다.

여기, 우리는 성령이 물 붓듯 부어지는 때에, 많은 가정에서 그분의 역사와 임재의 증거를 거의 또는 전혀 보지 못한 채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 가정들의 많은 수가 현재 하나님의 성령 보다는 세상의 영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이 있는 곳에서는 하나가 됩니다. 그분이 거하시는 곳에는 안식과 평강,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이 세상의 영에 대한 승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가정에서 영적 권위를 되찾아야 합니다. 크리스천인 남편과 아내가 전적으로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영과 사랑가운데서 함께 흘러넘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극심한 위험이 닥칠 것입니다. 한 사람이 또는 두 사람 모두가 성령 안에서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개인적인 기도와 하나님께 대한 헌신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면 성령이 기사를 행하십니다.

지금 하나님은 땅에서 새로운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매우 강력하고, 초자연적인 일로써 지옥을 두려워 떨게 합니다. 성령은 사람들을 분리하여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성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비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로이 세례받은 성도들에게 번영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새롭게 생생하게 만나는 것입니다. 집, 땅, 가구, 차들, 옷들, 이 모든 것들은 영광의 주님과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매력이 없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가정의 구원자, 우리 가정의 구원자로 계시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나는 영적 세계를 들여다보았고 귀신들이 도망치는 것을 봅니다. 나는 한때 잠자던 거인이었던 하나님의 진정한 교회가 성령의 자극을 받아 떨치고 일어나 자신의 세력과 권위를 청구함으로써 흑암의 권세가 두려워 떠는 것을 봅니다.

전 가정들이, 전 교회들이, 전 사역들이 뒤집어 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영적인 것들에 진지해져라 그러면 내가 너희의 모든 필요를 채울 것이다!” 아버지께서 전 세계에 걸쳐 위대한 일을 행하고 계시며 우리는 그분의 강력한 축복의 참여자가 될 수 있습니다.

2010년 11월 5일 금요일

고넬료는 자기 집을 구원 했습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사도행전 10:1-2).

고넬료의 삶은 하나님께서 전심으로 헌신하고 순종하며 끊임없이 기도하는 자를 찾고 계신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집을 구원했는지, 또한 그의 헌신이 어떤 기적을 불러일으켰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고넬료는 자신과 자신의 집이 하나님의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결단하고 실제로 하나님을 추구하기 위하여 먹는 일을 저버렸습니다. 그의 깊은 영적 굶주림과 갈망에 비하면 음식은 2차적인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굶주림과 갈증이 따르지 않고 여러 날 금식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늘의 축복을 얻어내기 위한 노력으로 금식하는 것 보다는 먹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굶주림은 그분을 추구하는 심령을 가진 사람에게서 식욕을 없애버립니다.

이 고넬료라는 사람은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그는 설교 테이프도 듣지 못했고 선생님도 없었습니다. 그는 유대교 개종자도 아니었고 다만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렵사리 배웠습니다. 세미나도 없었고, 집회도 없었고 하나님에게서 뭔가 얻어내는 방법에 대한 책도 없었습니다. 그의 안에는 기도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고 촉구하는 성령도 아직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금식하며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하는 삶은 그를 구제하는 자로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집을 구원해달라는 그의 기도에 하나님이 아직 응답하시지 않았으나 궁핍한 자들 모두에게 관대하게 베풀었습니다. 자기의 필요에만 몰두하여 자신의 모든 시간, 주의, 금전을 쏟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주목을 받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태초부터 그랬습니다.

고넬료가 자신의 집을 구원했던 동일한 방법으로 당신도 당신의 집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하루만에, 영광스러운 기적 하나를 통해 그의 온 집이 구원을 받고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루만에 그의 집이 영적 소경으로부터 경이로운 빛과 생명으로 변했습니다. 모든 것이 이 사람이 자신의 집을 구원하기 위해 굳게 결단하고 착수한 결과입니다. 하나님, 우리의 길 잃은 가족과 친구를 위해 진지하게 기도하도록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2010년 11월 4일 목요일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사도행전 17:28). 하나님의 사람들은 바로 이 작은 원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 모든 동작, 실존 자체가 오로지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알기 위해서는 성령으로부터 지속적인 계시의 흐름이 있어야만합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신다면, 아버지의 깊고 은밀한 것들을 살피신다면, 그리고 솟아나는 생수의 샘이 되실 것이라면, 이 생수의 샘은 지속적이고 끝이 없는 그리스도의 계시이어야만 합니다. 이 생수의 샘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 주실 것을 조용히 믿음으로 신뢰하며 믿으며 기꺼이 주님을 의뢰하는 주님의 모든 종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분의 확실한 말씀, 즉 진실 되고 살아있는 계시가 필요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러한 말씀을 받았고 전 이스라엘이 그것을 알았습니다. 사무엘이 말했을 때 그 땅의 모든 음성들 중에서 그의 말이 실현되었고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든 음성들을 체에 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이 포화처럼 퍼부어지는 음성들 속에 피곤해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는 다만 소수의 진리만을 찾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만이 빛입니다. 온 세상은 어둠에 싸여있고 오로지 빛만이 어둠을 흩어버립니다. 당신은 지금 어두운 곳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베드로후서 1:19).

바울이 말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린도후서 4:6).

요한은 말했습니다. “그 나라[사탄의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요한계시록 16:10).

당신의 선행이 어둠을 쫓아내지 못하고 사회 이슈에 대한 우리 설교도 어둠을 뚫지 못합니다. 당신의 모든 개인적 경험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흑암의 권세를 당신이 묶는다 해도 그리스도의 비추는 빛이 없이는 효력이 없을 것입니다. 모든 어둠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가운데에서 사라져버립니다. 골방에 홀로 들어가 그리스도를 연구합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알았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고 바로 그 동일한 성령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2010년 11월 3일 수요일

날로 증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십자가 사건이후 모든 영적 거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대함속에서 길을 잃었고 여전히 그분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고 한탄하며 죽었습니다. 바울도 그러했고, 모든 제자들, 다수의 초대교회 교부들, 루터, 쯔빙글리, 청교도들, 경건한 영국의 설교자들, 그리고 오늘날 다수의 경건한 지도자들도 그러합니다.

이 거인들 모두가 동일하게 지배적인 열정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즉, 날로 증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그들은 휘황찬란하고 세속적인 이 세상 것들, 성공, 야망이나 세상의 명예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물질이나, 건강의 축복, 쓰임 받기 위함, 자아에 속한 어떤 것을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주님의 영광과 광대하심에 대하여 더 풍성한 계시를 받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 세대에게 사탄은 더 큰 위력을 휘두르고 있고 지옥은 전 분노를 풀어 놓고 있습니다. 과거 어느 세대 보다 원수의 견고한 진이 더욱 강화되었고 강력하고 참호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사탄은 전례 없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있으며 더 잘 알려지고, 사람들이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더욱 용납되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전투에서 성경 학교에서 배운 그리스도에 대한 기초 지식은 충분치 않을 것입니다. 그분에 대해 아는 것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우리는 더욱 큰 성령의 계시를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그분의 식탁에 앉아 많은 시간을 보내야합니다. 오로지 그분의 임재 속에 오래 있음으로, 오로지 그분과 함께 앉아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하늘의 지혜를 얻기 위해 그분을 기다리는 것으로만 당신은 그분을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분주하고 다른 데 정신이 팔린 사람들은 거의 그분을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은 날로 증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해 그가 가진 모든 것은 계시로 온 것입니다. 그는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에베소서 3:3). 성령께서 하나님의 깊고 감추어진 비밀들을 알고 계시고 바울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8절)을 이해하고 설교하기 위해 은사를 지속적으로 간구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이 영광스러운 풍성함에 접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는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졌다고 말했습니다(12절).

하나님은 전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해 그분에 대한 계시를 구하는 신자들, 즉,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으로의 문을 여는 매우 깊고 개인적인 친밀한 교제를 추구하는 신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2010년 11월 2일 화요일

오직 그리스도!

주님께 헌신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그분을 송축하고 기쁘시게 할까요? 더 많은 교회를 지어드릴까요? 성경학교를 더 지어드릴 까요?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은 집과 기관들을 만들까요? 이 모든 것이 가치 있고 필요하지만 손으로 만든 집에 거하시지 않는 그분은 이런 것 보다 훨씬 더 이상의 것을 원하십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위해 영원한 성전을 지었다고 생각했지만 몇 년이 지나자 그것은 쇠락했고 400년이 채 못 되어 완전히 파괴당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분의 백성, 사역자들, 목자들로부터 다른 그 무엇보다 추구하시는 것은 그분의 식탁에서의 교제입니다. 그분의 천상의 식탁에 둘러 앉아 하나 되는 것입니다!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장소요 시간입니다! 지속적으로 양식, 힘, 지혜와 친교를 위해 그분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이 세대는 잔치, 즉 주님과 홀로 교제하는 잔치에 불참하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주 예수에 대해 제한된 계시만 갖고 있습니다. 그들의 자리가 비어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처럼 높은 부르심의 장대함과 위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교제보다는 예배에서 우리의 영적 기쁨을 얻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더욱 더 일하면서 주님에 대해 아는 것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치게 만들고, 탈진하고 이 세상 어디라도 가며 그분의 일을 위해 우리 몸을 드립니다. 하지만 잔치자리를 거의 지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식탁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하여 그분에 대해 배우는 자리에 앉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3년 동안 아라비아 사막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천상에서 주님의 식탁에 앉아있었던 영광스러운 3년 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바울에게 가르쳐주셨고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안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개종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초자연적 환상으로 한 번 본 것, 하늘로부터 그분의 음성을 기적적으로 한 번 들은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환상을 한순간 보았고 더욱 더 원했습니다!

바울의 영혼 안에서 무언가 외쳤습니다. “오, 그분을 알았으면!” 그가 크리스천 체제 전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린도전서 2:2).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주의자들로 그들의 율법주의를 지키게 하라. 다른 이들로 교리의 쟁점을 논쟁하도록 하라.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자는 지치도록 일하게 하라. 하지만 나는 그리스도를 더욱 원하노라!”